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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9월 24일 (목)
(녹)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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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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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15:53 ㅣ No.192093

김건태 신부님_이 사람은 누구인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이러저러한 질문이 던져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생활하실 때 이미 제기되었던 질문입니다. 갈릴래아 지방의 제후였던 헤로데(안티파스: 기원전 4기원후 39)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이루신 행적들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과 같은 정보화 시대가 아니었음에도, 헤로데는 개인 정보원들을 통해 널리 전파되어 있던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지금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에 대한 평가는 상호 엇갈린 상태에서 과장되거나 왜곡된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소문들 가운데 어떤 소문에 무게를 두어야 할까, 예수라는 이 기이하고 역설적인 인물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할까 하는 이러한 질문들이 헤로데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여러 갈래였던 것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 되살아났다.하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가 나타났다.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합니다. 군중 심리는 가급적이면 각자의 취향에 따라 호기심을 끄는 쪽으로 쏠리곤 합니다. 때로는 선정적이며 자극적인 소문에 귀를 더 기울이곤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가르침과 행적을 통해 이러한 소문에 부채질하시는 분으로 잘못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군중은 가르침과 행적의 의도와 목적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호기심 충족만 갈구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둘러싼 이 모든 소음으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요한 세례자를 처참하게 살해한 그 사건이 있은 다음, 마음속 깊이 처박아 두고 잊으려 해도 늘 가슴을 짓눌렀던,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의 처참한 죽음이 헤로디아의 앙심에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문제의 핵심 인물은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분명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그의 말을 기꺼이 듣곤 했던사람입니다(마르 6,20 참조). 그러나 호기롭게 내뱉은 말 한마디가 결국 자기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의롭고 거룩한 사람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 따라서 두려워하고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판단, 당황해하면서도 질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관용, 이 모든 인간적인 모습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경비병을 보내 가져오라고 한 요한의 머리는 바로 자신의 인간성이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부정해 버렸으니, 남은 그의 인생은 살아도 죽은 인생, 영혼 없는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이들은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며 세상과 인류의 구원자로 고백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그분의 이 참된 신원을 끝까지 거부합니다. 헤로데처럼, 신앙이 주는 어려움과 이 어려움이 요구하는 세속적 포기를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겸허한 마음이 부족하거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갖은 혼란과 맞서 싸울 도전적 자세가 필요합니다. 오늘 하루, 겸허한 마음으로 도전하여, 우리 주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주시는 메시아이심을 고백하며 전하는, 가슴 벅찬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 헤로데가 예수님에 대해 묻다. 

 

오늘 복음은 헤로데가 예수님의 활동에 관한 소문을 듣고 “이 사람은 누구인가?”(9절)라는 물음을 던지는 장면을 전한다. 이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의 불안한 양심의 반응이기도 하다. 요한 세례자를 죽인 헤로데는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한 결과, 예수님을 바라보면서도 참된 믿음에 이르지 못한다. 

 

진리를 거부한 영혼은 새로운 진리의 빛이 비칠 때 기쁨보다 먼저 두려움을 느낀다. 헤로데의 내적 동요는 바로 진리의 말씀 앞에서 인간이 가지는 두려움과 회피를 보여 준다. 성 암브로시오는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으나, 믿음 없는 눈은 진리를 볼 수 없다.”(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Lib. VII, 109-110 의역)라고 지적한다. 단순한 호기심만으로는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으며, 회개와 믿음의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열망이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다면 결코 그분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찾으면 곧 발견하게 된다.”(Homiliae in Matthaeum Hom. 49,1-2 재구성)라고 강조했다. 즉, ‘예수님을 알고 싶음’은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회개와 믿음을 전제로 하는 영적 갈망이어야 한다. 

 

교회는 복음 선포가 단순히 말이 아니라, 삶 전체를 통해 드러나야 한다고 가르친다. 교회 헌장은 “신자들은 말과 행위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35항 요약)라고 말한다. “복음의 기쁨”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은 강요가 아니라, 매혹으로 전해진다.”라고 강조하며, 선포자는 먼저 말씀 안에서 기쁨과 자유를 살아야 함을 상기시킨다. 즉,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목하고 질문을 던지게 하는 힘은 우리의 진실한 삶, 곧 복음을 살아내는 기쁨과 증언에서 비롯된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싶었지만, 믿음 없는 호기심으로는 참된 만남에 이르지 못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먼저 내가 그 말씀 안에서 자유와 행복을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말씀 안에서 기쁘지 않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복음으로 이끌 수 있겠는가? 우리가 먼저 복음 안에서 행복해야, 그 기쁨이 이웃에게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사람들은 우리 안에서 주님을 만나고 싶어질 것이다. 

 

오늘 복음의 질문은 단지 헤로데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던져야 할 물음이다.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신가?” 그분을 단순한 ‘소문 속 인물’로 남겨두지 말고, 믿음과 회개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분을 진정으로 만나게 되며, 삶 전체로 그분을 증거하는 복음의 향기가 될 수 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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