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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17: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 선교지를 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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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6-05 ㅣ No.1692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 (17)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 선교지를 맡다


파리외방전교회, 조선대목구 관할 결정하고 브뤼기에르 주교 지지

 

 

-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되자 마카오 성 요셉 신학교 포르투갈 신부들이 그의 조선 입국을 방해했다. 마카오 성 요셉 신학교 전경.

 

 

파리외방전교회 장상들 오해 드디어 풀려

 

파리외방전교회 장상들이 저에게 품은 오해를 드디어 해소했습니다. 우리 전교회가 조선 선교의 책임을 져야만 지속해서 조선대목구에 사제를 파견할 수 있다는 저의 진심이 통했습니다. 장상들은 저의 편지를 읽고 저를 지지하며 다시 파리외방전교회 회원으로 받아주셨습니다. 그들은 1833년 4월 16일 마카오 대표부장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공문을 보냈습니다.

 

“마카오에 도착한 갑사 명의 주교님은 자신이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된 사실과 더불어 이 선교지가 우리 신학교에 맡겨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는 주교님이 기대하지 않았던 사태였습니다. 포교성성의 이러한 조치로 그는 잘못된 처지에 놓였음을 보았습니다. 갑사 명의 주교님은 서둘러 교황 성하께 편지를 보내 자신이 우리 전교회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어 유감스럽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또 이 선교지가 우리 전교회에 맡겨지도록 요청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선교지들의 회원들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이 이 사안에 관해 생각하고 있는 바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거의 모두가 우리 전교회가 이 선교지를 맡을 수 있다는 의견임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갑사 주교님의 요청을 지지한다고 포교성성에 견해를 밝혔습니다. 3명의 우리 선교사가 출발하기 전에 포교성성으로부터 답신을 받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 5월 말이나 6월 초에 출발한 마지막 영국 배들을 이용하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신속하게 답신을 받을 것입니다.”

 

이 공문에는 장상인 랑글루아·뒤브와·바랑 신부의 서명만 있었습니다. 장상 중 한 명인 바루델 신부는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 선교지를 맡는 것을 여전히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공문 내용처럼 우리 회원 대다수가 찬성해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대목구를 관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공문은 1833년 9월 12일 마카오에 도착했습니다. 르그레즈와 신부는 다음날 편지로 기쁜 마음으로 저에게 본부의 결정을 알려줬습니다.

 

“좋은 소식입니다. 파리 신학교 지도자 신부들이 주교님을 지지하고 나서셨습니다. 제가 어제 받은 편지에서 랑글루아 신부님은 다음과 같이 적어 보내셨습니다. 저는 우리 공동체가 동의한 사항에 대해 포교성성으로 다음과 같이 알리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우리는 이 고위 성직자와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 주교님들과 동료들의 의사를 파악했습니다. 그 결과 만약 교황청에서 이 선교지를 맡아달라고 우리에게 제안하거나 권고한다면, 우리는 이 선교지를 받아들이는 것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이럴 때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갑사의 주교님을 도울 수 있도록 저희는 몇몇 선교사들을 파견할 것입니다.”

 

사실 저는 르그레즈와 신부의 이 편지를 1835년 1월 19일 서만자에서 받아볼 수 있었습니다.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 선교지를 맡겠다고 결정하기 전에 저는 마카오에서 조선을 향해 길을 나섰기 때문입니다. 저는 서만자에서 이 편지를 받고 1835년 2월 8일 “조선 선교지를 우리 회에 맡겨 주신 하느님의 섭리에 감사드린다”는 답신을 보냈습니다.

 

- 남경교구장이면서 북경교구장 서리를 겸하고 있던 페레이라 주교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을 끝까지 방해했다. 페레이라 주교 초상화.

 

 

왕 요셉 먼저 보내며 조선 교우들에게 서한

 

조선을 향해 마카오를 떠나기 전 북경에 있는 남경 주교님과 저보다 먼저 조선에 가기로 돼 있는 여항덕 신부, 그리고 조선 사신단의 일행으로 해마다 음력 12월에 북경에 오는 조선 교우들에게 제가 간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왕 요셉을 먼저 보냈습니다. 그는 1832년 11월 23일 북경으로 떠났습니다.

 

저는 조선 교우들에게 이렇게 첫 인사를 전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여러분의 소원이 드디어 이뤄졌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선교사들과 주교 한 사람을 보내십니다. 이 특은을 받은 자가 바로 저입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살다가 죽기 위해 곧 출발합니다. 여러분의 왕국에 유럽인을 맞아들이면서 생겨날 어려움 때문에 겁내지 마십시오. 하느님께 이 큰 사업을 맡기십시오. 그분의 천사들과 성인들에게 기도하고, 특히 성모님의 든든한 보호를 청하십시오. 당신 사업을 시작하신 하느님께서 성공리에 그 일을 끝내실 것입니다.”

 

저는 할 수 있는 한 조선 교우들의 용기를 북돋워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조선인들의 소심한 성격이 내 여행의 성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들이 한결같이 제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조선 사람들이 유럽인 선교사를 맞이하고자 한다면, 아무도 이들의 입국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돕고자 해도 무위로 돌아갈 것이며, 다른 이들의 그 어떤 도움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왕 요셉에게 사신단 일행으로 온 조선 교우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만나 격려하고 제가 가야 할 장소와 의심을 사지 않고 우리가 서로 알아볼 수 있는 표시를 약속하고 돌아오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왕 요셉은 능력껏 심부름을 잘해 왔습니다. 그는 혹독한 겨울이 시작될 무렵 변변치 못한 여장으로 돈도 거의 없이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병이 나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마카오에서 북경까지 갔다 되돌아오는 4700㎞가 넘는 여정을 홀로, 그것도 처음으로 감당했습니다. 그는 시간을 맞추기 위해 줄곧 뛰어다녔다고 합니다. 중국 여관에서는 이불을 주지 않아 여행할 때 담요가 필수품인데 그는 얼어 죽기를 각오하고 그 담요를 팔아 여행 경비를 충당하며 북경까지 갔습니다. 목숨을 걸고 저의 명을 지킨 것입니다.

 


북경에 머물던 조선 교우들 만나 편지 전해

 

왕 요셉은 1833년 2월 27일 북경에 도착했습니다. 마카오에서 떠난 지 67일 만입니다. 그는 북경에 머물던 조선 교우들을 만나 저의 첫 사목 서간을 전했습니다. 이때 만난 조선 교우가 바로 유진길(아우구스티노. 필자 주- 유진길은 1833년 12월 5일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2통의 편지를 보내는데 그 안에 사목 서간을 잘 받았다는 내용이 들어있다)입니다.

 

왕 요셉은 페레이라 주교와 여항덕 신부에게도 저의 편지를 전했습니다. 포르투갈 라자로회 출신 페레이라 주교는 북경교구장 수자 사라이바 주교가 1818년 마카오에서 선종한 후 신임 교구장이 임명되지 않아 북경교구장 서리직을 겸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1804년 남경교구장 주교로 임명된 후 1806년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로부터 주교품을 받았습니다. 그는 흠천감과 산학관 관원이었기에 추방을 면할 수 있었으나, 자신의 교구인 남경에는 끝내 가지 못하고 북경교구 주교좌성당인 남당에 머물러야만 했습니다.

 

왕 요셉이 북경으로 떠난 후 저는 조선 입국 루트를 짰습니다. 산서를 거쳐서 길을 갈 것인지, 강남을 거쳐야 할 것인지, 어느 길이 안전하고 신속하게 갈 수 있는지 고심이 컸습니다. 안타깝게도 포교성성 대표부장 움피에레스 신부는 이에 관해 어떤 정보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조선대목구장이 되자 많은 것을 약속했던 마카오 성 요셉 신학교의 포르투갈 신부들이 비협조적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들은 제가 북경으로부터 소식을 받기 전까지 조선으로 떠나지 못하게 하라고 움피에레스 신부를 압박했습니다. 다행히도 움피에레스 신부는 그들의 압박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포르투갈 신부들로부터 제가 남경을 거쳐 여행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이 과정을 지켜본 저는 중국에 있는 포르투갈 선교사들과 그들의 지시를 따르는 여항덕 신부가 저의 조선 입국 계획을 틀림없이 실패로 돌아가게 할 것이라고 직감했습니다.

 

드디어 저는 1832년 12월 17일 밤 10시 마카오에서 중국 복안으로 가는 배에 탔습니다. 이제 조선을 향해 저 홀로 길을 떠납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6월 2일, 리길재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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