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8월 13일 (목)
(녹)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스크랩 인쇄

조재형 [umbrella] 쪽지 캡슐

2026-08-12 ㅣ No.191140

산책 중에 강의를 듣는 것이 저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며칠 전에는 4복음서에 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하는 기쁨이었습니다. 같은 예수님을 전하지만, 4복음서는 저마다 다른 빛으로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께서 유다인의 왕으로 오셨음을 전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예수님의 족보로 복음을 시작합니다. 왕에게는 나라가 있고, 백성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나라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백성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온유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에는 구약의 예언이 자주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예언을 완성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 “즉시라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하느님 나라는 먼 과거의 이야기도 아니고, 막연히 기다리는 미래의 사건도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하느님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은 긴 설명보다 예수님의 행동, 표징, 기적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루카 복음은 구원의 보편성을 전합니다.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 돌아온 아들의 비유는 하느님께서 잃어버린 이를 얼마나 애타게 찾으시는지 보여줍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와 자캐오의 이야기는 구원이 유다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음을 알려줍니다. 루카 복음의 하느님은 죄인과 가난한 이, 병든 이와 소외된 이를 먼저 찾아가시는 자비의 하느님입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라고 선포합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문이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단순히 위대한 스승이나 예언자를 넘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이렇듯 4 복음서는 하나의 보물을 네 방향에서 비추는 빛과 같습니다. 그 보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의 밭에서 또 하나의 보물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라는 보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용서는 계산이 아닙니다. 횟수를 세는 용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닮아 가는 삶의 태도입니다.

 

은을 제련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숙련된 제련사는 용광로 위의 은을 유심히 바라본다고 합니다. 은이 불 속에서 녹아 불순물이 빠져나가면, 어느 순간 은의 표면이 거울처럼 맑아진다고 합니다. 그때 제련사의 얼굴이 은 위에 비치면, 제련사는 불을 끈다고 합니다. 은이 온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제련사가 은을 끝까지 지켜본다는 것입니다. 너무 일찍 불을 끄면 불순물이 남고, 너무 늦게 두면 은이 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숙련된 제련사처럼 우리의 마음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분노, 원망, 불신, 미움, 욕망이라는 불순물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빠져나가면 마음은 호수처럼 맑아집니다. 그리고 그 맑은 마음 안에 하느님의 얼굴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용서는 바로 그때 시작됩니다. 마음이 맑아지면 굳이 용서를 말하지 않아도, 용서가 주는 자유와 기쁨을 알게 됩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심고,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심고,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심고,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전하게 됩니다.

 

영어로 용서는 “Forgive”입니다. 이 말을 묵상해 보면 위하여 준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용서하는 것일까요? 첫째, 용서는 나를 위하여 주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가장 실질적인 이유일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분노와 원망을 품고 있으면 가장 먼저 상처받는 사람은 나 자신입니다. 상대방은 잊고 살아가는데, 나는 그 일을 붙잡고 밤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마음 안에 미움을 품으면 몸도 마음도 병들게 됩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있다는 화병도 어쩌면 풀지 못한 원망, 내려놓지 못한 미움에서 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용서는 상대방에게 주는 선물이기 전에, 나 자신에게 주는 자유입니다. 용서하면 내가 먼저 평화를 얻습니다.

 

둘째, 용서는 상대방을 위하여 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그것을 수오지심이라고 했습니다. 잘못 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많은 사람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마음 깊은 곳에 무거운 짐을 안고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음식을 먹어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용서받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백성사는 그런 사람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선포하는 은총의 자리입니다. “너는 용서받았다.” 이 한마디가 사람을 다시 살게 합니다. 셋째, 용서는 하느님을 위하여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넘어져도, 진심으로 뉘우치면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도 당신을 못 박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면,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하느님의 더 큰 자비 안에 머물게 됩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이 용서하지 못해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또 많은 사람이 용서받지 못해서 마음의 감옥에 갇혀 살아갑니다. 용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눈물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용서는 말씀의 밭에 숨겨진 보물입니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미움의 감옥에서 나와 자유를 얻습니다. 원망의 어둠에서 나와 평화를 얻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얼굴이 비치는 맑은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말씀의 밭에서 우리는 용서라는 보물을 발견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용서하셨으니, 우리도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내가 용서함으로써 내가 자유로워지고, 상대방이 다시 살아나고, 하느님의 자비가 이 세상에 드러나기를 청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27 2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