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17일 (토)
(홍)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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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켜진 성체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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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선 [hsyoonrda] 쪽지 캡슐

05:47 ㅣ No.192497

[가톨릭 영성 단편소설_2] 불켜진 성체등 


윤홍선

 

https://m.blog.naver.com/hsyoonrda/224434528196

 

"세상 모두가 불을 끄고 떠난 밤에도 당신을 기다리는 빛이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하는 산 증인이 된 것입니다."

 

 

1. 차가운 밤 11시

 

차가운 가을바람이 성당 마당의 낙엽을 쓸고 지나가는 밤 11시, 수연은 성당 주변을 목적 없이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손에는 낮에 받은 '최종 경매 집행 통지서'와 '이혼 서류'가 구겨져 있었습니다. 남편의 빚보증으로 시작된 재앙은 수연이 피땀 흘려 일군 작은 공방마저 삼켜버렸습니다. 하나뿐인 어린 딸마저 친정 어머니에게 맡긴 채 길거리로 내몰린 수연의 머릿속에는, 스스로 인생의 완벽한 ‘어둠’ 속에 갇혔다는 절망만이 맴돌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다는 거친 숨을 내쉬며, 수연은 성당 본당의 굳게 닫힌 붉은 아치형 나무문을 바라보았습니다. 밤이 깊어 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고, 높다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검은 유리판처럼 아무런 빛도 내뿜지 않고 있었습니다. 세상 전체가 자신을 향해 불을 끄고 문을 걸어 잠근 것만 같았습니다.

 

 

2. 불빛

 

더 이상 돌아갈 집도, 붙잡을 밧줄도 없던 수연은 성당 문 옆에 놓인 나무 벤치에 주저앉았습니다.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가, 본당 측면 유리창 나뭇가지 사이로 작고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붉은 불빛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창문 유리창 너머, 짙은 어둠이 깔린 본당 내부 제대 옆 감실 부근에서 홀로 켜져있는 작은 붉은등이었습니다.

 

 

"아직… 불이 켜져 있네."

 

 

수연은 홀린 듯 벤치에서 일어나 유리창으로 바싹 다가갔습니다.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와 손바닥을 대고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넓고 깜깜한 성전 안에, 오직 그 작은 붉은 불빛 하나만이 둥글고 온화한 빛의 테두리를 그리며 어둠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화려한 간판과 전등이 꺼진 이 깊은 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빈 성전에서 그 불빛은 조용히, 그러나 쉬지 않고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3. 기다림

 

그때, 성당 외등을 점검하러 마당을 지나던 늙은 본당 사제(신부)가 서성이는 수연을 발견하고 다가왔습니다.

 

 

"자매님, 이 깊은 밤에 어찌 홀로 서 계십니까?"

 

 

신부의 따뜻한 목소리에 수연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습니다. 구겨진 서류 봉투를 가방 속으로 깊숙이 찔러 넣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신부님… 저기 성당 안에 켜져 있는 저 붉은 불은 무엇인가요? 성당 문도 잠겼고 사람도 없는데, 왜 저 불만 혼자 켜져 있습니까?"

 

 

신부님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수연의 시선을 따라 창문 너머 감실을 바라보았습니다.

 

 

"저것은 ‘성체등’이라고 합니다. 감실 안에 예수님의 몸인 거룩한 성체가 모셔져 있음을 알리는 등불이지요."

 

 

"왜 이 깜깜한 밤에… 아무도 보지 않는데 혼자 켜두는 건가요?"

 

 

신부님은 수연의 떨리는 목소리에 따뜻한 목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자매님, 저 불은 누군가 보아주기를 바라서 켜두는 불이 아닙니다. 저 등불은 ‘기다림’의 등불입니다. 세상이 모두 잠들고, 모든 빛이 꺼진 가장 어두운 밤에도… 단 한 사람, 상처받고 길을 잃은 영혼이 찾아왔을 때 '내가 여기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365일 단 한 순간도 꺼지지 않는 불빛이지요."

 

 

4. 시선

 

신부님의 말이 수연의 가슴속 깊은 묵은 상처 위에 툭 하고 떨어졌습니다.

 

 

‘가장 어두운 밤에도 너를 기다리고 있다…’

 

 

수연은 다시 유리창 너머의 작은 불빛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완벽히 버림받았고, 세상의 그 누구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눈물 흘리며 절망의 밤길을 방황하는 동안에도, 이 거룩한 집의 감실 앞에서는 자신을 위한 작은 불빛이 단 한 번도 꺼지지 않은 채 켜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화려하게 성공한 수연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잃고 상처받아 갈 곳 없는 지금 이 순간의 수연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아… 나를 향해 켜둔 불빛이었구나.’

 

 

수연의 굳어 있던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열기가 울컥 차올랐습니다. 그녀는 차가운 성당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습니다. 오열 소리가 가을 밤공기를 울렸지만, 제대 옆의 붉은 불빛은 흔들림 없이 그녀의 아픔을 따스하게 감싸 안아주었습니다.

 

 

5. 온기 

 

신부님은 조용히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성당 측면 쪽문을 열어주었습니다.

 

 

"들어오셔서 편히 쉬다 가십시오. 주님께서 자매님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수연은 조심스럽게 어두운 성전 안으로 발을 내딛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오직 감실 옆의 성체등만이 붉고 은은한 온기를 내뿜으며 그녀를 맞이했습니다.

 

 

그녀는 제대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무런 미사여구도, 거창한 기도문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저 붉은 불빛을 바라보며 가만히 마음의 고백을 올렸습니다.

 

 

‘주님, 세상의 불이 다 꺼져버려 제 삶도 이대로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저를 위해 이 작은 불빛을 남겨두셨군요.

 

이제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제 딸을 위해서라도, 이 빛을 안고 다시 시작해 보겠습니다.’

 

 

감실등의 붉은 빛이 그녀의 눈물 젖은 얼굴과 떨리는 두 손을 따스하게 물들였습니다. 그것은 절망의 끝에서 만난 소망의 불빛이었습니다.

 

 

6. 아침

 

얼마나 지났을까, 캄캄했던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위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동이 트며 붉은 태양 빛이 성전 안으로 길게 투사되었습니다.

 

 

수연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밤새 바친 눈물 덕분에 마음속을 짓누르던 무거운 돌덩이가 거짓말처럼 가벼워져 있었습니다.

 

 

여전히 성당 밖으로 나가면 감당해야 할 현실과 무너진 삶의 잔해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내면은 더 이상 어둡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어떤 어둠도 가슴속에 모셔 들인 저 작은 감실의 불빛을 끄뜨릴 수 없음을 이제는 알았기 때문입니다.

 

 

수연은 감실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인 뒤,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성당 문을 열고 밝아오는 아침 햇살 속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7. 5년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수연의 삶에서 절망의 그림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세상이 던져준 시련은 그녀를 부러뜨리지 못했고, 성체등 아래서 품은 불빛은 그녀의 삶 전체를 밝히는 온기가 되었습니다.

 

---

 

수연은 수공예 공방을 다시 열었습니다. 화려하고 거대한 사업은 아니지만, 따뜻한 마음과 정성이 담긴 작은 목공예·섬유 공방입니다. 공방 이름은 성당에서 얻은 희망을 담아 ‘등불’이라 지었습니다.

 

 

친정 어머니에게 맡겨두어야 했던 딸 유진이는 어느덧 초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수연은 작은 단칸방에서 출발해 이제는 햇살이 잘 드는 아늑한 빌라로 이사했습니다. 매일 아침 딸의 머리를 묶어주고 아침밥을 챙겨 먹이는 소박한 일상이 수연에게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적입니다.

 

 

 남편의 빚 잔해와 경매의 상처는 차근차근 법적 절차를 거쳐 정돈되었습니다. 수연은 더 이상 타인의 허물 때문에 자신을 자책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바로 선 당당한 여성으로 살아갑니다.

 

 

수연은 매일 아침 공방 문을 열기 전, 5년 전 그 성당을 찾습니다. 이제는 굳게 잠긴 문 밖이 아니라 성전 안 제대 앞 장의자에 앉아 감실등을 바라봅니다. 아무런 요구도, 사나운 원망도 없이 그저 붉은 빛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고백합니다.

 

"주님, 오늘도 저와 제 딸에게 하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받은 이 온기를 세상에 나누게 하소서."

 

 

수연은 성당의 '구역모임' 활동과 지역 한부모 가정 지원 센터에서 봉사자로 활동합니다. 홀로 아이를 키우며 경제적·정서적 벼랑 끝에 내몰린 여성들을 찾아가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절망에 빠진 이들이 "어떻게 그 힘든 시간을 견뎌냈느냐"고 물을 때, 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성당의 성체등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세상 모두가 불을 끄고 떠난 밤에도 당신을 기다리는 빛이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하는 산 증인이 된 것입니다.

 

 

수연은 더 이상 세상의 풍랑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가슴속에는 5년 전 그 가울밤, 차가운 유리창 너머로 만났던 가장 어두운 밤에도 꺼지지 않는 거룩한 불빛이 단단하게 피어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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