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8월 13일 (목)
(녹)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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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김건태 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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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09:54 ㅣ No.191172

이병우 신부님_<연중 제19주간 목요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

 

'하느님의 자비를 잊지 말자!!'

 

오늘 복음(마태18,21-19,1)은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는 말씀과 '매정한 종의 비유'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18,21)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

 

그리고 이어서 '매정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는 '만 탈렌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을 탕감해 주지 않은 것을 지적한 비유입니다. '1탈렌트가 6,000 데나리온'이니, 참으로 매정하기도 합니다. 그런 매정한 종을 두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18,32-33)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18,35)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파견하신 이유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구원의 문 안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허물이 많은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살아갑니다. 진정한 마음으로 주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자비 그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며, 이것이 바로 매순간 우리에게 쏟아지는 하느님의 큰 은총입니다. 우리는 이 은총에 힘입어 날마다 죽지 않고 살아갑니다. 마침내는 영원히 살게 됩니다.

 

성경에서 '일곱'은 '완전의 의미를 지닌 숫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 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일흔일곱의 의미'가 '진짜 살고 싶으면, 정말로 영원히 살고 싶으면 조건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하느님의 은총(자비)을 입은 사람들은 또한 너에게 하느님의 은총(자비)이 되어야 합니다. 나도 너에게 조건없는 용서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잊지 맙시다!

하느님의 자비를 망각하는 배은망덕한 자녀가 되지 맙시다!

 

"주님, 세상을 떠난 한기덕 베드로의 영혼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 이사47,15)

 

조욱현 신부_: 매정한 종의 비유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21절)라는 그의 질문은 이미 관대함을 전제로 하지만, 주님의 대답은 그 한계를 넘어선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22절)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용서가 무한하며, 따라서 제자들의 삶 또한 그 무한한 자비를 반영해야 함을 뜻한다. 루카 복음이 예수님의 족보를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77세대를 기록한 것(루카 3,23-38 참조)은 단순한 숫자의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모든 세대와 모든 인류에게 베푸신 보편적 용서를 의미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무한히 용서하라는 이 명령은 수의 한계를 넘어, 곧 사랑의 무한성을 가리킨다.”(Sermones 요약)라고 한다. 
 
비유에서 임금은 일만 탈렌트라는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해 준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무조건적 은총과 자비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 종은 자기 동료가 진 백 데나리온조차 용서하지 않는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해석한다. “하느님께서는 큰 빚을 탕감하셨건만, 우리는 작은 잘못도 용서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므로 우리 안의 무자비는 곧 하느님의 은총을 거부하는 행위이다.”(Hom. in Matth. 61 요약) 주인이 종을 다시 형벌에 넘긴 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받은 자비를 삶에서 드러내지 못한 자의 최종적 상실을 의미한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하실 것이다.”(35절) 용서는 내적 진심의 변화를 요구한다.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용서는 입술의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깊은 변화에서 비롯된다. 마음으로부터의 용서가 없으면, 하느님 앞에서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Commentarium in Matthaeum 요약) 
 
교회는 이 비유를 통해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본질적 표지가 ‘용서와 화해’임을 끊임없이 가르쳐 왔다. 교리서는 이렇게 밝힌다. “용서할 줄 아는 마음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는 데에 직접적인 조건이 된다.”(2840항) 즉, 우리가 형제를 용서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자비를 충만히 살 수 있으며, 하느님의 자녀라는 이름에 합당해진다. 
 

우리는 모두 ‘일만 탈렌트’를 빚진 자들이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 모든 빚을 탕감하셨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백 데나리온’에 불과한 이웃의 잘못을 기꺼이 용서하는 일이다. 성 베네딕토는 수도규칙에서 “서로 참아주고, 서로의 약점을 끝까지 견디어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길이다.”(Regula Benedicti, 72장 요약)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며, 우리 삶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의 증거가 된다.

 

김건태 신부님_용서해야 하는 것

어제 복음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공동체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숙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떠나려는 형제를 공동체로 다시 불러들이는 일, 형제를 얻는 일은 예수님의 가르침 이전에 교회공동체가 솔선수범해야 할 중대한 사명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또한 각기 구성원들이 모여 이루어진 공동체이므로, 구성원 상호간의 갈등과 알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원칙이 필요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용서해야 한다!

 

하늘 나라의 열쇠’, 다시 말해서 지상에서 맺고 푸는 권한을 부여받은 베드로가 입을 엽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물론,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선택된 이래, 늘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직접 듣고 보아 배운 덕에, 최소한 용서는 해야 하는 것임을 잘 인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만 용서의 정도 또는 한계가 궁금하여 여쭙니다. ‘형제를 얻는 일에 관한 교회의 공적인 직무를 맡게 될 베드로로서 궁금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충만을 상징하는 일곱이라는 숫자를 제안하지만, 예수님은 충만의 충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 일흔일곱이라는 숫자로 답하십니다. 그러니까 용서에는 끝이 없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형제를 얻는 일에서도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그 유명한, 그러나 마태오 복음에만 나오는, ‘종의 비유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10,000탈렌트 대() 100데나리온! 고대의 화폐 단위를 보면,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탈렌트는 그리스의 화폐 단위로서 1탈렌트는 6,000드라크마인데, 1드라크마는 로마의 화폐 단위로 환산하면 1데나리온으로서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부연하면, 예수님 당시에는 서로 다른 세 종류의 화폐가 사용되었습니다. (데나리온, 콰드란스 등) 로마의 화폐는 일반적으로 세금을 낼 때, (렙톤, 드라크마, 미나. 스타테르, 탈렌트 등) 그리스의 화폐는 상거래 때, 그리고 유다 화폐 세켈은 십일조나 헌금 등 종교와 관련하여 사용되었습니다(다시 한번 환전상이 필요했던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10,000탈렌트/100데나리온은 60,000,000(164) 품삯/100일 품삯이 됩니다. 비교가 거의 불가한 대조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 덕분에 살고 있음에도, 형제를 용서하는 데 인색한 우리의 속 좁은 인생을 개탄하고자, 예수님은 다소 과장된 수적 대비법을 인용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은 늘 우리에게 자비로우신 분으로 머무시기를 바라면서, 정작 이웃에게 너그럽지 못한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더욱, 하루에도 여러 번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하는 주님의 기도를 올리면서 죄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용서라는 화두를 마음에 담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좀 더 너그러운 모습으로 다가설 수 있는, 사랑 넘치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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