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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2024년 전국 교구 교구장 성탄 메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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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전국 교구 교구장 성탄 메시지
2024 성탄 메시지
고요하고 거룩한 밤, 예수님께서 허름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십니다. 전능한 하느님이신 성자께서 당신을 온전히 비우시고 한없이 낮추시어, 우리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하고 약한 어린이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이 사랑과 자비를 묵상하며, 그 사랑이 우리의 삶과 세상 안에서 어떻게 열매를 맺어야 할지 깊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올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큰 혼란과 갈등 속에서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정치적 불안정 속에 들려오는 불안과 분열의 소식은 우리를 슬프게 하고,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선한 양심을 지닌 많은 이들이 정의와 진리를 갈망하며 목소리를 내지만, 그 외침이 외면받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아기 예수님의 성탄이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창조주께서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신 이 신비를 바라보며, 진정 우리에게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서로를 존중하는 따뜻한 인간됨’이라는 것을 아기 예수님은 보여주십니다. 불안한 마음, 서로 다른 시각들, 서로 다른 해결책들 사이의 대립 가운데에서,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임을 성탄은 말해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복음의 기쁨>(222항)에서 “시간은 공간보다 위대하다.”라는 말씀으로 이를 표현하신 바 있습니다. 권력이 공간을 독점하는 것보다, 인간이 서로 보듬어 나가며 성장을 위해 새롭게 시작해 나가는 시간들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5,9 참조) 그러나 참된 평화는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정의와 사랑이 실현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여러 혼란스럽고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민주적 절차와 헌법적 절차에 따라 국민 전체의 행복과 공동선을 향해 함께 노력해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가 비록 두려움과 불안 속에 빠져 있지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아닌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정의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평화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약자와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 속에서도 교회는 정의와 평화를 위한 목소리를 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목소리는 분열과 대립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화해와 일치를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받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힘을 모을 수 있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다른 생각, 다른 의견을 가진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서로에게 귀 기울이고, 함께 공동의 선을 위해 지혜를 모으는 ‘따뜻한 인간 존중의 자세’로 지혜롭게 이 격동을 헤쳐 나가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이 이 땅에 어린 생명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함께 기뻐하고 경축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탄이 다시금 ‘희망’의 시기임을 되새기게 됩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구유에 누우신 모습은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새벽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아기 예수님의 겸손하고 겸허한 모습을 바라보며, 지금 우리가 마주한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의 빛’을 발견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또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며 따뜻한 체온을 서로 느끼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마음속에 따뜻한 인간성으로 빛나는 참된 평화와 희망이 차오르길 희망합니다. 그같은 아기 예수님의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 차길 기도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평양교구장 서리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찬미 예수님! 우리 가운데 사람이 되어 오신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오셨는데, 마냥 기뻐할 수만 없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 속에서 절망하고 있습니다. 온 세계가 끝없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당혹스러워하며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으로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남북상황도 점점 극단으로 치닫다가 다른 나라처럼 우리도 전쟁이 일어날까 봐 불안해합니다.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미국 대통령의 재선을 지켜보며, 우리나라는 그에 대한 적절한 대비책을 간구하고 있는지 그저 국내문제에 함몰되어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아니하게 있지는 않은지 몹시 걱정됩니다.
12월 3일 밤 10시 30분경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언을 들으며 80년 5월의 참상(慘狀)이 떠올랐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국회의원들과 민주시민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와 용기 있는 행동과 올바른 대처로 급박했던 순간을 무사히 넘기고, 이제 우리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의료대란으로 환자들은 구급차 안에서 생명을 담보로 사투하고 있으며, IMF 때 보다 더 어려운 불경기로 소상공인들은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월세를 못내 가게 문을 닫고, 은행 빚에 허덕이며 인건비를 줄이려 종업원을 내보내고 직접 뛰고 있지만, 그렇게 애를 써도 이미 그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이처럼 정치도 경제도 혼란스럽고 어렵기만 한데, 그럼에도 그 안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 많은 이들이 힘들지만 견뎌내고 있습니다. 특히, 수험생과 미취업 자녀를 둔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맞이할 미래에 대해 걱정이 큽니다. 2,000년 전 로마의 통치 아래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오늘날의 우리처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이를 이겨내고 어둠에서 해방시켜줄 구세주를 갈망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힘과 권력을 지닌 왕’이 아닌, 마구간 말구유 위의 ‘가장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로마 황제의 우렁찬 목소리와 구유에 누운 갓난아이의 연약한 울음소리는 너무나도 큰 대조를 보입니다. 황제의 명령 한 마디에 모든 백성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 등록을 하지만, 한 아기의 탄생 앞에서는 가난한 목자들만이 겨우 관심을 보였습니다. 세상의 많은 이들이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했고, 가난한 어부 몇 사람만이 주축이 되어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삶을 따랐습니다. 세상은 ‘힘 있는 사람’ 편에 서는 것이 유리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 내내 “부와 권력 그리고 명예까지 다 가진 세상 권력자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연약하고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아기 예수 편에 설 것인가?” 하는 갈등 속에 있습니다. ‘아기 예수 편에 선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세상 욕심을 다 내려놓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우리 삶이 초라해지고 힘없이 무너지더라도 ‘묵묵히 고통 가운데 희망을 바라보며’ 주님께 끝까지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황제 편에 선다는 것’은 부와 명예,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안정된 삶을 쫓고, 때론 ‘가족 때문’이라는 그럴싸한 핑계를 대며 십자가의 길보다 더 편안하고 보장된 길을 택함을 뜻합니다. 입으로는 구세주를 노래하면서도 정작 몸은 황제의 명령을 따르는 모순된 삶을 살아가곤 합니다. 마구간에서 태어나 말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를 우리가 기다렸던 구세주이며 임마누엘이라 고백하고 믿을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백성, 주님의 벗이 됩니다. 그때 우리는 ‘대단한 자리에 오르지도, 큰 명예를 누리지도, 엄청난 재력을 갖고 부귀영화를 누리지도’ 못하더라도, 그분을 ‘우리의 주님’이라고 온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그분의 백성으로서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것”은 가시밭길을 걷는 고통이 따르지만, 우리는 그 길을 찾는 ‘하느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어둠을 물리치고 영원한 생명과 참 평화를 가져다주기 위해 우리에게 다시 오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가장 소중한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신 자녀인 우리도 하느님을 닮아 이웃을 위해 내가 가장 아끼는 것을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힘은 세상 그 어떤 권력보다 강하고, 그분의 자비로운 용서는 모두를 기쁘게 합니다. 우리도 주님의 삶처럼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희망을 놓지 않고 견뎌내며 참 생명을 향해 함께 걸어가고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합시다. 빛이 소중한 건 어둠이 짙어서입니다. 말씀이 소중한 건 고통이 무거워서입니다. 사랑이 소중한 건 미움이 깊어서입니다. 희망이 소중한 건 절망이 커서입니다. 어둠과 힘겨움, 미움과 절망이 만연한 세상이지만,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답게, 사랑을 실천하면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여러분께 존경을 표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참 평화’를 전합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루카 2,11 참조).
2024년 12월 25일
천주교 광주대교구 교구장 옥현진 시몬 대주교
2024 성탄 메시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머무시고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우리의 삶을 하느님의 자리로 만드시려 우리 주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교구민 모두와 함께 주님의 성탄을 기뻐합니다. 특별히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 속에서 매일의 삶을 굳건히 살아가시는 대구 경북의 시민과 도민 여러분들과 더불어 주님의 성탄을 또한 기뻐합니다.
우리 교구는 지난 2년 동안 친교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앞으로의 2년은 그 친교를 전례 안에서 더욱 풍성히 체험하고 나누며 살아가고자 합니다. 2025년 사목교서에서 밝혔듯이, “그리스도 신앙은 개인의 내면을 성찰하고 정신을 고양하는 일을 넘어서, 무엇보다 살아계신 그분과 만나는 것”입니다. 그 신앙의 정점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나러 몸소 사람으로 오신 육화의 사건입니다. 하느님과 사람의 만남은 저 천상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한 가운데서 드러난 역사적 사건이며 바로 그런 이유로 그리스도 신앙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하느님의 자리로 귀하게 여기며 세심하게 살펴보는 것이어야 합니다. 지난 1년 우리 사회는 대립과 갈등의 시간을 애써 견뎌왔습니다. 저마다 지닌 가치관과 저마다 갈망하는 자신의 이익에 따른 정치·경제적 극한 대립의 시간 또한 우리를 안타깝게 했습니다. 무엇보다 지난 12월 3일, 민의의 전당인 국회가 총을 든 군인들로 위협을 받는 시대착오적 사태까지 맞닥뜨리고 말았습니다. 이번 비상 계엄령으로 여야,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온 국민이 충격과 공분에 휩싸였고, 우리 사회는 그 상흔으로 여전히 아파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육화는 화려한 예루살렘도, 거룩한 성전도 아닌 저 한적한 유다 산골 목동들의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사회 최하층민이었던 목동들을 향한 육화의 선포는 주님의 공생활 내내 지속된, 사람을 향한 사랑의 실천 그 자체였습니다. 주님의 육화는 하느님의 품위로 사람을 끌어올린 사건이 아니라 나약하고 부족한 사람의 현실을 하느님께서 수용하신 사건입니다. 신학자 칼 라너가 명명한 대로 ‘하느님의 자기 양여’로서의 육화는 하느님이 당신의 자리를 박차고 사람에게 사람으로 온전히 당신을 내어주신 사건입니다.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이 육화 사건의 핵심입니다(요한 3,16 참조). 그리하여 육화의 신비는 서로를 향한 조화와 친교를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의 삶 안에 선명히 새겨져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정치 역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사람의 가치를 귀히 여기는 주님의 삶과 닮아야 합니다. 국민이 주인인 민주주의에서의 정치는 위정자들의 이익을 위한 정쟁의 수단이 아니라 국민을 향한 봉사여야 합니다.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던 현대사의 아픔이 아직 우리 뇌리에 남아 있음에도 봉사의 정치가 폭력의 도구로 또 한 번 훼손된 오늘, 우리는 진지하게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육화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성탄의 밤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천사의 인사말을 듣게 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루카 2,10).” 정쟁과 계엄으로 얼룩진 지난 대림의 시간이 성탄의 밤에 울려 퍼지는 천사의 기쁜 소식으로 치유와 위로, 그리고 희망을 향한 밑거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교구민, 나아가 대구 경북의 시민과 도민 여러분들 한가운데 우리의 주님이 오셨습니다. 지난 시간 우리가 지켜 온 사람을 위한, 사람을 향한 사랑을 우리 곁에 오신 주님과 함께 두려움 없이 더욱 굳건히 지켜나가길 희망합니다. 우리 모두는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그 누구도 그 사랑을 빼앗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성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2024년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조환길(타대오) 대주교
2024 성탄 메시지
† 찬미 예수님!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 아들을 이 세상에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탄생하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신비입니다. 요한복음은 이 신비를 더욱 놀랍게 선언합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3.14)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천여 년 전에 태어나 그때부터 세상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태초에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던 분이시고, 세상 만물과 우리 인간도 말씀이신 그분을 통해서 생겨났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고, 인간이 죄에 물들어 죽음에 이르자 그를 구원하시고자 말씀이 사람이 되게 하시어 이 세상에 파견하신 것입니다. 구약성경 안에 펼쳐지는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하신 말씀 곧 땅과 자손의 약속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이스라엘이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극적으로 탈출하여 다윗 왕 때에 가나안 땅을 정복하면서 성취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 이스라엘은 시간이 가면서 우상숭배를 일삼고, 권력자들과 부자들은 가난한 백성을 착취하면서 옛 이집트 땅에서의 비참한 생활을 다시 만들어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에덴동산의 역사를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살 자격을 잃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예언자를 보내 회개의 삶을 살도록 주님 말씀을 선포했으나, 이스라엘은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면서 결국 유배를 떠나 이국땅에서 비참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하느님께서 주신 땅에서 자신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얼마나 잘못 살았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유배지에서 하느님의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며 구원의 날을 기다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통하여 유배를 경고하실 때, 미래에 이루실 새로운 구원의 역사도 약속하셨습니다. 이에 구약성경의 후반부로 갈수록 하느님 친히 메시아를 보내 구원해 주시고 새로운 계약을 맺어주실 것까지 약속해 주십니다. 그리고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한 이 엄청난 신비를 겸손하고 주님의 날을 기다리며 준비된 사람들에게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즈카르야는 늙은 나이에 아이를 갖고, 그 아이 곧 세례자 요한이 장차 주님의 길을 예비할 것이라고 노래했습니다.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낳으리라는 천사의 말에 “예”라고 대답했고, 그녀의 남편 요셉 역시 이 일에 순명했습니다. 천사들에게 기쁜 소식을 들은 목동들은 말구유로 달려갔습니다. 아기 예수를 성전에 봉헌할 때, 시메온과 한나는 자신들이 기도하며 기다리던 희망이 이루어졌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밖에서도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세 명의 동방박사들입니다. 이들은 주님의 계시를 받고 그 별빛을 따라 예루살렘에 이르렀습니다. 별이 한 집 위에 멈추자 그들은 기뻐하며 들어가 구유에 태어나신 주님을 만나 뵙고 경배를 드리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본래 태어나신 주님을 뵈온 뒤 헤로데 임금을 만나기로 했으나,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헤로데 임금을 만나지 않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동방박사들은 유다인이 아닌 이방인으로서 자기 지역의 임금들이었다고도 전해져 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온 인류를 구원하실 주님의 탄생을 이방 세계에도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계시를 보고 먼 길을 걸었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발길을 돌렸습니다. 신앙생활은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듣고 걷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금들이라고 알려진 동방박사들은 자기 땅에서 얼마든지 풍요롭게 누리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주님을 뵙는 것이 더 중요했기에 별빛을 따라 머나먼 길을 걸어, 기어코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꿈속에서 헤로데를 만나러 가지 말라는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랐습니다. 요셉도 세 차례 꿈속에서 천사의 말을 듣고 따르며 성가정을 보호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주님의 뜻을 들으려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마음 한 켠을 비워두는 겸손하고 소박한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마리아와 요셉과 목동들 그리고 시메온과 한나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도 세상의 영예와 권력을 따르지 않고 늘 주님을 뵙기를 원하며 살았기에 주님 탄생의 자리에 함께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경은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이 됩니다. 이들과 달리 예수님과 대적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스스로 하느님의 뜻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자리가 없었고,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오셨는데 그분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탄생을 여러분과 함께 기뻐하고 마음을 다해 축하 인사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보다 우리에 대하여 더 잘 아십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아시고 늘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오늘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신앙인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천여 년 전에 성모님을 통해 이 세상에 오신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가운데 태어나시듯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여러분 모두 자비하신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주님 앞에 머무시는 시간을 늘 가지시기를 빕니다.
2024년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대전교구장 주교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2024 성탄 메시지
성탄 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음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 평화를 깨닫기 위해 교회는 성탄 축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께서 주시는 평화를 느끼는 성탄절이 되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낮은 모습입니다. 낮추는 삶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계십니다. 세상은 늘 위로 올라가라고 합니다. 경쟁으로 내몰며 높아지라 외칩니다. 하지만 올라간다고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채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낮춰야만 높아질 수 있는 하늘나라 신비를 금년 성탄절엔 묵상해야겠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님 탄생을 알리자 성모님께서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며 반문하셨습니다.(루카 1,34) 하지만 주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말을 듣자 즉시 받아들이십니다.(루카 1,38) 요셉 성인도 마리아의 잉태를 알게 되자 조용히 돌아서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천사의 발현으로 마음을 바꿉니다. 이후 두 분은 성전에서 아기를 봉헌합니다.(루카 2,22) 그때 예수님에 대한 예언을 듣습니다. 많은 이를 쓰러지게도 하고 일으키기도 한다는 말씀입니다. 동방박사 방문 뒤에는 아기와 함께 이집트로 피신하라는 메시지를 받습니다.(마태 2,13) 이렇듯 성가정의 출발에는 깊은 순명과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명과 희생이 그분들을 낮은 삶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고통이며 억울함입니다. 고통스럽지 않고 억울하지 않으면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행동이 십자가를 지는 것인지요? 고통과 억울함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며 받아들이는 모습입니다. 그때 십자가를 지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기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십자가에서 죽어야 부활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행위 - 고통과 억울함 주신 것에 감사드리는 모습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은총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기도 없이는 시작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십자가를 주신 것에 감사하다 보면 고통과 억울함 속에 숨어있는 하늘의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쪽으로 흘러가는 삶의 반전도 만나게 됩니다. 부활의 은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은 한 번만 겪는 사건이 아닙니다. 수없이 부딪치는 만남이며 사건입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우연인 듯 느껴져도 모두가 필연입니다. 부활을 체험해 보라고 주님께서 개입하시는 사건이며 만남입니다. 어느 때보다 희망의 빛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사회의 많은 영역에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금년 성탄절엔 희망의 은총을 새롭게 청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지배자 모습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비우셨고 낮은 모습을 취하셨습니다.(필리 2,7) 그분의 낮은 모습 - 2025년을 이끌어갈 이 땅의 지도자들이 깊이 묵상해야 할 주제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따뜻한 눈빛으로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우리도 구유로 나아가 금년 한 해 주신 은총에 감사드립시다. 새해에도 밝은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청합시다. 모든 가정에 축복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2024년 많은 어려움 있었지만 사회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오셨습니다. 구유에 계신 아기 예수님께 또 한 해를 살아갈 힘을 청합시다. 하늘 나라의 힘과 에너지를 은총으로 주실 것입니다.
2024년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에 교구장 서리 신은근 바오로 신부
2024 성탄 메시지
천주교 부산교구장 손 삼 석 요셉주교
2024 성탄 메시지
† 경청과 식별로 동행하는 수원교구!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 친애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주님의 사랑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강생의 신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의 작은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목격한 천사들은 기뻐하며 이렇게 외칩니다.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루카 2,10). 아기 예수님의 성탄은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이 세상에 실현된 강생의 신비입니다. 이 신비는 온 인류에게 구원의 희망을 안겨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베들레헴에서 울려 퍼지는 천사들의 성탄의 큰 기쁨을 함께 환호하며, 우리 구세주이신 그리스도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온 인류와 함께 기뻐합니다. 아기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과 평화의 주님이시고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구세주이십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그리스도인 오늘날 고도의 기술이 발전하고 사회 기반 시설이 확장됨에 따라 국가의 부(富)는 점점 더 늘어나지만,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이들의 수가 많아지는 모순적이며 불합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겪고 있는 기후 위기와 식량 생산의 감소, 자국 이익 우선주의에 의한 무역전쟁, 게다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으로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들,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지난 11월 17일 ‘세계 가난한 이의 날’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나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내 것을 희생하고 내어놓은 적이 있는가? 자선을 베풀 때 가난한 이의 손을 잡아주고, 그 눈을 마주 본 적이 있는가?’ 형제자매 여러분, 잊지 맙시다. 가난한 이들은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습니다. 그들의 눈을 바라봅시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가난한 이가 되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기뻐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통받던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셨던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고통받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선교사, 희망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희년의 기쁨, 그리고 평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보편교회의 시노달리타스 여정 중에, 다가오는 2025년을 정기 희년으로 선포하셨습니다. 교황님께서는「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Spes Non Confundit)라는 칙서를 통해, ‘희망을 간절히 찾는 모든 이에게 희망이 전해지기를’ 바라시며, 우리가 희망을 간직하고 2025년 은총의 희년을 보내며 “희망의 순례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와 함께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수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선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당부하셨습니다. 우리는 현재 지구 반대편에서 오랜 시간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나라에서 ‘이 땅 저 멀리서 내 딸 내 백성의 울부짖는 소리’(예레 8,19 참조)를 듣고 있습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하느님의 백성들은 평화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은총의 희년을 맞이하며 이번 성탄에는 희망의 순례자인 우리가 무엇보다 ‘세계 위정자들의 회개를 위해, 그리고 분쟁 지역의 평화를 위해서’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WYD)의 서막 지난 11월 24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WYD)를 준비하기 위한 ‘WYD 상징물’, 곧 ‘WYD 십자가와 성모 성화’가 한국 교회 청년 대표단에게 전달되어 한국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WYD 상징물’은 젊은이들을 특별히 사랑하셨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세계 젊은이들에게 선사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가 닻을 올리고 본격적인 항해를 시작하였습니다. 한국 교회 순례 여정 중에 있는 ‘WYD 십자가와 성모 성화’는 12월 17일 수원교구청 순례를 시작으로, 현재 교구의 여러 본당과 복지시설 및 학교 기관을 순례하며 지역 청소년들과 청년들에게 신앙의 기쁨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세계 청년대회는 전 세계 젊은이들, 곧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교황님과 함께 모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고 신앙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국제적인 축제입니다. 이 축제에서 젊은이들은 삶의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국 교회에서 개최하는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는 우리 교회에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 도약할 수 있는 큰 기회입니다. 이번 기회가 우리 교회의 젊은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도록 모든 교구민이 마음을 모아 협력해 주시길 바랍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2024년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에 수원교구장 이 용 훈 (마티아) 주교
2024 성탄 메시지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천주교 안동교구장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2024 성탄 메시지
† 찬미예수님,
주님의 탄생을 기리는 축제일입니다. 천사가 기쁜 소식을 선포하였습니다.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성탄 축제는 기쁨의 축제입니다. 선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선물은 누구에게나 기쁨을 줍니다. 작은 선물도 기쁨을 줍니다. 큰 선물은 큰 기쁨을 줍니다. 우리는 자주 큰 선물은 선물이라는 걸 깨닫지 못합니다. 너무 커서. 성탄 선물은 커다란 선물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찾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우리 가운데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까닭에 하느님이 사람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하느님처럼 살게 합니다. 하느님은 영원 안에 사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시간 안에 삽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느님처럼 영원 안에 살게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엄청난 선물입니다. 선물을 받을 때, 그 선물은 받는 이의 것이 됩니다. 하지만 받지 않을 때는 선물을 건네는 이의 것으로 남습니다. 선물을 기쁘게 받을 줄 아는 사람은 선물을 기쁘게 건넬 줄도 압니다. 하느님께서 주님의 성탄으로 주신 이 선물을 우리 모두가 잘 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천사들이 찬미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하느님 마음에 드는 여러분 모두에게 행복한 주님의 성탄 축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2024년 12월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 원주교구장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
2024 성탄 메시지
사랑하는 의정부교구의 교형 자매 여러분,
여러분과 함께하는 첫 번째 주님 성탄 대축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게는 이번 성탄이 각별하게 느껴집니다. 각별한 마음을 담아 성탄 축하 인사를 드립니다. 2천 년 전 인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셨던 구세주 예수님께서 올해도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축복을 가득 안고 매해 새롭게 이 세상에 오십니다. 그분의 축복으로 여러분 각자와 가정 그리고 온 세상에 기쁨과 평화가 충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외로움과 슬픔, 낙담과 절망 속에서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친히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울러 갑자기 우리나라에 몰아닥친 정치적 혼란과 갈등의 어두움이 걷히고 ‘공정이 물처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아모 5,24 참조) 사회로 나아가도록 주님께서 밝은 빛으로 우리의 앞길을 비추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 인생은 비탈지고 굴곡이 많은 산길에 비길 수 있습니다. 힘든 길이라도 누군가와 함께 가면 덜 힘듭니다. 어두운 길이라도 함께 가는 이가 있으면 덜 무섭습니다. 인생 여정을 함께 걸으면서 마음을 나누고 힘이 되어줄 사람이 있다면 큰 축복이며 행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느님이 우리를 따뜻하게 동행해 주시는 분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분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해방하라는 어려운 사명을 맡기시면서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 3,12)라고 동행을 약속하십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가 늙고 허약해져도 하느님은 결코 동행을 포기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너희가 늙어 가도 나는 한결같다. 너희가 백발이 되어도 나는 너희를 지고 간다. 내가 만들었으니 내가 안고 간다. 내가 지고 가고 내가 구해 낸다”(이사 46,3-4). 때가 이르자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좀 더 가까이에서 동행하시려고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 1,23). 과거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던 예수님은 지금 우리 마음 안에서도 태어나기를 원하십니다. 성모님께서 빈 구유에 아기 예수님을 모셨듯이 우리도 마음을 비우고 그 안에 예수님을 모시도록 합시다. ‘마음의 구유’에 그분을 모신 사람은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고’(루카 21,28 참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동행하시면서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끌어 주시는’(로마 8,28 참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시편의 말씀처럼 비록 모두가 나를 버린다고 해도 결코 나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버릴지라도 주님께서는 나를 받아 주시리라”(시편 27,10).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어떤 처지에서도, 고통과 죽음의 순간에도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잘 압니다. 그래서 이렇게 노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고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시편 23,1.4). 예수님은 우리를 동행하시면서 거듭 힘과 희망을 주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그러하시듯이 우리도 다른 이들을 따뜻하게 동행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각자 ‘마음의 구유’에 모시고 주인으로 섬긴다면, 우리 이웃을 동행하도록 지혜와 힘, 용기와 인내를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이웃을 따뜻하게 동행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세상에는 진정한 평화가 굳건하게 자리 잡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 베들레헴 하늘에 울려 퍼진 천사의 노래가 더 가까이 들리게 될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우리 모두 우리 인생길을 동행하시는 예수님의 손을 잡고 희망차게 앞으로 나아갑시다. 그분이 주시는 평화가 분쟁과 폭력과 전쟁이 거듭되는 이 세상에 널리 퍼져나가도록 기도합시다. 주님의 은총과 성모님의 전구에 힘 입어서 우리 각자 “평화를 이루를 사람들”(마태 5,9)이 되도록 노력하기로 합시다. 평화의 주님이신 예수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평화의 여왕이신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2024년 주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 의정부 교구장 손희송
2024 성탄 메시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구세주 탄생의 기쁨과 은총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유다의 땅 베들레헴의 작은 구유에서 구세주께서 탄생하셨습니다. 빛으로 오신 그분을 세상은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 빛을 알아본 이들은 예수님을 찾아 경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쁨에 넘쳐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빛을 바라본 이들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기쁨과 행복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 탄생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알려주는 큰 사건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시어,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되셨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생명과 구원을 주시고자 하느님께서 인간의 모습을 취하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크신 사랑의 신비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신비이자, 강생의 신비입니다. 사랑 그 자체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성탄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신비를 잘 서술하고 있는 성경 말씀은 요한의 첫째 편지입니다. 사도 요한은 서간을 통해 인간을 사랑하신 나머지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을 보내셨고, 그분을 통하여 우리를 살게 해 주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1요한 4,9 참조). 계속해서 사도 요한은 이 사랑의 주도권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스스로가 하느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되셨고, 인간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속죄 제물이 되시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느님 사랑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바로 성탄입니다. 성탄을 맞이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고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성탄절이 다가오면, 많은 사람들은 성탄의 경제적 효과에 대해 먼저 생각합니다. 성탄의 분위기를 경제적으로 평가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 탄생은 하나의 사회적 이벤트와 같은 행사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성탄을 축하합니다.’라는 인사는 성탄의 참된 의미보다 형식을 앞세우게 되었습니다. 어느새 우리의 마음은 굳어지고 닫혀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 자신을 스스로 바라보지도, 느끼지도 못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닫힌 마음에 사랑의 의미가 놓일 자리가 없어 보입니다. 설령 누군가 사랑을 말하고 실천한다고 하더라도, 어느 순간 자기 생각과 의지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행위를 사랑이라고 정당화시키려 하기도 합니다. 힘의 논리가 앞선 사회는 사랑의 의미가 상실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전쟁과 폭력, 자연재해로 인한 고통을 우리는 어느새 관심 밖으로 밀어낼 뿐만 아니라. 심지어 냉랭한 자신의 태도를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의 책임 없는 자유는 공동의 집 지구를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 사랑을 등지고, 어둠 속을 걷는 인간의 굳은 마음을 보여줍니다. 사랑 위에 서로를 향한 존중과 평화가 세워집니다. 사랑은 이익과 효율의 논리로 평가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은 돌처럼 굳은 우리의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입니다(에제 36,26 참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탄은 하느님 사랑이 드러난 아름다운 사건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탄 밤 미사 제1독서에서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 9,1)라고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것처럼, 어둠 속에서 헤매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의 큰 빛을 느끼고,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그 빛을 향해 걸어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빛을 향해 걸어가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느낄 수 있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탄의 의미이고, 성탄절을 지내는 우리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탄의 의미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불신이 만연한 곳에 하느님 사랑의 큰 빛을 전해야 합니다. 절망이 만연한 곳에 희망의 빛을 비춰 주어야 합니다. 시기와 질투가 만연한 곳에 화해와 용서의 빛을 비춰 주어야 합니다. 다툼과 전쟁이 휩쓸고 있는 곳에 평화를 위한 기도와 희생을 봉헌해야 합니다. 2024년 성탄을 지내며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빛으로 걸어 들어가, 그 사랑을 깊이 체험하는 거룩한 시간, 은총의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024년 성탄에,
천주교 인천교구장 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
2024 성탄 메시지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늘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의 사랑과 축복이 교우 여러분과 온 누리에 가득 내리기를 빕니다.
성경은 구세주의 탄생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0-11). 이 메시지는 신실한 몇몇 사람들에게만 선포된 것이 아닙니다. “온 백성에게”, 말하자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었습니다. 이제 구세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두려움에서 벗어나 큰 기쁨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어둠에서 벗어나 빛 속에서 살고, 절망에서 벗어나 희망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메시지입니다. 믿기지 않는 소식입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당시 목자들도 상상하지 못했던 소식입니다. 이 소식을 믿을 수 있도록 성경은 표징을 보여줍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그런데 믿기지 않는 소식을 믿을 수 있도록 보여주는 이 표징은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합니다. 그 표징이 구유의 아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새로운 모습을 알려줍니다. 곧 하느님은 전혀 다른 분이시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행동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내 생각은 너의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의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이사 55,8-9). 하느님은 권세와 영광 가운데 오시지 않았습니다. 전능하신 분이 오히려 연약한 아이로 오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지만, 당신 자신을 인간의 손에 내맡기시고, 거기에 온전히 의존하십니다. 그분은 하늘도 땅도 마땅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위대한 분이지만, 첫 번째 머물 장소로 마구간을 손수 선택하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곳이 가장 깨끗하신 분의 첫 거주 공간이 됩니다. 왜 이렇게 하실까요? 하느님은 역설적으로 보이는 이런 행동을 통하여 우리 인간과 거리를 두기를 바라셨을까요?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하느님은 당신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없애길 원하십니다. 그분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분은 친히 우리 곁에 머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에 앞서 우리를 더욱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구유의 아기 모습을 통하여 우리 각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대를 사랑합니다. 나는 그대 편에 서 있습니다. 그대를 정말 돕고 싶습니다. 나는 그대의 일생과 함께할 것입니다. 나는 그대에게 유일무이한 교환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곧 나는 그대를 위해 내 목숨을 바칠 터이니, 그대도 나에게 그대의 목숨을 바치시오!” 이것이 바로 참된 사랑이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일이 잘되면, 때때로 한두 가지의 사랑을 실천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언제나 사랑하십니다. 끝까지 사랑하십니다(요한 13,1 참조). 사랑은 그분의 본성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는 사랑이십니다. 사랑의 이러한 신비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 티토서도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셨습니다”(티토 2,14).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교구는 일 년 전부터 새로운 가정 복음화에 초점을 맞추어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가정 복음화란, 성탄의 관점에서 보자면, 아기 예수님을 가정 안에 모시고 그분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아기 예수님처럼, 가족을 사랑하기 위해 내가 먼저 나 자신을 낮추는 삶의 방식을 통해서 가정은 아름답게 성숙하고 또 완성됩니다. 그러니 아기 예수님을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모시어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합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여러 방면에서 날이 갈수록 갈등과 대립, 불신, 차별, 혐오 등이 팽배하고 있습니다. 특히 얼마 전 위헌적 비상계엄으로 우리 사회는 큰 충격을 받고 혼란에 빠졌습니다. 국정은 실종되고, 국민은 생명과 안전에 위협을 느끼며 불안에 떨고 민생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는 국민에 봉사하도록 위임받은 권한을 극도로 남용한 결과입니다. 이러한 혼란한 상황을 치유하기 위한 해법은 오직 아기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어 연약한 아기가 되신 구세주를 모범 삼아, 위정자가 사익을 멀리하고 국민을 우선하여 국정에 임할 때 우리나라는 한층 밝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어려운 이웃을 먼저 배려할 때, 우리 사회는 더욱 따뜻해질 것입니다. “타인에 대한 존중, 정의감, 진심 어린 개방, 대화, 헌신적인 봉사, 연대”(「생명의 복음」, 92항) 등은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겸손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니 아기 예수님을 받아들여 겸손의 길에 들어섭시다. 교우 여러분, 모든 두려움과 절망을 물리치고 아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겸손과 사랑의 길을 걸어갑시다. 그리하여 기쁨과 평화가 가득한 성탄절과 새해를 맞이하시길 빕니다.
2024년 성탄절에
전주교구장 김선태 사도 요한 주교
2024 성탄 메시지
성경에는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호구 조사령이 있었고, 요셉이 만삭의 아내 마리아를 데리고 조상들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갔다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고대 중국 역사에서 진나라가 다른 나라들을 쳐 이기고 패권을 잡은 후, 왕이 자신을 처음으로 황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하여 진시황제(秦始皇帝)라 칭합니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중해 패권 왕국 로마 역시 죽고 죽이는 권력다툼 끝에 최후의 승자가 스스로를 아우구스투스(Augustus 지존 至尊)라 부르며 시황제라 하였습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는 '죽고 죽이는 권력다툼 끝에 쟁취한 최고의 자리에 앉은 절대자를 의미합니다.
당시 식민지 백성 요셉과 마리아는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막강한 군대가 시키는 대로 본적지로 가서 호적 신고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대의 제왕들은 백성들의 호구 조사를 통해 세금 징수의 기반을 만들고, 병역 의무를 부과하며 통치권을 행사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군사력으로 식민지를 장악하고 식민지 백성들에게 부과한 세금으로 그 군대를 유지하고, 또 그 군대로 전쟁을 일으켜 다른 나라를 점령해 나가는 식으로 제국을 강화하고 계속 확장해 나갔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불행하게도 이런 강력한 권력 행사를 통한 파괴적인 전쟁과 수많은 사람들을 살상하는 가운데 이룩된 것입니다. 이는 지난 세기 동서 간 냉전 시기뿐만 아니라 오늘날 현실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 간 경쟁 속에 펼쳐지는 적대적인 분위기와 서로에 대한 긴장과 갈등의 위험은 늘 전쟁의 위협 속에 우리가 놓여 있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과연 주님이 초대하시는 평화의 길은 가능한지, 진정 인류가 평화로 공존하는 여정에 함께할 수 있는 것 인지, 한계와 좌절의 목소리만 커져 갑니다. 당시 최고의 자리에 앉은 황제는 무력으로 그 자리를 쟁취했지만, 성탄의 밤에 구세주께서 인간이 되어 오시는 모습은 가장 낮은 자리에 누운 갓난아기로서 하느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황제는 '무력(武)'을 사용하지만, 갓난아기는 '연약함'을 상징합니다. 황제는 무력(力)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지만, 갓난아기는 연약함을 통해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옛말에 '왕은 하늘이 내려준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진정한 왕입니까? 힘으로 자리를 쟁취한 자입니까, 하늘이 내려준 분입니까? 자신을 드러내고 높이는 자입니까, 하느님을 드러내고 높이는 분입니까? 그동안 한반도의 정세도 진정한 평화를 향해 나아가려 노력해 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앞에 놓인 문제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정치는 점점 더 혼란스럽고, 경제 상황도 역시 어렵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은 여전히 춥고 어둡습니다. 하지만 구세주 예수님께서 오늘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무엇보다 구세주께서 세상에 오신 모습은 우리에게 인권과 공동선을 향한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가난한 집안에 나약한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구세주 탄생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밤, 그분은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셔서, 자신을 낮추는 삶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십니다. 반면에 세상 사람들은 높은 것을 추구하며 자꾸만 높아지려고 합니다. 무한 경쟁에 내몰린 사람들은 남을 짓밟고 올라서서라도 높아지려고 합니다. 내가 높아지는 만큼 다른 사람이 내 밑에 깔려 낮아지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만,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 우리 마음을 채워 주지는 못합니다. 무릇 세상은 과거보다 더 높아졌지만, 우리의 마음은 오히려 더 공허해졌습니다. 또 세상은 더 부유해졌지만, 우리의 마음은 더 헐벗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더 화려하고 밝아졌지만, 우리 마음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최근 12월 3일에 일어난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의 여파는 우리 한국 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흔들어 놓았습니다. 언론에서 드러나고 있는 대통령의 위헌적 발상은 경찰과 군대 간부들의 증언을 통해 점차 알려지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부정선거 개입과 야당을 경고하는 차원에서 진행한 통치행위라고 발표했지만, 대한민국 국민들은 정권 야욕을 벌인 대통령에 대한 엄청난 분노와 더불어 대통령의 직무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고 탄핵안 가결을 이루어낸 위기일발의 형국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겐 참된 민주주의와 정의의 실현을 위한 간절함이 더욱 생생한 시각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하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합니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계신 가장 작고 힘없는 갓난아기 예수님을 둘러싸고 그분의 영광을 노래하던 수많은 하늘의 군대를 오늘 이 시대에도 보내주시도록 소리 높여 외쳐야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 마음속에 미움과 폭력을 부추기는 악의 군대를 몰아내고, 참 평화를 이루는 하늘의 군대를 파견해 주시도록 우리는 오늘 한목소리로 하느님 아버지께 부르짖어야 하겠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2024년 성탄절에
천주교 제주교구 감목 문창우
2024 성탄 메시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주님 성탄 대축일입니다.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지난 대림 시기 동안 우리는 세상에 오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망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이 밤, 하느님의 아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다함께 모여 경축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이 거룩한 밤에,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는 성탄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봅시다. 1.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티토 2,11) 거룩한 교회가 성탄의 신비를 거행하는 이 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티토 2,11)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그 은총은 우리를 구원에 참여하게 합니다. 이 은총은 우리를 향한 한없는 하느님의 사랑 자체입니다. 이 거룩한 밤에 구원의 은총이 어둠 속의 빛처럼 우리를 비추고,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신앙의 빛 안에서 사람이 되신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모두 구원을 얻습니다. 이처럼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 구원의 시작이며, 완성을 향한 빛입니다. 그 빛이 오늘 밤 어둠 속을 걷고 있는 우리를 비추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 밤 우리를 찾아오시기 위해, 우리와 같은, 우리 중의 가장 연약한 아기가 되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신 주님의 사랑과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2. “참 빛이 세상에 오셨다”(요한 1,9) 오늘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요한 1,9) 오셨습니다. 이 빛은 생명의 빛이요 구원의 빛입니다. 세상은 고요하고 어둠에 싸여 있었습니다. 구원의 빛은 우리의 기대와 희망과는 달리 화려하고 편안한 궁전이나 관저에서 권력자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 연약한 모습으로 구유 위에 나타났습니다. 이분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구원하시고 죽음의 사슬에서 해방하실 구세주이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어둠의 땅은, 세상의 가장 작고 힘없는 이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 머무실 곳입니다. 우리의 구세주께서 연약한 사랑으로, 자기를 내어놓는 온전한 사랑을 주시고자, 우리와 같은 힘없는 아기의 모습을 취하신 것이고, 이것이 어둠에 싸인 세상에 한 줄기 빛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던 주님의 천사는 목자들에게 주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포대기에 싸여 누워 있는 연약한 모습이 우리를 구원하실 구세주의 모습이라고, 세상 누구보다도 연약한 모습이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그 작고 힘없어 보이는 사랑은 끝내, 십자가에서 다시 한번 희생의 모습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며, 그것이 사랑이신, 스스로 연약한 모습을 취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임을 알게 하는 표징이라고 알려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탄생과 죽음으로 드러나는 한결같은 사랑의 연약함과 낮은 사랑의 모습에서 진정한 기쁨과 희망을 바라봅니다. 오늘 맑은 눈으로, 작은 이로 오시는 그 분을 바라보고 경배합시다. 3.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오늘 우리는 시대의 어둠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어두운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탓이 큽니다.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놓으려는, 가장 높은 곳에 서게 하려는 우리의 욕망은 세상 안에 전쟁과 갈등으로 평화를 깨뜨리고 있습니다. 도처에서 서로가 서로를 향해 벌이는 살육과 힘 있는 자가 그렇지 못한 이에게 가하는 폭력은 우리의 어둠이 얼마나 깊은지 알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이 한반도, 아픈 역사의 주인공들도 깊은 어둠을 향하고 있습니다. 형제들과 원한의 선을 긋고, 서로를 위협한 70여 년의 시간은 우리의 눈을 가렸습니다. 백성을 인도하는 통치자가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사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주권자들인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통제하려는 ‘비상계엄’을 선포함으로써 백성들은 물론 국가 전체를 한 치 앞도 바라볼 수 없는 어둠으로 밀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정의로 무장하지 않으면 앞을 볼 수 없는 어둠이 다스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의 정의와 공정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자신을 낮추고, 모든 것을 버리고, 나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분의 한 없는 자기 비움의 사랑에서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사랑과 정의를 위해 나를 낮추고 희생하는 예수님의 사람이 되심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다시 이 어둠을 뚫고 희망의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이 사람이 되신 사랑의 신비를 받아들일 때,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희망과 평화의 땅으로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그것이 빛으로 오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바입니다. 사랑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 앞에 힘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 앞에 모두 기꺼이 무릎 꿇읍시다. 독선과 아집의 높은 담을 허물고, 이기심과 욕망의 빗장을 풀어 오시는 주님을 모실 마음의 참 구유를 준비합시다. 그리고 그분의 빛으로 어둠을 뚫고 새 희망과 기쁨을 노래하는 우리로 거듭나는 밤이 됩시다. 그리고 그 빛을 온 세상을 향하여 비추는 이들이 됩시다. “모든 사람이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이사 52 참조) 아멘.
2024년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 청주교구장 김종강 시몬 주교
2024 성탄 메시지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이를 보고 황급하게 화물차가 급정거를 하게 됩니다. 길을 다 건넌 아이가 화물차를 올려다보며 기사를 향해 “감사합니다”하고 웃으며 인사를 하자 운전기사는 경고음을 울리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다음에는 꼭 횡단보도에서 천천히 운행을 하고 아이처럼 웃으면서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사랑을 담은 미소는 가정을 평화롭게 하고, 서로 모르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미소는 사회를 웃게 만듭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미소와 함께 경청한다면 우리 사회는 평화로울 것이고, 그 평화는 우리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킬 것이며 온 세상의 평화에 이바지할 것입니다. 지내온 한 해의 시간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읍시다. 또 다가올 을사년 한 해를 미소로 맞읍시다. 특별히 우리 신앙인은 희망의 순례라는 주제로 정기 희년을 맞습니다. 희망은 미소를 짓게 만듭니다. 소외된 이들, 청소년들, 어르신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희망의 순례에 기쁘게 참여합시다.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구유에 태어나실 아기 예수님의 축복과 미소가 여러분과 가정에 가득하시길 빕니다. 사랑을 담은 미소는 우리 세상을 평화롭게 합니다.
2024년 주님 성탄 대축일에
춘천주교 김 주 영 시몬
2024 성탄 메시지
사랑하는 군종교구민 여러분!
우리가 기다려 온 구세주께서 오늘 기쁜 이 밤, 우리 곁에 탄생하셨습니다. 전후방, 영공과 영해 그리고 해외에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는 모든 장병들에게 성탄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리고 군종교구 가정의 한분 한분에게도 아기 예수님 탄생의 축복이 가 득 내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곁에 태어나신 구세주 아기 예수님께서 죄와 삶의 고통에 짓눌려 있던 인류에게 구원의 기쁨을 가져다주심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오늘 우리 가운데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은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시 라고 엄숙히 선포됩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 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신 이 신비를 유한한 우리 인간이 어떻게 다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시고, 영원하신 분이 시간 안에 오신 강생의 신비를 어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믿고 깨달으려 할 때만 가능하며, 주신 선물을 감사로이 받겠다는 열린 마음이 있을 때에 비로 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라고 복음사가 요한은 전합니다. 인간의 교만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저버린 인류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됨으로써 죄와 죽음, 고통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자비와 사랑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죄와 죽음 의 구렁텅이에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대속의 제물로 삼아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원의는 말씀이신 예수님의 탄생이라는 신비로운 선물로 우리에 게 주어집니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셨다.”(필리 2,7) 성자의 탄생은 하느님 자기비하와 사랑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세상에 오심으로 죄와 고통과 죽음에 시달리던 인류에게 참된 행복과 영원한 생 명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루카 2,10) 들판에 살면서 양 떼를 지키는 순박한 목자들 둘레에 빛이 비추어지며, 두려움에 싸인 목자들에게 천사가 전한 말이었습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 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 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1-12) 기원후 5세기의 성 레오 교황은 성탄절 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오늘 우리 구세주께서 탄생하셨으니 기뻐합시다. 죽음의 공포를 소멸하시고 영원한 약속으로 인해 기쁨을 부어 주시는 생명께서 탄생하신 이날 슬퍼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이 기쁨의 참여에서 아무도 제외될 수 없으며 기뻐할 이유는 모두가 다 지니고 있습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당신은 생명에로 부름받았습니다.’ 구세주의 육화로 인한 ‘기쁨’은 그리스도교 정신의 핵심이며, 궁극 목표입니다. 오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 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당신께서는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당신 앞에서 기뻐합니다. 수확할 때 기뻐하 듯....”(이사 9,1-2) 신앙의 기쁨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신 이유이며, 우리 신앙 여정의 목적입니다. “라마에서 비통한 울음소리와 통곡 소리가 들려온다.”(예레 31,15) 2022년 2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양국에서 발생한 사망자와 부상자 수는 대략 100만 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지난해 10월 발발한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와 이스라엘 의 전쟁 역시 수많은 사상자와 피난민을 발생시키며 지금껏 총성이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세계 각 지역에서 분쟁과 테러와 전쟁의 소식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불행하게 도 우리나라 역시 격동의 정치적 혼란 속에 있습니다. 인간의 이기심과 하느님을 적대시하는 교만이 존엄한 인간의 권리를 유린한 채 서로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설정한 정의의 잣대로 집단을 이념화시 키고, 공동체를 양분합니다. 더 이상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고 내 주장과 생각만을 내 세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 라.”(요한 15,12)라는 말씀이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는 말씀은 고리타분한 성경 속의 말씀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어디서 부터, 어떻게 이를 풀어나가야 할지 답답함을 느낍니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2025년 정기 희년을 맞아 교황님께서 내려주신 주제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교회의 사명은 “우리의 희망이신 그리스도”(1티모 1,1)를 언제 어디서나 모든 이에게 선포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덧붙여, ‘사람은 누구나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내일 무슨 일 이 닥칠지 알 수 없지만, 희망은 좋은 일이 생기리라는 기대와 바람을 저마다의 마음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이 희년이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되살릴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 바라라. 네 마음 굳세고 꿋꿋해져라. 주님께 바라라.”(시편 27,14) 앞이 분간되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촛불이 밝혀지면 어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 고 광명의 세상이 됩니다. 오늘 이 밤 우리를 찾아오신 아기 예수님은 바로 세상의 ‘빛’이 십니다. 그분은 어둠을 없애시고 광명과 빛을 선사하십니다. 사랑하는 군종교구민 여러분! 천사들의 환호 속에 오늘 우리 가운데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와 생명의 기쁨을 선물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사회가 혼탁하더라도, 기가 꺾이거 나 낙담하지 맙시다. 교황님 말씀대로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 두운 긴 터널과 같은 시간이 지나면 광명의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 우리 군 인들, 우리 국민들은 이를 잘 헤쳐 나갈 저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든든 한 구세주 예수님이 계십니다. 오늘 이 밤, 마음껏 기뻐하며 구세주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함께 경축합시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2)
2024년 주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 군종교구장 서상범 티토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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