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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저를 보내주십시오3-4: 예수회 박문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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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5-16 ㅣ No.1361

[저를 보내주십시오] (3) 예수회 박문수 신부 (상)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손 내밀고 동행하는 사제로 살고 있습니다”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되던 1970~1980년대 한국. 오직 ‘빨리 선진국이 돼야 한다’는 일념으로 밀어붙여지기만 하던 사회에서 도시빈민, 철거민, 가난한 사람들은 하루가 다르게 들어서는 마천루,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드리우는 그림자 뒤로 철저히 가려져야 했다.

 

맹목적 개발주의 가치관 하에 인간의 존엄함을 모르던 그 시대 한국 땅에서 빈민들과 동반하며 변화를 외쳐온 미국 출신 사제가 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가난한 이들의 터전으로 들어가 ‘동행’하는 예수를 보여줬던, 빈민 운동가이자 사회학 연구자 예수회 박문수 신부(Francis Xavier Buchmeier·프란치스코·83)의 선교 여정을 소개한다.

 

- 서강대학교 제18대 이사장으로 재직하던 2018년 당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박문수 신부.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이웃을 섬기라는 부르심

 

1941년 11월, 미국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시의 슬라브계 가톨릭 가정에서 박 신부는 태어났다. 보헤미아, 체코·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등지에서 온 노동자들이 모여 살던 마을, 여느 슬라브계 이민자처럼 그의 가족도 겨우겨우 살아가는 서민이었다.

 

부모의 독실한 신앙은 박 신부의 성소의 밑거름이 됐다. 시간이 되는 대로 성가대 등 본당 활동에 깊이 참여하고, ‘온몸으로 기도하셨다’고 할 정도로 기도 생활이 열정적이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며 초등학생 박 신부는 “신부가 되고 싶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학창 시절에는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무언가를 가르치는 사람, 또는 학자를 꿈꿨다.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화학이었다.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변호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정치학을 전공하려고 했다. 그런 그가 신부가 되는 결심을 하게 된 건 사제·수도자 부르심에 대한 가르멜회 신부의 특강을 듣고서였다.

 

“젊은 가톨릭 수도자로서 세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많다고, 그러니 수도자로서 세상으로 나아가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라는 말씀이었어요.”

 

이렇듯 부르심은 박 신부가 그때까지 느껴본 적 없는 강한 끌림으로 찾아왔다. “사랑으로 사는 진정한 자유를 향한 이끌림”이라는 박 신부의 표현대로다. 때마침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대로 교회가 세상으로 나아가던 무렵, “교회처럼 나 또한 이 세상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는 마음으로 박 신부는 수도 성소를 품었다.

 

“아마 너는 예수회원이 될 거야(Maybe you will be a Jesuit).”

 

어려운 선교지에 다녀온 한 교수 신부의 수업을 듣고 그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등 식별의 과정도 거쳤다. “공부를 좋아하니 예수회 선교사가 돼라”는 신부와 어머니의 권유대로 박 신부는 대학교 1학년이던 1960년 8월, 선교 사명을 품고 예수회 위스콘신 관구에 입회했다.

 

 

가난의 땅 한국을 섬기다

 

박 신부가 여러 선교지 중 특별히 한국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관구 담당 선교 지역이 한국이었기에 파견지는 자연스럽게 한국이었다. 하지만 “수련기 때부터 한국에 가고 싶었다”고 표현할 만큼, 가난한 나라인 한국을 섬기려는 열망은 점점 커져만 갔다.

 

한국전쟁 여파로 인한 극심한 기아, 대통령 부정 선거 등 정치적 혼란…. 1960년대 미국에서 으레 한국에 대해 연상하는 이미지였다. 박 신부는 “그런 한국이기에 가고 싶다”면서 선교 파견을 자원했다. 당시 흑인 해방 운동을 펼치던 마틴 루터 킹 목사처럼, 그리스도의 삶을 보여주는 성직자로서 가난하고 탄압받는 인간을 해방하려는 열망이었다.

 

“인종차별로 고통받는 흑인들의 존엄함을 부르짖던 킹 목사의 이야기도 선교 사명에 불을 질렀죠. 수련원에서도 그분 글을 읽고 해방 운동에 대해 공부했어요.”

 

“갇힌 이들의 해방을 선포하고자 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따라 우리도 사회로 나아가 정의를 요청해야 한다”는 킹 목사의 말처럼, 박 신부는 한국의 가난한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기 위한 9년간의 준비를 마치고 1969년 9월 입국했다.

 

“서울도 대부분 도로가 포장돼 있지 않았어요. 또 아주 작은 집과 밭들이 펼쳐져 있었죠.”

 

입국과 동시에 한국어를 배우면서 박 신부는 한국의 가난한 현실 또한 직접 배우게 됐다. 도로에는 군용차, 버스 외에 자가용도 거의 다니지 않았다. 길에는 무거운 지게를 지고 가는, 고된 노동으로 땀 흘리는 여위고 작은 사람들뿐이었다. 그가 생각하던 가난을 뛰어넘는 현장도 목격했다.

 

“홍제천 옆 하꼬방(판잣집)에 살며 더러운 물로 설거지하고 아무 살림살이도 없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충격을 받았어요. 한국에도 그 정도로 가난한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가난 속 존엄함을 잃어버린 가난한 이웃…. 박 신부의 선교 사명은 개발 계획에서 소외된 이들이 스스로 해방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꿈으로 구체화했다. ‘동행’의 길이었다.

 

- 1980년대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 앞뜰에 세워진 철거민 천막촌 텐트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동행의 길

 

1973년 사제 서품을 앞두고 신학대학을 다니던 박 신부가 마주한 가난은 인간과 사회 양쪽 차원의 가난이었다. 급격한 경제 성장이 이뤄진 1970~80년대, 외적으로는 점점 도시화했지만 도농 격차는 갈수록 커졌다. 새마을운동은 농촌 사회 붕괴를 가져왔다. 농촌에서 올라온 도시빈민들의 수입으로는 아이들의 고등 교육까지 수행할 수 없었다.

 

인간의 가난은 사회의 가난을 동반했다. 노동조합을 만들고자 노력하던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회원들이 갑자기 잡혀가고 고문을 당하고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 집권을 위해 3선 개헌을 시도했고, 반대하는 야당과 언론을 탄압했다. 강제로 이뤄진 재개발과 철거는 기필코 폭력을 동원했고 많은 주민을 다치게 하고 주거권을 뺏었다.

 

불의라는 새로운 차원의 가난 앞에 변화를 외치고자 박 신부는 사회학을 전공할 것을 결심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신학생이 관심을 가지면 성소를 의심받던 분위기였지만, 사회 정의를 연구함으로써 가난한 이들과 동행하는 길을 걷고 싶었다. 그렇게 1974년 다시 미국으로 가 하와이주립대 대학원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을 거쳤다.

 

- 사회학자인 박문수 신부에게 “멀찍이 떨어진 연구에서 그치지 말고 터전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던 정일우 신부(뒷줄 왼쪽)와 제정구 의원(뒷줄 오른쪽). 사진 제정구기념사업회 제공

 

 

1979년 귀국해 서강대학교 사회학 교수로 소임하던 박 신부는 빈민 운동에 투신하게 됐다. 먼저 운동을 펼치던 예수회 고(故) 정일우 신부(John Vincent Daly·요한 사도·1935~2014)와 ‘빈민운동의 대부’ 고(故) 제정구(바오로·1944~1999) 의원의 영향이었다. “멀찍이 떨어진 연구에서 그치지 말고 터전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권유였다.

 

“사회에 영향을 주고자 하는 사회학의 진짜 목적을 생각하면 연구자가 행위자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렇게 박 신부는 1985년 제 의원의 초청으로 ‘천주교도시빈민회’에 가입하고 강제철거 현장에 참여하는 등 가난한 이들의 터전으로 뛰어들게 됐다. 연구자나 선교사로서 가르치거나 앞장서는 게 아니라 주민들과 관계를 맺고 이웃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스스로 권리를 되찾도록 조직화하기 위한 ‘동행’의 길이었다.

 

인터뷰 영상 : https://youtu.be/V3dD5g7yqWU?si=xwYlNRr5IRTzfOUq

 

[가톨릭신문, 2024년 5월 12일, 박주헌 기자]

 

 

[저를 보내주십시오] (4) 예수회 박문수 신부 (하)


“몸은 수입이어도 마음은 한국산… 이 땅의 빈민 곁을 지킬 겁니다”

 

 

생물학 교수를 꿈꾸던 예수회 박문수 신부(Francis Xavier Buchmeier·프란치스코·83)는 1974년 미국으로 돌아가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노동조합 운동을 펼치는 가톨릭신자들이 투옥·고문당하는 현실을 목격하고, 왜곡된 도시계획을 위한 재개발과 철거 강행 으로 고통받는 농민, 노동자, 도시빈민을 위한 해방 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박 신부는 1985년 귀화하자마자 ‘천주교도시빈민회’(이하 천도빈)에 가입하고 철거민들의 현장에 참여하는 등 가난한 이들의 터전으로 뛰어들었다. 메말랐던 세상, 박 신부는 가난한 이들의 동반자로서 어떻게 기꺼이 헌신해 왔을까.

 

- 박문수 신부는 “순교 역사를 지닌 한국교회가 한국사회를 흐름을 그대로 따라 세속화되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고 정의를 외치는 사명을 굳건히 수행하길 바란다”고 말한다. 사진 박문수 신부 제공

 

 

가난한 이들의 현장으로

 

1980년대 우리나라의 도시계획 목표는 가난을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 감추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서울 사당동, 목동, 상계동 등 재개발 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집을 빼앗기고 쫓겨나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들이닥친 철거반원들의 폭력으로 많은 주민이 다쳤다.

 

미국에서 사회학 박사학위 취득 후 귀국한 박 신부는 서강대학교 교수로서 도시빈민운동과 주민운동 단체의 활동에 도움이 되는 연구 및 분석을 계속했다. 가난한 이들의 인권 회복을 위해 여러 활동을 펼치던 천도빈의 일원이었지만 그가 주로 하는 일은 빈민 문제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는 조력자 역할이었다. 그런 그가 현장에 동참하게 된 것은 1986년 상계동 강제 철거 사건 이후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도시 미관을 이유로 상계동 등 200여 곳에서 철거가 강행됐다. 박 신부가 기억하는 철거는 매우 잔인했다. 대규모로 침입한 깡패들이 여성들의 머리채를 잡아 내던지고 상처를 입혔다. 경찰들은 개입하지 않았고, 오히려 폭력에 쓰러진 주민들을 연행했다.

 

“소식을 들은 그날 저녁 저는 달라졌습니다. 학자로서의 연구에는 한계가 있었어요. 현장과 괴리되지 않은 연구를 위해 주민들과 직접 함께할 필요성을 절감했죠.”

 

그렇게 박 신부는 “멀리서 객관적인 연구를 하는 것보다 참여하는 사람과 같은 입장에서 체험하면서 연구해야 한다는 것”에 눈떴다. 재개발 지역을 찾아 철거민들을 직접 만나 위로하는 등 본격적 빈민 사목에 나섰다. 강제 철거 다음 날에는 아침 일찍 상계동 현장에 뛰어가 주민들과 함께했다. 쫓겨나는 주민들의 아픔을 학생들이 직접 목격하게 하는 현장 강의들도 펼쳤다. 학생들과 함께 깡패들과 맞서 철거 시도를 막아내기도 했다.

 

사목의 핵심은 가난한 주민들이 뭉치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 주민들에게는 공동체라는 개념이 없었다. ‘흙이 없는 땅에 떨어진 씨’라는 박 신부의 표현처럼 각자 계층 향상에 힘쓰느라 사분오열된 그들은 존엄을 되찾는 일에 단합된 힘을 모을 수 없었다. 박 신부는 “주민들을 조직화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고 회상했다.

 

 

- 독립문 평화의 집 소장 박문수 신부가 2003년 3월 독립문 지역사회발전센터(이하 센터) 현판식에 앞서 축복하고 있다. 센터는 독립문 평화의 집이 사회복지 공동모금회 기획사업 수행기관으로 선정되면서 개소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2016년 9월 제주 강정마을 일대에서 열린 강정 평화 콘퍼런스에 참석한 박문수 신부(왼쪽에서 두 번째)

 

 

함께함으로써 해방을

 

“빈민 사목은 제일 돈이 없는 사람을 찾아 돌보는 사목이 아니에요. 사회 구조로 인해 억압받는 가난한 이들이 스스로 해방될 수 있도록, 그들이 단합된 힘으로 사회 구조를 바꿀 수 있도록 함께하는 사목이죠.”

 

주민 조직화를 위해서는 가장 먼저 그들과 관계를 맺고 이웃이 되는 것이 중요했다. 박 신부는 천도빈 활동가로서 세입자들을 대상으로 주거권이 무엇인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교육하는 동시에 친교와 나눔의 자리를 계속 만들어 갔다. 교육과 조직화를 위해서는 주민들과 친해지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화곡동 예수회 신학원에서 자전거를 타고 신정동 철거촌 주민들을 계속 접촉했다. “몸은 수입이어도, 마음은 한국산”이라는 말은 입버릇이었다.

 

강제 철거를 앞둔 지역에 미리 들어가 스스로 주민이자 이웃이 되기도 했다. 1989년에는 무악동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1990년 독립문 지역 철거를 앞두고 그곳에서 공동체 운동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예수회 신부들과 전세방에서 생활하며 세입자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그 노력으로 200세대에 달하던 세입자들이 가(假)이주 단지를 얻어 살다가 무사히 임대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었다.

 

1999년에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서울 무악동선교본당 주임으로 사목하는 등 온전히 빈민 사목에 투신했다. 선교본당은 당시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가 무악동, 삼양동 등 재개발 지역 주민들 삶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세운 도시 공소를 발전시킨 개념의 공동체다. 박 신부는 초대 본당 주임으로서 주민들이 스스로 권익을 찾을 수 있도록 자치회 및 부녀회를 구성하고 청소년 스카우트 운동을 조직하기도 했다.

 

박 신부는 본당과 주민들 사이 접촉점을 늘리기 위해 본당 부설 협동조합형 자활공동체인 ‘독립문 평화의 집’도 세웠다. ‘독립문 평화의 집’은 종교색 없이 주민들이 함께 주민운동을 펼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구심점이 됐다. “특히 공공임대주택 주민들이 자기들만의 조직을 만들 수 있도록 도움이 됐다”고 박 신부는 전했다.

 

- 박문수 신부가 조선학교에 대한 차별을 멈출 것을 호소하는 메시지를 들고 있다. 사진 박문수 신부 제공

 

 

새롭게 이어지는 ‘연대’

 

박 신부는 다른 차원의 가난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새로운 ‘동행’의 길, 평화를 위한 ‘연대’의 씨앗을 심는 일에 나섰다.

 

2009년 선교본당 주임 사목을 마친 박 신부는 바로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이하 연구센터) 설립에 착수, 이듬해 초대 소장으로 취임했다. 연구센터의 목적은 이주노동자와 난민, 소외층을 위해 헌신하는 사회사도직 단체들의 활동을 연구로 지원하고 연대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예수회원들은 “오랜 시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했던 박 신부가 센터장을 맡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초대 센터장으로서 박 신부는 핵발전소 반대운동에 나섰다. 예수회 일본관구와 연대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평화와 군축 세미나를 열고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세미나 및 토론회를 열었다. “환경 보호 측면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평화 운동”이라고 박 신부는 강조했다.

 

“일본에서도 핵발전소 반대운동은 세계 평화를 요청하는 일본의 평화헌법을 수호하는 운동이었죠. 일본은 히로시마 원폭의 상처를 가진 나라예요.”

 

강정 해군기지 반대운동처럼 군사주의적 폭력에 맞서는 데도 함께했다. 제주도가 ‘비무장 평화의 섬’이 되길 바라며 2014년부터 강정 평화 콘퍼런스와 평화대회 마련에 동참했다. 시모노세키 노동교육센터와 연대하면서 핵발전소 반대운동에 나설 뿐 아니라 조선학교와 관계를 맺고, 차별받는 재일조선인들을 위로했다.

 

이렇듯 개발 광풍에 떠밀려 외면받는 빈민들을 ‘동반’하고, 미움과 차별로 멍든 땅에 ‘연대’의 가치를 전해온 박 신부의 선교 여정은 어느덧 55년째에 접어들었다. 반백 년 이상 한국교회와 함께한 그는 끝으로 ‘불평등’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가난을 언급하며 “교회가 세속화되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끝까지 함께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주거 공간이 아닌 투기 대상이 돼버린 집, 무제한 경쟁에 내몰린 청년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불평등입니다. 순교자의 교회인 한국교회가,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는 예언자적 사명을 잊지 않길 늘 기도합니다.”

 

인터뷰 영상 : https://youtu.be/97g16Bnxt34?si=1g-uMaiytXE9jddY

 

[가톨릭신문, 2024년 5월 19일, 박주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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