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8월 9일 (일)
(녹) 연중 제19주일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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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승수 신부님 [연 중 제19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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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cornelia2] 쪽지 캡슐

13:55 ㅣ No.191091

[연중 제19주일 가해] 마태 14,22-33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사회적 활동을 회피하고 주로 집이나 자기 방에 머물면서 타인과의 관계가 단절된 채 살아가는 이들을 ‘은둔형 외톨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 중에도 꽤 많은 친구들이 이런 모습으로 지내고 있지요. 그들이 집 밖 세상으로 나오지 않고 스스로를 가둔 채 홀로 지내는 것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피해와 상처를 준 ‘사람’이 두렵고, 적응해서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이 두렵습니다. 그런 식으로 두려움이 커져 가다 결국은 자기 자신마저 두려워하게 됩니다. 자신이 사람들과 제대로 관계를 맺고 세상 속에서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가 너무나 걱정스럽다못해 두려워지기까지 하는 겁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두려움 속에 숨어 살 수는 없겠지요. 참된 행복을 누리며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두려움 자체가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것이기에 그것을 극복할 해결책도 마음 속에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고 이끌어주시는 분을 굳게 믿으면 그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의 제자들이 그분께 대한 참된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일으키신 후에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십니다. 제자들을 굳이 ‘재촉’까지 해가며 먼저 보내신 것은 당신께서 ‘빵의 기적’을 보여주신 의미를 그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저 육체적인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왕으로 삼으려 드는 군중들의 분위기에 휩쓸린다면, 제자들이 잘못된 메시아관, 더 나아가 잘못된 신앙관을 지닐 수 있었기에 그런 상황을 막고자 하신 겁니다. 배는 항구에 메여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평화롭습니다. 그러나 배는 험난한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요. 주님께 대한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그저 내 마음에 아무런 동요도 일어나지 않는 안전하고 잔잔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며 이 세상에서 저 세상, 곧 하느님 나라로 건너가기 위해 하는 것이지요. 그 과정에서 고통과 시련이라는 ‘맞바람’이 나의 항해를 가로막을 것입니다. 나의 삶이라는 배가 이대로 죽음의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나를 덮쳐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주님께서 나에게 오시어 나를 구해주실 것입니다. 바로 그 점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주님은 제자들을 먼저 호수로 보내신 것이지요.

 

제자들이 호수 한가운데에서 파도에 시달리며 고생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물 위를 걸어’ 그들 곁으로 가십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방식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신 겁니다. 당신이 물에 빠지고 휘둘리는 나약한 인간이 아니라, 물을 다스리고 복종시키는 ‘참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참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지켜주시고 보살펴주심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런 주님의 모습을 보고 또 다른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사람은 원래 자기가 알지 못하는 ‘무지’의 존재, 자기가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초월하는 ‘미지’의 존재에게 두려움을 갖는 법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당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십니다. ‘나다’라는 말을 통해 당신이 제자들과 오랜 시간 동고동락해온 ‘스승’이심을, 동시에 그들을 지키고 보살피시는 ‘주님’이심을 분명히 알려 주십니다. 그런 당신께서 함께 하시며 힘을 주실테니 용기를 내어 두려움을 극복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해서 두려움과 불안에 자동으로 면역이 생기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으며 고백하는 이들은 불안과 두려움 앞에서 절망하지 않을 수 있지요. 주님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믿으며 따르다보면 두려움을 제대로 마주할 ‘용기’와, 그것을 극복할 ‘지혜’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할 참된 믿음을 지니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오셔서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실 때까지 마냥 앉아서 기다기리만 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을 만나뵙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그분 뜻을 실천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내가 적극성을 띠고 노력하는 만큼 주님와 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그분과의 일치가 더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잘 알았던 베드로는 주님을 눈 앞에 두고 그저 배 안에 가만히 안주하기보다, 그분을 더 빨리 만나기 위해 그분께 다가가는 쪽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기 선택이 그저 개인적인 바람에 따른 것이 아니라, 주님 뜻에 합당한 것이 되기를 바랐지요. 그래서 주님께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는, 다소 무모해보이는 청을 드립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부르시자 용기를 내어 호수를 향해 발을 뻗었고, 주님만 바라보며 그분을 향해 몇 걸음을 내딛습니다. 여기까지는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참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이라는 게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지요. 중간에 몰아친 거센 바람이 주님만 바라보던 베드로의 시선을 빼앗았고, 그러자 극복한 줄 알았던 두려움에 다시 사로잡혀 속절없이 물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수없이 되풀이하는 잘못입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베드로가 주님께 구해주시기를 청하자, 주님께서 그의 손을 붙잡고 절망의 물 속에서 건져 주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이는 베드로의 약한 믿음을 책망하시는 게 아닙니다. 왜 당신을 의심했느냐고 혼내시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을 극복하게 만드는 참된 믿음은 그분을 의심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됨을 알려주시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의심하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마음이 둘로 갈라지다’라는 뜻입니다. 즉 의심이란 주님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둘로 갈라져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겁니다. 베드로가 처음에 주님만 바라보았을 땐 물 위를 걸어 그분께 나아갈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다른 것들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온전히 주님만 바라보며 그분 뜻을 따른다면 우리를 옭아매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마음 속에 걱정과 두려움이 밀려오면 정신을 온전히 집중하여 주님만 ‘응시’해야겠습니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야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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