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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이콘산책19: 오해와 편견과 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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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5-22 ㅣ No.1070

[김형부 마오로의 이콘산책] (19) 오해와 편견과 포용


‘이콘 공경’ 7차 공의회서 공식화했으나 오역으로 오해 받아

 

 

(작품 1) 성 베드로가 샤를 마뉴에 황제의 기를 수여하고, 교황 레오 3세에 영대를 수여함으로서 세상의 힘과 영적인 힘을 부여하는 상징을 보여준다. 라테르노 대성당의 모자이크.

 

 

1. 카롤링거 르네상스와 정치적 배경

 

샤를마뉴(742~814, 재위 768~814)를 카를로스 또는 칼 대제라 부릅니다.(국가에 따라 다르게 부름) 프랑크 왕국의 왕이었던 그는 유럽 정복 전쟁과 후일 신성로마제국을 이룩하였습니다. 그가 위대한 황제로 인정받는 까닭은 특출한 정치적 능력과 더불어 자기 계발(啓發)을 통해 전사에서 시대의 지성인으로 탈바꿈했다는 데 있습니다. 당시 프랑크 전사들은 지성(知性)이 전쟁을 치르는 전사에게 필수적인 용기를 저해한다고 믿었습니다. 세계를 정복한 전투적인 황제 중에 글을 모르는 자들이 많았다는 것은 아이로니컬하기도 합니다.

 

샤를마뉴는 지방마다 다른 라틴어 방언을 표준어로 정리했으며, 미술·음악·건축 분야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샤를마뉴와 그의 아들 루이의 치세로 이뤄진 문화적 흐름을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부릅니다. 카롤링거 르네상스는 유럽 사회의 모든 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영향을 많이 받은 분야는 문학일 것입니다. 샤를마뉴의 영웅담이 중세 기사문학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대서사시 ‘롤랑의 노래’는 샤를마뉴와 그를 수행하는 열두 명의 기사 이야기입니다. 이 서사시는 롤랑을 비롯한 상당수 기사가 목숨을 잃은 론세스바예스 전투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음유시인들이 전파한 샤를마뉴의 영웅담은 유럽의 중세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쳐 그와 유사한 작품들이 탄생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이, 독일에서는 ‘니벨룽겐의 노래’가 만들어졌지요. 이러한 작품들은 현명하고 경건한 왕과 충성스럽고 용감한 기사들이 펼치는 모험과 사랑과 전쟁의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과 복잡하게 얽힌 세상사를 연관 지어 볼 때, 특히 정치면에서는 진정 순수한 신앙에만 기댈 수 없으며 어느 정도의 융통성을 가져야 합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 그리스도교를 공인할 때, 그는 동·서 로마의 황제였으니 교회와 문제가 없었습니다. 제국을 통치하기에는 지역적으로 방대했기에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말년에 두 아들에게 동·서 로마로 분리해 통치를 시켰습니다. 서로마 황제와 교황은 대부분 정치적으로 제휴함으로써 무난한 관계가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존재하는 한, 그도 교황에 대한 명령권자였습니다. 더욱이 교황청과 비잔틴 제국은 문화적·언어적·지리적 소통이 부족했고, 성상 파괴에 대한 교리 논쟁으로 심각한 갈등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 비잔틴 제국에 정치적 상황 변화가 있었습니다. 당시 비잔틴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6세였습니다. 그는 780년 불과 4살의 어린 나이로 황제에 올랐고, 따라서 어머니인 이레네 황후가 실질적으로 제국을 통치했습니다. 교황 레오 3세(재위 795~816)는 이레네 황후가 제국을 통치하는 상황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황제의 자리는 공석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기회로 비잔틴 제국의 황제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추진했습니다.

 

800년 크리스마스 날, 레오 3세 교황에 의해 샤를마뉴의 황제 즉위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샤를마뉴는 본인도 모르게 갑자기 황제 즉위식이 행해졌다고 하지만, 교황은 민중의 열망에 따라 공식적으로 거행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레오3세의 종교적 이해와 샤를마뉴의 정치적 관점이 맞아떨어지면서 서기 800년에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했습니다. (작품 1)

 

 

2. 샤를마뉴의 서(書)

 

콘스탄티누스 6세가 어린 나이에 비잔틴 제국의 황제에 오르자 그의 어머니 이레네 황후의 섭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 아테네 출신으로 이콘 공경을 적극 지지하던 그녀는 787년 니케아에서 제7차 보편(세계) 공의회를 소집하였습니다. 니케아는 325년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최초로 공의회가 열렸던 곳입니다. 황후는 이번 공의회 장소가 최초의 공의회가 열렸던 곳이기에 어렵지 않게 이콘의 정통적인 동의를 원했습니다.

 

공의회에는 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재위 772~795)의 특사 두 사람이 참석했습니다. 이들이 교황을 대신하여 공의회 결의문에 서명했습니다. 이콘 공경을 공식화하는 결의문은 그리스도교 전체의 동의를 얻은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교황은 그리스어로 작성된 공의회 결의문을 라틴어로 번역해 샤를마뉴에게 보냈습니다. 당시 샤를마뉴는 황제는 아니어도 전 유럽을 정복하다시피 한 강력한 왕이었습니다.

 

문제는 번역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적었습니다. 번역문은 오역(誤譯)이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그중에도 가장 문제가 된 것은 공의회에서 결정된 이콘의 ‘공경(proskynesis)’이라는 그리스 용어를 ‘흠숭(adoratio)’이라는 라틴어로 잘못 번역한 것입니다. 공경의 대상으로 규정된 이콘을 하느님께 드려야 하는 흠숭의 대상으로 잘못 번역한 것입니다.

 

샤를마뉴의 오해는 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서방 교회에서 이콘을 내부 장식이나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성경에 대한 이해를 돕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여긴 것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샤를마뉴는 787년 공의회에서 결정된 내용을 거부했습니다. 신학자와 인문학자들을 소집해 이콘에 관한 논리를 정리한 뒤 792년 ‘샤를마뉴의 서(書)’를 발표하고 편찬하도록 했습니다. 샤를마뉴는 중립적 입장으로 이콘 옹호론이나 파괴론 어느 쪽에도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교회가 이콘 공경을 위한 제7차 니케아 공의회를 인정하면서도 샤를마뉴의 서를 거부하지 못한 것은 그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교황은 비잔틴 제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고, 유럽을 장악하고 있는 프랑크 왕국의 지지를 받아야 하는 당시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서구 라틴 세계에서는 이콘의 추상적 이미지보다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실적 이미지나 비유적 이미지를 선호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서방 교회의 벽화와 수사본(활자에 의해 인쇄되지 않고 글과 그림을 손으로 쓰고 그려서 제작한 책)의 경우에는 이미지들을 이콘에서 빌려와 종교미술에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서방 교회가 이콘을 선택하지 않은 데엔 또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예전부터 로마 교황청과 콘스탄티노플은 거리상 왕래가 뜸했습니다. 게다가 정치적·신학적 갈등이 점차 고조되면서 1054년 동·서방 교회가 갈라졌습니다. 그 후 그리스도교의 본고장인 예루살렘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위협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유럽에서는 예루살렘에 들어와 있는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려 십자군이 결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제4차 십자군 원정(1204년)은 원래 목적과 달리 정치·경제적인 이유로 중도에 방향을 바꿔 동로마 제국을 침략했습니다. 십자군에 의해 약탈·살인·유린이 행해졌으며, 수많은 보물을 탈취하는 사건을 통해 동·서방 교회의 관계는 더욱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샤를마뉴의 서’를 발표하기 전후 이콘 공경에 관하여 교황과 공의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설명과 신학적 논의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당시의 정치적 역학관계는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또한 제4차 십자군 원정이 본래 목적을 저버리고 정치·경제적 이익을 위해 형제간 전쟁을 벌인 것은 부끄러운 교회 역사의 한 단면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5월 19일, 김형부 마오로(전 인천가톨릭대 이콘담당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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