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수원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19: 한덕골 - 조선의 두 번째 사제 |
---|
[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19) 한덕골 : 조선의 두 번째 사제 험한 길 헤치며 달려간 신앙, 복음과 성모신심 곳곳에 새겨놓다
- 한덕골 전경. 최양업 신부와 관련된 국내 성지와 교우촌을 순례할 수 있도록 지정된 순례지 중 하나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묵리 619-1 한덕골 사적지. 많은 교우촌이 그랬듯, 이곳도 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한덕골은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은이공소로 정착하기 전 머물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이곳에는 조선의 두 번째 사제,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발자취도 남아있다.
신자 찾아 8만 리
한덕골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입구에 ‘희망의 순례자’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희망의 순례자’는 최양업 신부의 시복시성을 기원하고자, 최양업 신부와 관련된 국내 성지와 교우촌을 순례할 수 있도록 지정된 순례지다.
한덕골은 최양업 신부의 둘째 큰아버지인 최영겸(베드로) 일가가 1837년부터 정착해 살던 곳이다. 기해박해로 최양업 신부의 부모인 성 최경환(프란치스코)과 복자 이성례(마리아)가 순교하자 최양업 신부의 막냇동생 최신정은 큰아버지가 살고 있는 이 한덕골로 와서 생활했다. 1849년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귀국한 최양업 신부는 한덕골을 찾아 동생과 상봉하고, 이후에도 이곳에 들러 성사를 집전하곤 했다고 전해진다.
한덕골은 현재 천리요셉본당이 관리하고 있고, 용인시가 ‘청년 김대건 길’로 지정해 한덕골로 이어진 길을 정비하는 등 한덕골을 찾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박해 당시 이곳은 외딴 산속이었다. 김대건 신부의 가족이 머물 당시 집을 마련하지 못해 나무에 칡을 얽고 억새를 덮어 머물렀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질 정도다. 당시 교우촌들이 대부분 그랬다. 최양업 신부는 사목하던 전국 구석구석 이런 외딴 산속을 찾아다니며 신자들을 만나 사목했다.
최양업 신부가 맡은 사목구역은 충청도, 경상좌·우도, 전라좌·우도 등 5개 도에 걸쳐있었다. 강원도의 일부 교우촌도 방문했고, 한덕골처럼 경기도를 방문하는 일도 있었다. 최양업 신부가 국내에서 사목하기 시작할 무렵인 1851년에는 최양업 신부가 사목하는 교우촌이 127곳이었다. 이후 새로운 교우촌들이 계속 생겨나면서 최양업 신부가 찾아야 할 교우촌은 더욱 늘었다.
1861년 페롱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 따르면 최양업 신부는 “낮에는 80리 내지 100리를 걸어야 했으며, 밤에는 고해를 들어야 하고 또 날이 새기 전에 다시 떠나야 했으므로, 그가 한 달 동안에 취할 수 있었던 휴식은 나흘 밤을 넘지 못했다”고 한다. 교회사 연구자들은 최양업 신부와 동료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최양업 신부의 이동거리를 가늠했는데, 적어도 8만 리, 약 3만km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평탄하고 잘 닦인 길이 아니라, 가파르고 험한 산을 걷고 또 걸어 오르내렸으니 그 고단함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그렇게 최양업 신부가 찾아다닌 신자 수가 1851년에는 5936명에 달했다. 당시 조선 전체 신자의 절반이 넘는 수다. 또 해마다 조선 전체 세례자의 30~40%가 최양업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세례만이 아니다. 매스트르 신부는 “최 신부는 한 해의 대부분을 신자를 찾아가 4500명의 고해를 들어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거의 초인적인 활동이었지만, 최양업 신부가 남긴 기록에는 힘든 내색을 찾기 어렵다. 오히려 최양업 신부는 1855년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들에게는 더 큰 기쁨이 있다”며 “하느님께서 많은 새로운 형제들을 우리에게 보태주시어 하느님 아버지의 밭에 풍년이 들었다”고 기뻐했다.
- 한덕골에 있는 성모상.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최양업 신부는 단순히 성사만 집전하고 다닌 것은 아니었다. 최양업 신부는 자신의 모든 능력과 재능을 활용해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연구하고 노력했다.
라틴어, 프랑스어, 중국어 등에 능통할 정도로 언어에 재능이 있었던 최양업 신부는 한글을 활용해 신자들이 쉽게 교리를 익힐 수 있도록 도왔다. 「천주성교공과」, 「성교요리문답」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도 참여하고, ‘가사’(歌辭) 양식을 활용해 누구든 교리를 우리말로 쉽게 노래처럼 암송할 수 있도록 ‘천주가사’도 만들었다.
최양업 신부는 세례를 받고 싶어도 교리를 익히지 못하는 신자들이 있는 것에 늘 안타까워했다. 특히 “사본문답(四本問答)을 전부 배우자면 몇 해가 걸려야 하는 사람이 대다수”라며 “심지어는 죽을 때까지 교리 공부를 하여도 사본문답을 다 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고 신자들이 익히기 어려운 교리를 지적하기도 했다. 사본문답은 「교리문답」 중 세례·고해·성체·견진성사에 관한 문답이다.
이에 만든 것이 천주가사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많이 불리던 ‘가사’ 양식을 활용한 천주가사는 다소 어려운 「교리문답」과 달리 누구나 쉽게 우리말로 노래처럼 암송할 수 있었다. 오늘날 최양업 신부가 만든 것으로 알려진 천주가사는 ‘선종가’, ‘사심판가’, ‘공심판가’와 칠성사를 노래하는 ‘영세’, ‘견진’, ‘고해’, ‘성체’, ‘종부’, ‘신품’, ‘혼배’와 향주삼덕을 노래하는 ‘신덕’, ‘망덕’, ‘애덕’이 있고, ‘칠극’, ‘제성’, ‘행선’ 등이다.
최양업 신부는 교리교육만이 아니라 신자들의 신심활동을 북돋는 데도 열의를 보였다. 특히 신학생 시절부터 성모성심회에 가입할 정도로 성모신심이 깊은 최양업 신부는 신자들에게 묵주기도를 가르치고 성모신심을 전했다.
최양업 신부는 단순히 묵주기도를 가르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묵주 만드는 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 열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최양업 신부는 리브와 신부에게 “조선 신자들이 묵주를 아주 잘 만든다”며 자랑하고, “묵주를 보내달라고 청하지 않겠다”고 전했다. 대신 “묵주를 만드는 도구를 보내주면 조선 신자들에게 묵주를 최대한으로 많이 선물하는 것”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4년 3월 10일, 이승훈 기자] 0 29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