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1일 (화)
(녹) 연중 제22주간 화요일(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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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김건태 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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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6-08-29 ㅣ No.191546

이병우 신부님_<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마르6,25)

 

'불의 앞에 침묵하는 것은 죄(罪)!'

 

오늘 복음(마태25,1-13)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11,11)는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앞서 파견되어, 예수님께서 오시는 길을 닦고 준비한 참으로 위대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입니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불의 앞에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정의를 외치다가 헤로데의 칼에 의해 순교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당시 절대 권력이었던 헤로데가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아내로 차지하는 불의를 지적했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르6,18)

 

그 결과가 죽음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렇게 정의를 외치다가 순교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도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다가 박해자들의 손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불의나 잘못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죄(罪)라고 생각합니다.

 

불의를 따라가지 말고, 하느님의 정의를 따라갑시다!

불의와 정의를 분별하는 기준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의 가르침입니다. 그분의 말씀입니다.

그 기준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들은 늘 말씀을, 특히 복음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정의를 이 땅에서 실현해야 할 소명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공동선(공동이익)이라는 하느님의 정의가 있습니다.

인간은 물론이고, 하느님께서 존재하게 한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더불어 잘 살게 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공동선(공동이익)의 원리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정의 앞에 불의가 놓여져 있습니다.

그 한 모습이 바로 '양극화의 문제'입니다.

21세기 양극화의 모습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렇게 지적하셨습니다.

"한쪽에서는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음식이 버려지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더 이상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는 사회적 불평등입니다."(복음의 기쁨, 53항)

 

세례자 요한처럼 불의에 맞서 하느님의 정의를 이 세상에 외치는 하느님의 참 신자들이 됩시다!

이념이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그리고 물질만능주의와 같은 세상 가치에 매몰되지 말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참 그리스도인들이 됩시다!

 

(~ 애가3,66) 

 

조욱현 신부님_ 요한 세례자의 죽음 

 
1. 요한 세례자의 삶과 증거
요한 세례자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는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라고 고백하면서,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인도하고, 마지막에는 피 흘림으로써 그분을 증거하였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요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요한은 목소리이고, 그리스도는 말씀이다. 요한은 덧없는 목소리지만,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신 영원한 말씀이다.”(Tractatus in Ioannem 293,3 의역) 요한은 하느님의 영원한 말씀을 드러내기 위한 목소리로 살았으며, 침묵을 강요하는 권력 앞에서도 그 목소리를 꺼뜨리지 않았다. 
 
2. 예언자의 소명과 순교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요한 세례자는 진리와 정의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놓았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의인보다 강한 이는 없고, 불의한 임금보다 더 약한 이는 없다.”(Homilia in Matthaeum 4,3 의역) 헤로데는 권력을 쥐었으나 진리를 두려워했고, 요한은 쇠사슬에 묶였으나 진리 안에서 자유로웠다. 예언자의 길은 언제나 박해와 죽음을 동반하지만, 그 길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길이다. 
 
3. 교회의 가르침
사목 헌장은 교회가 예언자적 소명을 이어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교회는 성령의 힘으로 세상의 징표를 살피고, 모든 시대와 문화 안에서 진리의 빛을 드러내야 한다.”(4항 요약) 또한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인은 말과 행위로 진리를 증거해야 하며, 그 증거는 순교에 이르기까지 요구될 수 있다.”(2471항 의역) 요한 세례자는 바로 이러한 증거의 전형이며, 수도자들과 모든 신앙인의 모범으로서, 자기 생명을 내어놓음으로써 진리를 완성하였다. 
 
4. 우리 삶의 적용
오늘 우리는 자문해 보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9). 요한 세례자는 그분이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참된 구세주요 생명의 주님으로 고백해야 할 것이다. 권력과 세상의 눈치를 보며 진리를 침묵시키는 헤로데의 길을 피해야 한다. 요한 세례자처럼 진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불의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기도와 신앙의 삶에서 예수님을 누구라 고백하는지, 우리의 말과 삶이 그분을 드러내고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5. 결론

요한 셰자는 마지막 예언자이며 첫 순교자 중 하나로서, “목소리”로서의 사명을 완수했다. 우리도 그 목소리를 이어받아, 세상에서 진리와 정의를 증거하고,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참 주님이요 구세주로 선포해야 할 것이다.

 

김건태 신부님_성요한 세례자의 수난

 

우리 가톨릭교회는 성인 축일을 통상 성인의 사망일, 곧 천상 탄일을 기념하여 지내기에, 오늘이 바로 요한 세례자의 축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요한 세례자 축일 하면 그가 태어난 날을 기념하여 대축일로 지내는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가톨릭교회 전례에서 성인들 가운데 탄생일을 축일로 지내는 경우가 성모님(98)과 요한 세례자(624) 두 분에게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구원의 역사 속에서 요한 세례자가 차지하는 자리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게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끔찍한 사건 하나가 소개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복음서에는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예외에 속하는 가장 대표적인 내용이 바로 오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하는 말씀으로 이야기가 시작되기는 하나, 요한의 죽음 이야기가 생생하게, 마치 목격자가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전하는 것처럼, 기술되고 있습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살아났구나할 정도로 세례자 요한의 권위와 존재는 대단했으며, 아울러 그의 죽음의 충격 또한 지대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의 처참한 죽음이 헤로디아의 앙심에서 촉발되었다 하더라도, 문제의 핵심 인물은 헤로데(안티파스: 우리 귀에 익숙한 헤로데가 아니라, 그의 아들)입니다. 헤로데는 분명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그의 말을 기꺼이 듣곤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호기롭게 내뱉은 말 한마디가 결국 자기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의롭고 거룩한 사람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 따라서 두려워하고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판단, 당황해하면서도 질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관용, 이 모든 인간적인 모습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경비병을 보내어 가져오라고 한 요한의 머리는 바로 자신의 인간성이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부정해 버렸으니, 남은 그의 인생은 살아도 죽은 인생, 영혼 없는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복음 속의 헤로데에 대해 말하면 말할수록, 또 다른 인물이 쉽게 떠오릅니다. 의롭고 거룩한 법정에서 죄가 없음을 분명히 알면서도, 대사제들에 의해 선동된 유다인 군중 앞에서 정작 자신은 책임이 없다는 표시로 손을 씻었다고 하지만(마태 27,24),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수용한 빌라도의 모습이 겹칩니다. 요한의 등장과 함께 메시아의 선구자로 다시 오리라는 예언자 엘리야의 귀환이 실현되었다면, 그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그대로 예시한, 그야말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예고한 사건이었습니다.

 

헤로데와 빌라도가 보여주었던 모습, 하느님 나라의 건설 도구인 정의와 진리와 평화를 박해하는 못난 행위는 나와 상관없는 모습들이 아닙니다. 사실 이러한 모습들은 악의보다는 무기력, 이기심, 비열한 침묵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남을 위해 나를 희생하느냐, 아니면 나를 위해 남을 희생시키느냐가 참 신앙인을 가름하는 판단 기준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남이 아니라 조금만이라도 나를 희생하여, 가족들은 물론 이웃들에게 행복과 평안을 누리도록 배려하는, 소중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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