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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조선대목구의 해외 거점: 나가사키 연락사무소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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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6-05 ㅣ No.1694

[특별기고] 조선대목구의 해외 거점


- 나가사키 연락사무소에 관하여 -

 

 

머리말

 

조선대목구는 1866년 병인박해로 선교사가 국외로 피신하면서, 그 후 10년간 선교사 부재 시대가 이어졌다. 그동안 1876년에 드게트(VictorMarie Deguette, 崔東鎭, 1848~1889) 신부와 블랑(Marie Jean Gustave Blanc, 白圭三, 1844~1890) 신부가 입국할 수 있었지만, 선교사 전원이 조선 국내에 들어갈 수 없어 만주교구의 차쿠(岔溝, NotreDame des Neiges)에 머물면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 후, 블랑 신부가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를 통해 차쿠와의 연락 경로 구축을 도모하여, 그 결과, 종래의 변문(邊門)을 경유하는 연락 방법을 대신해서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통한 연락이 더욱 안전하고 확실하게 되었다. 당시 나가사키는 프티장(Bernard Thadée Petitjean, 1829~1884) 주교가 관할하는 일본 남위대목구(日本 南緯代牧區, Vicariat Apostolique du Japon Méridional)의 중심지로서, 주교좌인 오우라 천주당(大浦天主堂), 주교관, 라텐(羅典) 신학교가 있었다.1) 나가사키는 요코하마(横浜) · 고베(神戸)와 함께 배편의 요충으로, 상해, 홍콩, 그리고 부산 모두 항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프티장 주교와 리델(Félix Clair Ridel, 李福明, 1830~1884) 주교 사이에는 돈독한 신뢰 관계가 있었던 것 같다. 프티장 주교가 1868년 1월에 어떤 일로 로마를 방문했을 때, 당시 로마 대표부의 리브와(Napoléon François Libois, 1805~1872) 신부에게 리델 신부가 뛰어난 주교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프티장 주교에 의하면 리델 신부와는 파리의 신학교에서 함께 지냈으며, 그 후 상해, 나가사키에서 만났지만, 리델 신부가 주교직에 필요한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고 한다.2) 프티장 주교는 조선 국내와 차쿠 간의 연락 경로 구축에 분주한 리델 주교와 블랑 신부를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그러한 경위도 있어서 리델 주교는 나가사키를 연락 거점화하는 구상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 코스트(Eugène Jean Georges Coste, 高宜善, 1842~1896) 신부가 1881년부터 1885년까지 나가사키에 체류하게 된 것이다.

 

 

나가사키 외국인 거류지의 조선대목구 연락사무소

 

과연 코스트 신부는 어디에 살았을까? 우선, 코스트 신부가 살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주거에 관한 기술을 소개하고자 한다. 코스트 신부가 나가사키 체류 중인 1883년 7월, 블랑 주교는 주교 서품을 받기 위해 나가사키를 방문했다.3) 그때 조선에서 블랑 주교와 동행한 김기호(金起浩, 요한, 1824~1903)는 훗날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與呉致玉共陪白監發程當日抵済物浦執日本大輪船名鎮西丸起程第六日到長崎大抵自済物浦水路五千餘里云使呉友先下陸往朝鮮舘聖堂稟告高趙二監率文斐理伯来迎接矣…李味増霨金多黙文斐理伯崔路加朴保禄居舎舘貰得於法國人而毎年貰銀一百二十圓也墻内有好井與果木若干故寓接滋味可慰悦…4)

 

…나는 오치옥과 함께 블랑 신부님을 모시고 길을 떠나 당일 제물포에서 일본 증기선 화륜선(鎭西丸)을 타고 6일 만에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나가사키는 제물포에서 수로로 5천여 리라 한다. 오치옥이 먼저 상륙하여 조선관(朝鮮舘) 성당에 가서 알렸더니, 코스트 신부님과 조스 신부님이 문 필립보를 데리고 마중해 주셨다.…코스트 신부님과 조스 신부님, 이 미카엘, 김 토마스, 문 필립보, 최 루카, 박 바오로가 프랑스인에게서 빌려 사는 집(舎舘)에 갔는데, 매년 집세가 은 120원(圓)이라고 한다. 담장 안에는 좋은 우물과 과수가 있는데, 생활하면서 맛있는 과일을 즐길 수 있어서 작은 기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기록을 통해 코스트 신부와 조스(Jean-Baptiste Josse, 趙, 1851~1886) 신부, 그리고 조선인 신도들이 조선관이나 사관으로 기술된 집에 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집의 위치는 어디일까? 당시의 나가사키 외국인 거류지(長崎外國人居留地)에 거주한 외국인의 기록인 『各國人員幷戸数調表明治九年~同三十三年』5)을 조사한바, 1883년 1월 1일 자의 주소록에 코스트 신부, 드게트 신부,6) 프와넬(Victor Louis Poisnel, 朴道行, 1855~1925) 신부,7) 조스 신부8)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주소는 나미노히라 야마테 26번지(浪ノ平山手二十六番地)이다. 다음으로 당시 나가사키 외국인 거류지의 지도에서 정확한 장소를 확인할 수 있다.9) 녹색은 목조, 감색은 목조 2층 건물, 빨간색은 부석 건물을 각각 나타낸다. 우물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남아 있는 나가사키 외국인 거류지의 사진 중에서 실제 건물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자료 ①은 1864년경, 자료 ②는 1887년경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지점에서 촬영된 사진 자료 ③은 1877~1886년 사이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코스트 신부 일행들이 체류한 시기에 해당한다.10) 코스트 신부의 1882년 11월 6일 자 서한에, 오우라 천주당과 주교관 근처의 가옥을 빌린 것을 엿볼 수 있는 기술이 있지만,11) 이것을 위의 지도나 사진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같은 서한에서는 인쇄소가 가동을 시작했고, 조선에서 권치문(權致文, 타대오, 1833~1892)이 신학생 2명을 인솔하고 병인 순교자 4위의 유해(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장주기 회장)를 모시고 나가사키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12) 유해는 프티장 주교가 보관하게 되어 있었고, 이를 전해 받은 프티장 주교에 의하면 그때 고스트 신부는 “조선대목구는 모든 일이 순조롭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13)

 

그런데 나가사키 외국인 거류지의 주소록으로 1883년 1월 1일 시점에서, 코스트 신부, 드게트 신부, 프와넬 신부, 그리고 조스 신부가 거주하고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1년 후의 기록, 즉 1883년 12월 31일 자 기록에 의하면, 코스트 신부의 이름만 확인할 수 있다.14) 그해에 드게트 신부, 프와넬 신부 그리고 조스 신부가 나가사키를 떠나 조선에 입국했기 때문이다. 드게트 신부와 프와넬 신부는 1883년 4월에 일본인 신학생 후카호리 우시마츠(深堀丑松)의 안내로 증기선을 타고 조선에 입국했고,15) 조스 신부는 10월 초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 후 코스트 신부도 1885년 11월에 나가사키를 떠나 조선에 입국하게 된다.

 

 

나가사키 연락사무소의 설치 경위

 

마지막으로 나가사키 연락사무소가 어떠한 경위를 거쳐 설치되게 되었는지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16)

 

코스트 신부는 나가사키에 오기 전 요코하마에서 『한불자전(韓佛字典, Dictionnaire CoréenFrançais)』과 문법서 『한어문전(韓語文典, Grammaire Coréenne)』을 인쇄해 간행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17) 리델 주교는 『한어문전』의 간행을 눈앞에 둔 1881년 4월, 차쿠와 조선 국내 간의 연락에 관하여 나가사키를 경유하는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음에 따라, “변문을 통한 조선과의 연락 방법은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포기한 상태가 되어, 서신 연락에 관해서는 나가사키·부산 루트를 통해 할 생각”이라고 언급하고 있다.18) 그리고 약 2개월 후에는 “조선대목구의 거점을 설치하는 건을 검토하기 위해 현재 상해에 체류 중이고, 9월에 나가사키에 갈 생각”이라고 말해 나가사키 방문을 시사하고 있다.19) 그리고 나가사키에서의 업무를 코스트 신부에게 맡기기로 하고, 요코하마에 체류 중인 코스트 신부를 나가사키로 전임시킬 생각을 표명했다. 동시에 차쿠도 당분간 유지한다고 하였다.20)

 

이리하여 리델 주교는 나가사키를 방문하게 되는데, 우선 1881년 9월 5일 상해에서 요코하마에 도착했고,21 그리고 코스트 신부와 함께 일본 북위대목구의 연례 사제 피정에 참가한 후,22) 리델 주교는 요코하마에서 배편으로 10월 3일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그 이틀 후인 10월 5일 리델 주교는 뇌졸중 때문에 쓰러지고 말았다. 프티장 주교는 급히 나가사키에 머물고 있던 러시아 해군 군의를 불러 치료를 받게 하였다. 리델 주교는 위태로웠던 목숨을 겨우 건졌지만 우반신이 마비되는 후유증이 남았다.23) 프티장 주교는 상해 대표부의 마르티네( Jean-Baptiste Martinet, 1844~1905) 신부에게 리델 주교가 나가사키가 차쿠와 같은 만큼 용이하게 조선 국내와 연락을 취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적고 있다.24) 이로 미루어 리델 주교가 나가사키를 연락 거점으로 삼을 의사를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후 상해에서 프와넬 신부가, 요코하마에서 코스트 신부가 각각 나가사키에 도착했고, 리델 주교, 조선인 신학생 4명과 같은 부지 내에서 살았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25) 아마도 리델 주교 · 코스트 신부 · 프와넬 신부는 주교관에, 조선인 신학생 4명은 라텐 신학교에 머물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런데 나가사키에서 요양하고 있던 리델 주교는, 프와넬 신부와 함께 나가사키를 떠나 상해로 향했다. 프티장 주교에 의하면 나가사키에서 의사를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26) 프티장 주교는 리델 주교가 만주보다 나가사키 쪽이 훨씬 쉽게 조선교회를 사목할 수 있으리라고 하면서 리델 주교의 건강 회복을 빌었다.27) 그러나 결국 리델 주교는 충분히 회복되지 못했고 프랑스로 귀국하게 되었다. 만약에 리델 주교가 건강했더라면, 혹은 주교로서의 업무 수행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회복했더라면, 코스트 신부와 함께 나가사키에 머물면서 조선 국내와 빈번히 연락을 주고받음으로써, 사목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끝으로 나가사키 연락사무소의 설치 기간은 짧았지만, 통신 연락의 중심적인 장이었으며, 조선대목구의 경리 관련 업무와 인쇄 업무가 이루어져 조선 입국을 준비하는 선교사들의 일시 대기소가 되기도 했다. 또한, 그동안 블랑 주교의 주교 서품식과 병인 순교자 유해의 보관 위탁도 이루어졌다. 앞으로 조선대목구 나가사키 연락사무소에 관한 연구가 더욱 심화되기를 바란다. 

 

………………………………………………………………………………………………

 

1) 일본대목구의 설정은 184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정된 뒤, 1836년에 류큐(琉球)가 조선대목구의 관할이 되어 앵베르(Laurent-Joseph-Marius Imbert) 주교와 페레올(Jean-Joseph Ferréol) 주교가 류큐에 선교사나 신자를 파견하려고 했다. 1844년에 폴카드(Théodore-Auguste Forcade) 신부가 마카오에서 프랑스 군함으로 류큐에 상륙해, 2년 후인 1846년 교황청은 류큐를 조선대목구로부터 분리해서, 일본 본토와 함께 일본대목구를 설정했다. 폴카드는 초대 일본 대목이 되었다. 그 후 일본 정부(도쿠가와 막부)는 1858년 구미 열강(미국,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과 통상조약을 체결해 개국했다. 이를 통해 파리외방전교회 지라르(PrudenceSéraphin-Barthélemy Girard) 신부가 주일본 프랑스 총영사 통역 겸 가톨릭 사제라는 직위로 요코하마에 체류하게 되었다. 당시의 일본교회는 폴카드 주교가 1852년 대목을 사임한 이래, 일본 주교는 공석이 되어 있었지만, 1865년에 프티장 신부가 일본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 후, 1876년 일본대목구는 일본 북위대목구(Vicaire Apostolique du Japon Septentrional: 오주프 주교Pierre-Marie Osouf)와 일본 남위대목구(프티장 주교)로 분할되었다.

 

2) Lettre de M. Lobois aux Directeurs du Séminaire, Rome, le 22 Janvier 1868[로마 대표부의 리브아 신부가 파리의 지도자들에게 보낸 서한(1868년 1월 22일, 로마)], A-MEP, Vol. 241, f. 221-222.

 

3) 블랑 주교의 주교 서품식은 1883년 7월 8일, 프티장 주교의 주례로 주교좌 오우라 천주당에서 거행되었다.

 

4) 김기호, 『奉教自述』 한문본,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5) 長崎県立図書館所蔵, 『各国人員幷戸数調表 明治九年~同三十三年』, 「明治十六年一月一日現在調査長崎港在留各国人員戸数明細表」.

 

6) 드게트 신부는 1882년 10월, 블랑 주교의 지시에 따라 차쿠를 떠나(Lettre de M. Guillon à M. Armbruster, Mandchourie, le 2 Novembre 1882[만주대목구 기용 신부가 파리 본부의 아름브뤼스테르 신부에게 보낸 서한(1882년 11월 2일, 만주)], A-MEP, Vol. 565, f. 531) 나가사키에 왔다. 이에 따라 조선대목구 소속 선교사는 차쿠에서 철수했다.

 

7) 프와넬 신부는 나가사키에서 뇌졸중의 후유증으로 요양 중이던 리델 주교를 모시고 상해로 가서 홍콩까지 동행한 후 다시 나가사키로 돌아왔다.

 

8) L’Institut de recherche France-Asie(IRFA) 홈페이지에 게재되고 있는 선교사 정보에 의하면, 조스 신부는 1881년 10월 26일에 파리를 출발해, 나가사키에서 조선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고, 1883년 10월에 입국했다. 또, 나가사키 체류 중에는 조선어의 학습이나 인쇄 업무에 종사했다고 한다.

 

9) 『長崎市内小曽根地域地割図』(長崎県立図書館所蔵). 明治10年代(1877~1886년)에 제작되었다.

 

10) 자료 ①, 자료 ②, 자료 ③은 모두 나가사키대학 부속 도서관 소장.

 

11) Lettre de M. Coste à M. Lemonnier, Nagasaki, le 6 Novembre 1882[코스트 신부가 홍콩 대표부의 르모니에 신부에게 보낸 서한(1882년 11월 6일, 나가사키)], A-MEP, Vol. 580, f. 1064.

 

12) Lettre de M. Coste à M. Lemonnier, Nagasaki, le 6 Novembre 1882[코스트 신부가 홍콩 대표부의 르모니에 신부에게 보낸 서한(1882년 11월 6일, 나가사키)], A-MEP, Vol. 580, f.1064.

 

13) Lettre de Mgr Petitjean à M. Lemonnier, Nagasaki, le 6 Novembre 1882[프티장 주교가 홍콩 대표부의 르모니에 신부에게 보낸 서한(1882년 11월 6일, 나가사키)], Vol. 570. fol. 2630.

 

14) 長崎県立図書館所蔵, 『各国人員幷戸数調表 明治九年~同三十三年』, 「明治十六年十二月三十一日現在調査長崎港在留各国人員戸数明細表」.

 

15) Lettre de Mgr Petitjean à M. Martinet, Nagasaki, le 30 Avril 1883[프티장 주교가 상해 대표부의 마르티네 신부에게 보낸 서한(1883년 4월 30일, 나가사키)], A-MEP, Vol. 570, f. 2728.

 

16) 조선대목구 관련 서한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회 편, 『필사문서 판독자료 편 Vol. 580(B) Corée 1875-1886』(2011년)을 참조했다.

 

17) 장동하, 「개항기 조선교구 인쇄소 연구」, 『신학과 사상』 57,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06 ; 류현국, 『한글 활자의 탄생』, 홍시, 2015 ; 신의식, 「한국천주교 활판 인쇄소와 인쇄 장소에 관한 연구―코스트 신부의 인쇄·출판 활동을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52, 한국교회사연구소, 2018.

 

18) Lettre de Mgr Ridel à M. Lemonnier, N.D. des Neiges, le 4 Avril 1881[리델 주교가 홍콩 대표부의 르모니에 신부에게 보낸 서한(1881년 4월 4일, 차쿠)], A-MEP, Vol. 580, f. 928.

 

19) Lettre de Mgr Ridel à M. Lemonnier, Changhai, le 24 Juin 1881[리델 주교가 홍콩 대표부의 르모니에 신부에게 보낸 서한(1881년 6월 24일, 상해)], A-MEP, Vol. 580, f. 958-959.

 

20) Lettre de Mgr Ridel au Directeurs de Paris, Sanatorium de Hongkong, le 5 Août 1881[리델 주교가 파리의 지도자들에게 보낸 서한(1881년 8월 5일, 홍콩 요양소)], A-MEP, Vol. 580, f. 967.

 

21) Lettre de Mgr Osouf à M. Lemonnier, le 5 Septembre 1881[오주프 주교가 홍콩 대표부의 르모니에 신부에게 보낸 서한(1881년 9월 5일, 도쿄)], A-MEP, Vol. 573, f. 717.

 

22) Lettre de Mgr Osouf à MM. les Directeurs, le 23 Septembre 1881[오주프 주교가 파리의 지도자들에게 보낸 서한(1881년 9월 23일, 도쿄)], A-MEP, Vol. 573, fol. 729. Nous faisions notre retraite commune la semaine dernière. Y compris Mgr Ridel, qui nous a honoréd’une visite, et M. Coste, nous étions 20 missionnaires réunis(우리는 지난 주에 공동 피정을 실시했다. 우리를 방문한 리델 주교와 코스트 신부를 포함하여 20명의 선교사들이 모였다).

 

23) Lettre de Mgr Petitjean à M. Rousseille, Nagasaki, le 10 Octobre 1881[프티장 주교가 루세이유 총장에게 보낸 서한(1881년 10월 10일, 나가사키)], A-MEP, Vol. 570, fol. 2457.

 

24) Lettre de Mgr Petitjean à M. Martinet, Nagasaki, le 20 Octobre 1881[프티장 주교가 상해 대표부의 마르티네 신부에게 보낸 서한(1881년 10월 20일, 나가사키)], A-MEP, Vol. 570, fol. 2460-2461.

 

25) Lettre de Mgr Petitjean à M. Rousseille, Nagasaki, le 21 Novembre 1881[프티장 주교가 루세이유 총장에게 보낸 서한(1881년 11월 21일, 나가사키)], A-MEP, Vol. 570, fol. 2448b.

 

26) Lettre de Mgr Petitjean à M. Lemonnier, Nagasaki, le 28 Novembre 1881[프티장 주교가 홍콩 대표부의 르모니에 신부에게 보낸 서한(1881년 11월 28일, 나가사키)], A-MEP, Vol. 570, fol. 2453b.

 

27) Lettre de Mgr Petitjean à M. Martinet, Nagasaki, le 5 Décembre 1881[프티장 주교가 상해 대표부의 마르티네 신부에게 보낸 서한(1881년 12월 5일, 나가사키)], Vol. 570. fol. 2456b.

 

[교회와 역사, 2024년 3월호, 미야자키 요시노부 宮崎善信(나가사키 외국어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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