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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Re:생활묵상 : 신앙과 항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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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형제님, 일단 먼저 제가 올린 글 다시 핵심적인 요지를 먼저 다시 한 번 더 정리해보겠습니다. 신앙이 항구하려면 먼저 신앙을 잘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제가 자기의 신앙이라는 표현을 했습니다만 여기서는 자신의 신앙 상태가 어떤지 그런 상태를 알아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신앙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지식이라는 것이 일차적인 의미입니다. 학문적인 지식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남들이 하는 모습 그대로 형식적인 면에 치우쳐서 하게 되면 형식적인 신앙으로 흘러가는 걸 경계하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신앙이 무엇인지를 설령 알았다고 해도 그때 신앙이라는 일반 지식을 자기에게 또 맞는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모든 게 일률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건 정말 필수적입니다. 어떤 학교가 있습니다. 장애를 가진 학생이 있습니다. 보통의 경우 모든 규정을 보통의 학생을 기준으로 해서 규칙이라는 게 설정됐을 겁니다. 이때 이 규정은 장애를 가진 학생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외 규정을 두거나 아니면 특별 조항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하느님을 잘 알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이것은 좀 더 하느님을 잘 알기 위해서 필요한 환경이라는 게 어쩌면 더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 몰라도 된다기보다는 알면 좀 더 하느님을 아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정도입니다. 신앙이 좋다는 건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 많다고 다시 말해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서 이런 의미입니다. 이런다고 해서 하느님을 잘 안다고 하는 건 거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신심을 바탕으로 해서 그 사람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신앙을 받아들이는가 하는 걸로 그 사람의 신앙이 견실한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척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촌부가 어쩌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강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례를 통해서 그럼 굳이 하느님을 잘 알지 못해도 하느님을 잘 사랑할 수 있는데 알려고 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예를 들고 싶습니다. 사람은 다 능력이 다릅니다. 손홍민 같은 선수랑 비교해서 나도 저 정도 열심히 하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손홍민 같은 선수가 될 거라는 생각과 같은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지식을 지식으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게 완전히 자기 것으로 체화가 되는 데에는 저마다 그 역량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저는 또 이 글이 자신의 신앙이 무너지는 것을 예측해서 이런 염려를 하고 경계를 하자는 게 아닙니다. 신앙에는 빌미를 주면 안 된다는 걸 경계하기 위한 목적이 저의 주된 의도입니다. 빌미는 절대 타협의 대상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의 경험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의 경험을 통해서도 뻐저리게 느낍니다. 비단 신앙이라는 것만 국한된 게 아니라 세상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뜻과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결과가 전개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그럴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신앙에 오점이 될 수 있을 소지가 있다면 이건 원천봉쇄를 하는 게 현명한 태도인 것 같습니다. 괜히 자신을 했다가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형국이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저의 묵상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입니다.
이제 형제님께서 주신 답글에 대한 보충적인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영어로 견해를 밝힌 부분에 대한 설명부터 제 의견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식은 하나의 지도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표현 공감합니다. 지도가 있다고 해서 좋은 여정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지 못한다는 뉘앙스를 전해주셨습니다. 좋은 표현을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좋은 여정을 할 수 없는 건 이유가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를 구체적으로는 상황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구체적인 설명을 하긴 어렵습니다.
가령 형제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지도상에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려준다고 해도 그 목적지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위치도 중요하지만 그 위치를 잘 찾아가기 위해서는 그 지도를 보고 등고선이라든지 나침반을 통해서 현제 어디에 자신이 위치해 있는지를 먼저 잘 알아야 목적지를 잘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런 독도법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면 지도가 있어도 무용지물이 될 것입니다. 신앙도 이와 같은 원리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무엇이라든지 강론이나 피정을 통해서 교육을 받는다고 해도 그게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시키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고민을 통해 그걸 잘 받아들여야 그게 진정으로 신앙의 삶을 사는 데 자양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고 수용된 피정이나 교육은 그냥 소화가 되지 않고 배설되는 것과 똑같을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6장 36절을 인용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형제님이 피력하신 내용은 우리가 더 깊이 고민해야 할 것은 얼마나 많이 아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믿음과 신앙,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련의 일들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지 않느냐는 것을 말씀하시는 취지로 저는 이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지식과 같은 속도로 항상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맞습니다. 부분부정을 사용해 말씀하셨습니다. 전형적으로 학교에서 배운 대로 해석을 하자면 항상 그렇지 않다고 했으니 그럴 경우도 있다는 말씀으로 해석을 해도 틀린 설명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님의 말씀도 틀린 말씀이 아닙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다만 저는 부연을 하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자면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게 상대적으로 더 유리한 것만은 절대적으로 맞다고는 설명을 할 수 없지만 상대적으로는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사실 원래 제가 이 묵상글을 올리면서 이 내용보다는 '감정과 신앙의 이성'이라는 주제로 글을 올리려고 했습니다. 이 내용은 사실 아주 난해한 내용이 될 것 같아 묵상 주제를 좀 더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선회를 했습니다.
신앙이나 이성으로 감정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성인의 반열에 오른 수준으로도 힘들 것입니다. 통제를 할 수 없다고 해서 신앙이나 이성이 감정에 굴복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감정에 넘어질 수는 있어도 그 감정에 계속 굴복이 된다면 문제가 있게 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 바로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이성이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고민을 하려고 해도 밑천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장사를 하려고 해도 종잣돈이 있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이 종자돈 역할을 하는 게 일종의 신앙에 관한 지식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이해를 한다면 좀 더 제가 말씀드린 의도를 잘 이해하실 거라 봅니다.
이제 형제님께서 한글로 답글 주신 부분에 대해 언급하겠습니다. 이미 제가 전달한 부분은 생략하겠습니다. 궁금한 점이 있다고 하신 부분입니다.
"왜 지식이 어느 정도 갖추어졌다고 해서 믿음과 신심이 반드시 그에 비례해서 깊어지는 것은 아닐까요?"
이 질문에 대해 먼저 형제님께서 말씀하신 이 질문이 국어적으로 호응이 조금 맞지 않는 문장이긴 하지만 보통의 경우 대개보면 표현력이 깔끔하신데 제가 이해를 완전히 하는 데 조금은 어려움이 있지만 문맥상 의도를 고민해봤습니다. 충분히 의도는 알겠습니다. 초반에도 언급을 했습니다만 절대적인 건 분명 아닙니다. 가령 배가 아플 경우를 보겠습니다. 단순히 소화장애로 배가 아파 복통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통이라는 게 소화장애로만 인해서 발생하는 건 아닙니다. 다른 여타 이유로 인해서 발생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보통의 사람은 그 이유를 잘 모릅니다.
하지만 소화기 전문 의사 같은 사람의 경우에는 의학적인 지식이 있기 때문에 더 정확한 진단을 할 수가 있을 겁니다. 병도 진단이 잘못되면 오진으로 인해 치료를 잘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런 예처럼 신앙도 마찬가지인 경우도 있습니다. 마치 의사가 진단을 내릴 수 있으려면 의학적인 지식이 있어야만 할 수 있듯이 신앙도 이런 경우에는 신앙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지식은 갖고 있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마지막에 언급하신 그 부분은 형제님 말씀 맞습니다. 믿음과 신심은 비례하지만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그 부분에 대한 언급을 하시면서 그게 '아는 것'과 실제 삶에서 '살아가는 것'의 차이라고 하셨는데 동의합니다.
여기서 좀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는 게 있습니다. 믿음과 신심은 깊이 들어가게 되면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이 차이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저는 평신도이기 때문에 신학적인 표현은 생략하겠습니다. 아주 어려운 부분입니다. 신심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행위나 모습을 통해서 판단을 하는 부분이 많지만 믿음도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믿음은 내적인 요소가 더 강한 면이 있습니다. 가령 하나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식사 전 기도를 아주 열심히 하는 신자가 있습니다. 이 신자는 식사 후 기도도 열심히 철저히 잘 하는 신자입니다. 이런 신자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이 사람의 신앙을 신앙이라는 눈을 통해서 보고 평가를 한다기보다는 판단을 해본다면 이 사람이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이런 외적인 모습이 교회에서 권장하는 행위를 열심히 하기 때문에 신심은 좋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걸 잘 하는 사람은 같은 조건이면 믿음도 좋다고 할 여지는 있겠지만 이런 기도생활을 잘 한다고 해도 신앙에 시련이 왔을 때 신앙이 흔들리고 안 흔들리고는 근원적으로는 신심의 행위에 의해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진 믿음 여하에 따라 흔들리고 안 흔들리고 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신앙이라는 틀 안에서 믿음과 신심이는 건 별개인 것도 아니지만 또 그렇다고 동일한 개념이 아닌 것입니다. 동전의 앞뒤와 같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의 추가적인 설명이 형제님께 얼마나 저의 이야기를 보충 설명해드리는 부분에서 좀 더 이해가 되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쪼록 조금이라도 이해를 하는 데 도움이 되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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