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
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 묵상 |
|---|
|
김건태 신부님_율법위의 사랑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친구들과 지인들을 초대하여 음식을 나누곤 했습니다. 오늘 예수님도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아 식사하시면서, 안식일 준수의 정신을 가르치는 기회로 삼으십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제정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 앞에서, 예수님은 이미 여러 차례 치유의 기적을 행하신 바 있으나, 오늘은 더욱 거리낌이 없어 보이십니다. 지상에서의 구원사업을 마무리할 수난의 마지막 여정에 서 계시기 때문이며, 치유의 명분이 두드러져 보이기 때문입니다.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안식일의 성성(聖性)에 관한 율법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는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는 ‘수종을 앓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연일 수도 있고 계획적일 수도 있지만, 예수님은 함정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병을 죄의 결과로 인식하고 있음을 잘 알고 계셨기에, 이 병자를 치유함으로써 병과 함께 죄로부터의 해방을 동시에 이루어 내실 것이며, 이로써 안식일에 백성들이 하느님을 더 흠숭하고 더 찬미하도록 이끄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당신을 제대로 응시하지도 못한 채 지켜보고만 있는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느냐?”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을 뿐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그들이 볼 수 있도록 하느님의 사랑과 능력을 펼쳐 보이십니다. 병자를 가까이하여 손을 얹어 치유해 주신 다음, 돌려보내십니다. 모든 것이 정리되고 마감된 듯하나, 주위의 사람들은 ‘아직’인 것 같습니다. 두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긍 또는 인정할 때가 된 것 같으나,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들의 닫힌 마음을 열어젖히시고자 질문을 던지십니다. 평소에 그들에게 그런 일이 닥쳤을 경우, 그렇게 할 수밖에 없던 일을, 자식과 가축에 관한 일을 예로 물으십니다. 사랑과 관심을 표명하는데 시간과 장소가 대수이겠는가 하는 의지가 담겨 있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으로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밝히고자 하십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녀를, 특히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분이며,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이들을 족쇄에서 풀어주시며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 보이시는, 거룩한 날임을 천명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식사에 초대받은 모든 이는 율법 위에 사랑과 자비가 있음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결코 예수님의 질문에 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 말씀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오늘 하루, 하느님에 대해 말한다는 것,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에 대해 묵상한다는 것, 교회의 가르침과 제반 규정을 살펴본다는 것, 이 모든 것은 사랑 안에 정리되고 집약된다는 신념으로, 좀 더 사랑하는 마음과 실천으로 다스려 나가는, 아름다운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14,1-6: 안식일에 대한 논쟁
복음의 첫머리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지켜보았다.”(1절) 그들은 율법의 ‘조항’에는 충실했지만, 율법의 영(靈)을 잃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율법은 사랑 안에서 완성된다. 사랑이 빠진 율법의 준수는 껍데기일 뿐이다.”(In Epistolam Ioannis ad Parthos Tractatus 7,8 재구성)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목적이 사랑임을 드러내기 위해 바리사이의 시선 앞에서 기적을 행하신다. 그분의 행동은 율법을 폐지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본래의 정신, 자비와 생명을 위한 율법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3절) 예수님의 질문은 하느님이 주신 율법의 근원적 의미를 다시 묻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5절) 율법의 참된 정신은 사람을 살리는 것,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진정한 뜻을 밝히셨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한 것이며’(마르 2,27), 하느님께 찬미와 자비를 드러내는 날이다.”(2173항) 성 이레네오도 말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율법을 주셨지, 율법을 위하여 인간을 만드신 것이 아니다. 율법은 사랑을 가르치는 스승이다.”(Adversus Haereses IV,16,5 요약)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인간을 얽매는 율법의 굴레를 끊으시고, 자비의 율법을 제정하신다.
“그들은 잠자코 있었다.”(4절)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침묵한다. 그 침묵은 양심이 스스로를 고발하는 침묵이었다. 그들은 ‘규정’을 알지만, 그 규정의 주인인 하느님을 모르는 자들이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이렇게 주해한다. “그들은 율법의 문자는 지켰으나, 율법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거부했다. 그들의 침묵은 그들의 심판이었다.”(Homiliae in Matthaeum 40,3 요약)
하느님께서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참조: 탈출 20,8-11; 신명 5,14-15)라는 계명을 주셨다. 이는 하느님께 대한 찬미의 날이자, 인간의 해방과 회복의 날이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은 단지 기적의 표징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시작, 곧 구원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사건이다. 성 그레고리오는 말한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은 새로운 창조의 첫 표징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죄의 속박에서 쉬게 된다.”(Homiliae in Evangelia 32,2 요약) 그분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안식의 진정한 의미, 영혼의 평화가 이루어진다. 성 베르나르도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사랑이 없는 계명 준수는 영혼을 억누르고, 사랑 안에서의 계명 준수는 영혼을 자유롭게 한다.”(Sermo de Diversis 33,5 의역) 우리의 안식일, 곧 주일은 형식이 아닌 사랑의 날,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고 생명을 일으키는 날이 되어야 하겠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 번호 | 제목 | 등록일 | 작성자 |
|---|---|---|---|
| 192753 |
전삼용 신부님_바리사이, 율법학자의 꼰대 근성에서 벗어나려면 |
11:17 | 최원석 |
| 192752 |
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 묵상 |
11:15 | 최원석 |
| 192751 |
이영근 신부님_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루카 14,3 ... |
11:13 | 최원석 |
| 192750 |
양승국 신부님_치유행위는 안식일 정신에 가장 합당한 일입니다! |
11:11 | 최원석 |




게시판 운영원칙
Help Des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