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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의 인물상: 한국전쟁 이후 유럽 천주교 외원 기관의 원조와 그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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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6-05 ㅣ No.1695

[한국 교회의 인물상 · 128] 한국전쟁 이후 유럽 천주교 외원 기관의 원조와 그 영향

 

 

머리말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 휴전 후 한국은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고 경제를 재건하여 안정을 도모해야 하는 전환점을 맞았다. 하지만 전쟁 인플레이션과 기간산업의 붕괴로, 미국과 유엔의 원조를 받지 않고는 전재(戰災) 복구와 경제 재건을 추진할 수 없었다. 이들의 원조는 전쟁 직후부터 도입되어 1957년 정점에 이르렀다. 1953년부터 1960년까지 미국의 공식 원조는 1억 5,008만 달러 상당의 미공법(美公法) 제480호(Public Law 480)에 의한 식량 원조를 포함하여 약 17억 4,500만 달러, 유엔 한국 재건단(UNKRA, 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의 원조는 약 1억 2,000만 달러였다.1) 이처럼 대규모 원조 물자의 도입은 미국과 UNKRA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국과 유엔의 원조뿐만 아니라 국외의 종교기관 및 국제 NGO 조직 등의 지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천주교회의 경우 전쟁의 참화로 재산상의 피해와 많은 순교자의 희생이 있었음에도, 전 세계 천주교 외원기관과의 국제적 연대와 이들의 경제적 · 인적 지원 아래 도입된 원조 물자를 조달하여 전쟁 복구와 구호 활동에 힘썼다. 예컨대 가톨릭 복지 협의회(NCWC, National Catholic Welfare Council) 산하의 가톨릭 구제회(CRS, Catholic Relief Service)와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KFBÖ, Katholische Frauenbewegung Österreichs), 독일 미세레오르(Misereor) 등의 가톨릭 외원(外援) 기관으로부터 원조를 받아서 빈민 · 고아 · 노인 · 장애인 · 한센인들을 구호하고 그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또한 이들 원조는 교육 사업과 건설 및 복구 활동에도 도움이 되었다. 천주교 외원 기관의 원조는 많은 이들을 천주교에 입교시키며, 천주교 교세 확장에 이바지하기도 하였다.2)

 

하지만 2022년 국사편찬위원회 연구과제(1960~80년대 한국의 국제 가톨릭 네트워크의 지원 및 교류 관련 자료 기초 조사)를 수행하면서 천주교 외원 기관의 원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 미세레오르, 국제 가톨릭 형제회(AFI, Association Fraternelle Internationale) 등 유럽 천주교 외원 기관의 지원과 연대 관련 자료의 경우 서울대교구를 비롯한 각 교구 문서 보관소에 산발적으로 보관되어 있는 상황이지만, 일반 연구자가 접근 가능한 영역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한국전쟁 이후 1980년대까지 천주교 외원 기관의 전반적인 원조 양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우선 교구 문서고 자료를 수집하고 조사하는 작업이 서둘러 진행될 필요가 있음을 우선 밝힌다.

 

이 글은 한국전쟁 직후 유럽 천주교 외원 기관의 원조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한국전쟁을 겪은 한국 사회에서 천주교 외원 기관의 역할과 의미가 어떠했는지 확인할 것이다. 특히 자료의 부족으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실체를 좀처럼 잘 파악하기 힘든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 독일 미세레오르의 원조 모습을 조금이나마 파악함으로써, 한국전쟁 이후 천주교 외원 기관의 원조 양상을 이해하고자 한다.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의 활동

 

한국전쟁 전후(戰後) 천주교 외원 기관의 원조 활동 가운데 주목할 단체로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단체는 1948년에 오스트리아 가톨릭 신자 부인들이 복지 향상과 선교를 목적으로 조직한 여성 활동 단체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 독일의 강제 병합과 4개국 분할 통치 속에서도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황폐한 조국을 구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잘츠부르크(Salzburg)에서 창립되었다. 회원은 기혼 · 미혼의 여성들이며, 수도 빈(Wien)에 본부를 두고 오스트리아 각 교구에 지부가 있다. 한국에서는 통상 ‘오지리(墺地利) 부인회’로 호칭한다.3)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의 한국 원조는 1957년 1월 한국에 진출한 전교 협조회(SAM, Societas Auxiliarium Missionum)의 오스트리아 출신 선교사 서기호(徐基湖, 루디, 1956~2005)4) 신부가 초석을 놓았다. 1958년 잘츠부르크에서 열린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 모임에 참석했던 독일 유학생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1922~2009) 신부가 한국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면서 이루어졌다.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는 1958년 8만 달러의 원조를 시작으로 1959년 16만 7천 달러, 1960년 24만 달러 등 1964년까지 한국에 집중적으로 지원하였다. 1964년부터는 아시아의 다른 빈곤국들도 지원함으로써 원조가 분산되었지만, 1970년대까지도 한국에서 요청하는 지원 규모보다 더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5)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의 원조는 농업 개발 · 노동자를 위한 사회복지 · 교육 · 의료 · 한센인 · 고아 · 건설 사업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이루어졌다.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에서 1968년에 발행한 팸플릿 「10년간의 가정 단식일 1958~1966(10 Jahre Familienfasttag 1958-1966)」에 분야별 · 지방별 지원사업 내역과 원조 총액이 있다. 그런데 이 자료가 약 10년 단위로 정리되어 있고, 한국 자료는 기록이 없거나 있어도 단편적이어서, 1958~1959년에 이루어진 현황을 구체적으로 추적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6) 그럼에도 농업 개발사업, 노동자를 위한 사회사업, 교육사업, 의료사업, 한센인 사업, 피난민 주택 건설, 고아원과 고아를 위한 작업 훈련소 등 다양한 분야에 지원한 사실을 살필 수 있다.

 

 

 

이 부인회는 전쟁으로 고통받는 한국인들과 고통을 나누기 위해 특별히 ‘한국의 날’을 지정하고, 단식을 체험한 후 모금함으로써 원조 자금을 확보하였다. 진출 첫해부터 원조의 모습들을 살펴보면, 1958년 사순시기 동안 특별 대재(大齋)를 하루 더 추가하여 모금한 12만 달러 중 1만 달러를 부지 1,200평, 연건평 500평의 학생 1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구 효성여자대학 기숙사 건립비로 지원하였다. 1959년에 16만 7,000달러를 모금하여 전년 대비 51%가 증가하였다. 그중 4만 7,000달러를 대구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원의 건평 770평, 100개 병상의 종합병원을 세우는데, 4만 달러는 한국 고아원 확장사업에 지원하였다. 전주에서 그해 11월 가톨릭센터 신축 기금으로 1만 5,000달러를 원조하였는데, 1961년 4층 건물이 총공사비 2,000만 환으로 준공하였다. 또한 한국 학생들의 유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1963년의 예를 보면, 한국 유학생 30여 명에게 매달 생활비로 1,600실링(약 65달러), 1년에 3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학교 등록비로 1,200실링, 7월과 12월에 책과 옷값으로 600실링이 지급되었다. 이 금액은 최저한도의 생활비였다. 이 단체의 지원으로 유학했던 학생들은 귀국하여 교회와 학계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교회와 국가 발전에 기여하였다.7)

 

이처럼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는 고통받는 한국을 돕기 위해 모금한 구호금을 1958년부터 1964년까지 어느 일정한 분야를 자신들이 지정하여 고집하지 않고 필요에 따른 요청으로 인정되면 어느 분야든 현금으로 지원하였다. 현물이 아닌 현금 형태였기에 지원 대상 사업의 종류도 다양하였다.

 

 

독일 미세레오르(Misereor)의 활동

 

미세레오르8)는 독일의 주교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등 제3세계 국가들을 돕기 위하여 1958년에 설립한 독일 주교회의 산하 국제 개발 원조 기구로, 독일 아헨(Aachen)에 본부를 두고 있다. 독일 가톨릭 신자들의 사순시기 특별 헌금과 독일 교회 재정의 개발 원조 지원금, 독일 정부와 유럽 공동체의 개발 원조금을 원조 기금으로 사용하였다.

 

독일 미세레오르는 195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 원조를 시작하였다. 원조의 성격이 긴급 구호보다 개발사업 협력으로 바뀌는 시기였고, 미세레오르는 농어민, 도시 빈민의 자조, 자립 운동에 중점을 두었기에 교육사업, 건설 및 복구 사업, 의료사업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광주시의 봉제학교와 제주도의 농업훈련센터 건립을 지원했고, 제주도 성 이시돌 목장 개발을 두 차례에 걸쳐 도왔다. 또한 대구 파티마병원, 전주 성모병원 건립, 서울 성모병원 신축 등이 미세레오르의 도움으로 이뤄졌다.9)

 

1950년대만 살펴보면, 1959년 총 4개 부문 사업을 지원하였는데, 그해 11월 부산 사라호 태풍 수재민 구호금으로 부산교구를 통해 3만 마르크, 11월 제주도에 맥그린치(Patrick McGlinchey, 임피제, 1928~2018) 신부가 추진하고 있는 축산과 농산물 종자은행 건립 비용 7,500마르크, 양 구입비와 양모 직조 공장 건립비 7만 5,390마르크, 광주 봉제학교 건립비 4만 1,118마르크(이 중 1만 1,118마르크는 대부[貸付]) 등 총액 15만 4,008마르크를 지원하였다.10)

 

미세레오르는 대부분 10만 마르크 미만의 금액으로 직접 도움이 될 수 있는 원조를 하였다. 한센인 요양원 · 병원 · 약국 · 빈민 구호 식당 등 사회 복지 시설과 자선 사업 기관의 설립, 또한 농어민과 도시 빈민의 자립 운동을 지원하였다. 또한 자립은 장기적인 교육으로 가능하다고 여겨 직업 교육, 여성 교육, 문맹 퇴치 등에도 주력하였다. 다른 단체보다도 늦게 시작하였기에 긴급 구호 활동보다는 의료나 교육, 자활 사업 등에 더 치중하였다.

 

 

전후(戰後) 천주교 외원기관의 사회적 역할

 

일제 시기 천주교회는 정교분리 선교 방침을 고수하여 신자들의 민족운동을 비롯한 사회 참여를 제한하며, 교회를 지킨다는 미명 아래 일제와 타협하였다. 이 때문에 역사학계의 일제 시기 천주교회의 활동에 관한 평가는 부정적인 견해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천주교회는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을 겪으며, 사회적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앞서 살핀 것처럼, 전 세계 천주교 외원 기관과의 국제적 연대와 이들의 지원 아래 전쟁 복구와 구호 활동을 강화해 나갈 수 있었다. 여기서는 살피지 않은 가톨릭 구제회, 아피와 함께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 독일 미세레오르 등의 경제적 지원과 협력이 컸다.

 

천주교 외원 기관들의 원조에 따른 영향을 살펴보자면, 첫째 이들의 원조를 통하여 수많은 한국인의 귀중한 생명이 기아, 한파, 질병에 따른 죽음에서 보호되었다. 둘째 이들의 원조와 봉사 활동은 인종, 국가, 종교를 초월하여 행해졌기 때문에 대다수 한국인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11) 천주교 신자 수가 1954년 18만 9,408명에서 5년 후인 1959년에는 41만 7,070명으로 두 배 이상 증가하였다. 이것은 연평균 24%라는 놀라운 증가율이었다. 그러나 ‘밀가루 신자’를 양산하고 천주교회가 피동적으로 외부의 도움에만 기대는 태도를 보이게 하는 부작용을 초래하였다는 지적도 있다. 셋째 천주교 외원 기관의 원조 활동이 천주교회 사회사업의 모태와 모범이 되었다.

 

1960년대 들어서도 천주교 외원 기관의 원조는 계속되었다. 이들의 지원 아래 천주교회는 한국 사회가 직면한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사회 문제 해결에 힘을 다하였다. 특히 1960년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 이후로 한국 천주교회는 교회 혁신운동에 따라 시대가 요구하는 소외 계층들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사회복지사업, 협동조합, 신협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인권운동, 민주화운동 등 다양한 영역에 참여하여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을 대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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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정란, 「한국전쟁과 외국 가톨릭교회의 전재 복구 활동에 관한 연구」,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과 전망 2―해방 공간과 한국전쟁을 중심으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1, 187~188쪽.

 

2) 전쟁 직전 1949년 천주교 신자 수가 약 15만 8,000명에서 전쟁 이후 1959년 41만 7,0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강인철, 「한국전쟁과 천주교 반공주의 : 역사적 변동과 비판적 성찰」, 『교회사학』 19, 2021, 298쪽).

 

3)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 『한국가톨릭대사전』 9, 한국교회사연구소, 6461~6462쪽.

 

4) 본명은 루돌프 크라네비터(Rudolf Kranewitter). 1956년 3월 17일 사제 서품을 받고 이듬해 1월 한국에 도착하였고, 1959년 6월부터 1961년 7월까지 가톨릭신문사 제7대 사장을 역임하였다. 1966년 10월 6일 한국으로 귀화하고, 1971년 7월 오스트리아 빈 대학으로 유학하여 1975년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환속하였다.

 

5) 장정란, 앞의 논문, 205쪽.

6) 장정란, 앞의 논문, 206~208쪽.

7) 장정란, 앞의 논문, 208~209쪽.

8) 정식 명칭은 ‘미세레오르-세상의 기아와 질병 퇴치 운동(Misereor-Aktion gegen Hunger und Krankheit in der Welt)’.

9) 「한국교회에 도움 준 해외 원조기구」, 『가톨릭신문』 3029호(2017년 1월 22일 자), 10면.

10) 장정란, 앞의 논문, 211~212쪽.

11) 강인철, 『전쟁과 종교』,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3, 305쪽.

 

[교회와 역사, 2024년 3월호, 이민석 대건 안드레아(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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