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14일 (수)
(녹)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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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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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08:51 ㅣ No.192454

김건태 신부님 _ 불행선언 둘 

 

겉과 속이 다른 바리사이들의 신앙 행태를 질타하신 다음, 오늘 예수님은 더 많은 주제를 기초로 불행 선언을 이어가십니다.

첫 번째 불행 선언은 ‘십일조’에 관한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십일조를 지나칠 정도로 세심하게 지키던 사람들로서, 박하와 운향과 채소와 같은 매우 사소한 농작물에까지 적용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일조 자체나 십일조 준수에 대한 철저한 정신 자체를 비난하지는 않으시나, 조건을 두십니다. 어디까지나 그 철저함 또는 세심함이 ‘의로움’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과, 부족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어 주는 ‘사랑’을 경시하거나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회당에서는 윗자리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을 향하여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이들은 사실 회당의 윗자리 곧 ‘모세의 자리’에 앉아, 모세의 합법적인 후계자이며 해설자로서 활동하였기에, 예수님도 이들의 존재와 권위만큼은 인정하십니다(마태 23,2-3). 장터에서 인사받는 것도 예외적인 현상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행실에 있었습니다. 인정받고 존경받는 그만큼 언행이 일치하고, 지행이 조화를 이루어야 함에도, 그러하지 못한 모습이 불행 선언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무덤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예루살렘의 키드론 골짜기 주변에는 많은 무덤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모두 흰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밤에도 무덤을 분별할 수 있도록 횟가루를 뿌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무덤은 죽음과 맞닿아 있는 부정한 장소이므로 어두움 속에서도 그것을 알아보고 접촉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특히 성전에 올라가려는 이들이 한밤에 실수로 무덤에 몸이 닿아 부정하게 됨으로써, 성전 전례에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를 예방하려는 조치였습니다. 비유의 의도는 강렬해 보입니다. 예수님은 이 불행 선언을 통해서, 의롭게 보이기 위해 겉모습은 횟가루로 아름답게 꾸며 놓았지만, 속은 주검 곧 위선자의 악취와 율법에 반하는 정신으로 가득 차 있음을 폭로하십니다.

 

끝으로 예수님은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이의를 제기하면서 스스로 바리사이들과 다를 바가 없음을 고백하는 율법 교사들을 향하여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며, 무거운 짐, 곧 지키기 어려운 법 규정들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 어깨 위에 올려놓고서는 정작 자신들은 아랑곳하지 않는 치졸한 모습이 불행 선언의 결정적 요소로 자리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유다교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유다교의 종교적 의무인 십일조가 추구하는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고, 인정과 존경을 받는 만큼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취할 것을, 최소한 무덤과 같은 존재로 전락하지 말 것을 강한 어조로 권고하십니다.

 

 

율법 자체보다는 율법 안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뜻을 살피는 가운데, 오늘 하루도 어제처럼 말하는 대로 행동하고, 아는 대로 행동하는 자세를 뛰어넘어, 믿는 대로 실천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드러내는, 소중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11,42-46: 정의와 사랑의 실천을 소홀히 하는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매우 엄격한 책망을 하신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42절)라는 표현은 단순한 꾸짖음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에서 멀어져 있음을 드러내는 심판의 말씀이다.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외적인 형식에만 집착할 때, 우리도 그들과 다르지 않음을 돌아보아야 한다. 

 

바리사이들은 십일조와 같은 율법의 세부 규정에는 열성적이었지만, 정작 더 중요한 정의와 하느님의 사랑은 실천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왜곡된 신앙 태도를 “드러나지 않는 무덤”(44절)에 비유하신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경건해 보이지만, 속은 썩어 악취가 나는 무덤과 같다는 것이다. 또한, 율법 교사들 역시 자신들은 행하지 않으면서, 남들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우고 의무만 강요하는 위선적 태도로 책망을 받는다.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직분을 받았지만,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과 정의를 잊어버린 것이다. 

 

성 예로니모는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꾸짖으며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율법의 글자에는 집착하지만, 영을 알지 못한다. 글자는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죽이며, 영은 생명을 준다.”(Commentarium in Matthaeum 23,23 요약)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도 경고한다. “율법을 해석하는 자가 자신은 행하지 않고 남만을 책망한다면, 그는 가장 무거운 심판을 피할 수 없다.”(Homiliae in Matthaeum 72,3 재해석)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겉모습만으로는 하느님 앞에 설 수 없으며,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야말로 참된 신앙인의 모습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겉모습만 신앙인으로 보이려 하지는 않는가? 나는 말로만 옳은 것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사랑과 정의를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신앙은 단순히 전례 참여나 기도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의 삶 속에서 자비·정의·용서·사랑의 열매로 드러나야 한다. 가정에서는 서로 존중하고 용서하는 모습으로, 직장에서는 정직과 정의로운 태도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자비와 섬김으로 드러날 때, 우리는 바리사이들의 길이 아니라 참된 제자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불행하여라.”가 아니라, “행복하여라.”라는 축복으로 바뀌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겉과 속이 일치하는 신앙,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때 이루어진다. 주님 앞에서 진정한 신앙인으로 서도록 은총을 청하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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