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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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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들보와 티
오늘 말씀은 어제 복음의 끝부분과 밀접하게 연계되는 말씀입니다. 어제 예수님은 간결하면서도 명료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권고의 수준을 벗어난 명령의 말씀입니다. 어떠한 논쟁이나 이의 제기를 거부하시는 말씀입니다. 윤리적 차원에서 이웃을 심판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람은 선하고 저 사람은 악하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심판이나 단정은 우리가 범접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에, 이 영역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심판해서는 안 되는 이유 또는 논리는 간단합니다. 남을 심판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잣대를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자주 또는 함부로 들이대는 잣대는 편협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나쁘다.’ 또는 ‘이 사람이 하는 행동은 악하다.’ 하고 말할 때, 순수 외적인 것을 기준으로 할 때가 다반사입니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판단하지만, 실은 정확하게 알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 사람 내면의 세계, 그 사람의 진정한 모습을 안다는 것 자체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만이 아시기에, 하느님만이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닙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남을 심판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예수님은 우리가 일상생활 중에 자주 남을 심판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심이 분명합니다. 때로는 공동체 생활 또는 공동체 관계에서 형제에 대해 피할 수 없는 판단이 꼭 필요할 때가 있음을 잘 알고 계십니다. 판단 지연 또는 보류가 공동체의 질서를 더 어지럽게 할 때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덧붙이십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내 눈에 있는 것이 ‘들보’이고, 그 사람 눈에 있는 것은 ‘티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기가 정말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 반대려니 생각하거나 그렇게 기대할 때가 일반적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생각 또는 기대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이러한 생각 또는 기대 자체가, 우리 눈에 있는 것이 진정 ‘들보’가 틀림없다는 증거라고 꾸짖으실 것만 같습니다. 형제와의 관계에서 “심판하지 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절대적인 원리임을 가슴에 새깁니다. 그러나 수십 번 생각해도 판단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면, 먼저 내 눈의 ‘들보’부터 제거하려는 노력이 앞서야 하겠습니다. 남의 눈에 있는 것이 들보보다 더 크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냥 내버려두어도 될 ‘티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한다면, 심판이나 판단에 뒤따르는 실수나 상처는 최소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남을 보고 듣고 판단하기에 앞서 먼저 나를 보고 듣고 판단하는, 신앙인다운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42절)라고 하시며, 남을 판단하기보다 먼저 자신을 성찰하라고 하신다. 신앙인의 삶은 타인을 재단하고 단죄하는 삶이 아니라, 자비와 겸손으로 자신을 먼저 고치는 삶이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39절)라고 말씀하시며, 영적 분별과 자기 성찰의 필요성을 강조하신다. 다른 사람의 눈 속 티는 잘 보면서, 자기 눈 속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위선이다.(41절) 따라서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정화한 다음에야 비로소 다른 이를 도울 수 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제자직의 본질을 드러낸다. 제자는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닮아, 자비와 겸손 안에서 이웃을 인도해야 하기 때문이다.(40절 참조)
교부들은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신앙인의 자세를 가르쳤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타인의 허물을 단죄하는 일에 앞서, 자신의 허물에 눈을 떠야 한다. 자기 죄를 깨닫는 이는 더 이상 남을 판단하지 않는다.”라고 가르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네가 다른 이를 심판할 때, 너는 그 사람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죄인들이기 때문이다.”(Sermon 19,2)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심판보다 먼저 용서를 선택하고, 단죄보다 자비를 우선시한다. 이렇듯 교회의 전통은, 자신에게 엄격하고 이웃에게는 자비로운 태도가 그리스도인의 길임을 강조하고 있다.
오늘 말씀은 우리 신앙생활 안에서 두 가지를 성찰하도록 초대한다. 자기 성찰, 나는 혹시 다른 이의 작은 티끌을 꼬집으면서, 내 안의 들보를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교회 안에서, 쉽게 남을 비난하면서 내 허물에는 눈 감고 있지 않은가? 자비와 관대함, 우리는 다른 사람을 단죄하는 심판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자비를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신 예수님(요한 8,1-11),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마태 18,22)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나에게 잘못한 이웃을 용서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 안의 들보를 빼내라고 하신다. 이는 우리가 모두 먼저 회개와 성찰로 주님 앞에 바로 서라는 초대이다. 남을 판단하기보다 자신을 고치고, 단죄하기보다 자비를 선택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세상에 참된 빛과 평화를 전할 수 있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37절)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하느님의 자비를 닮아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청하여야 하겠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 번호 | 제목 | 등록일 | 작성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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