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31일 (금)
(백)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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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 默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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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6-07-30 ㅣ No.190885

새 율법학자_김건태 신부님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 13장의 핵심 주제인 하늘 나라에 관한 마지막 비유와 함께 모든 비유를 끝맺는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그물 비유에서, 앞선 다른 비유에서처럼, 하느님은 판단하시거나 단죄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보시고 아실 뿐입니다. 격리 또는 구별은 하느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좋은 결실과 가라지 비유에서, 이 둘 사이의 구별은 밭 주인이 개입하기 이전에 이미 확인된 상태였습니다. 오늘 비유에서도, 그물에 가득 찬 온갖 종류의 물고기 가운데 좋은 것들나쁜 것들은 이미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판단에 따라,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이 나뉜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렇게 평가되었고, 그렇게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그물 비유의 마지막 부분 곧 세상 종말에 관한 언급에서도, ‘의인들로부터 가려내진 악인들은 하느님의 단죄 결과가 아닙니다. 사람이 하느님이 주신 최대의 선물인 자유 의지에 따라 살아온 결과일 뿐입니다. 물신의 노예가 되어 살아온 결과입니다. 따라서 모든 책임은 사람에게, 전적으로 사람에게 있습니다.

부연하자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하는 표현 속에서도, 단죄와 응벌보다는 다가올 현실 경고에 무게가 실려 있음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하실”(루카 15,7) 분이기 때문입니다.

 

비유 말씀을 마치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이것들을 깨달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다소의 혼란스러움을 줄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제기될 수 있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았다면, 왜 깨달은 대로 행동하지 않았는지, 깨닫지 못했다면,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을 왜 말하지 않았는지 하는 질문이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깨닫는 일입니다. 우리의 행동과 자세를 정당화하거나 단죄하는 일이 바로 깨달음의 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의 힘찬 대답 !는 그들을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율법 학자로 격상시키는 대답입니다. 이 새 율법 학자들은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문맥상, ‘옛것이란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역사를 지배했던 주된 주제인 하느님 나라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며, 새것이란 예수님의 오심과 그분의 가르침으로 완성된 하느님 나라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개념은 동일하지만, 하나가 시작과 펼침의 단계에 있는 나라라면(구약성경), 다른 하나는 완성 단계의 나라를 말합니다(신약성경). 이처럼 하느님 나라에 관한 전승은 늘 살아 있는 전승이지만, 진정한 새로움에 이를 수 있는 깊이 있는 깨달음을 통해서, 나아가 보다 완벽한 실현을 통해서 계승되어야 하는 전승을 말합니다.

 

언젠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계신 나라로 쉽고 간결하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하느님이 계시면, 그 마음이 바로 하느님 나라인 것입니다. 내 마음이 늘 하느님을 모실 수 있도록, 그리하여 여기서 이미 좋은 것들로 평가되고 의인들로 살아갈 수 있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다시금 우리 마음에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삶을 다짐하고 실천하는 하루, 밖으로 던져짐으로써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려서는 안 되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어올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바다에 던진 그물에 비유하신다.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47절) 그물은 교회, 즉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물 안에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섞여 있다. 이는 교회 안에 완전한 성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회개하며 신앙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교회 안에서는 모두가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며,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했더라도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성장할 수 있다.”(Enarrationes in Psalmos 44 요약)라고 가르친다. 
 
세상이라는 바다는 혼란과 유혹, 세속적 가치가 뒤섞인 현실 세계를 상징한다. 그물은 복음과 사도들의 말씀으로 만들어져, 하느님께서 세상 속 사람들을 끌어들이시고 참 빛 속으로 인도하시는 은총의 도구이다. 종말의 날, 하느님께서 천사들을 보내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시듯이, 현재의 삶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마음과 삶을 점검하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에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52절) 여기서 옛것은 구약 성경의 지혜와 전통을 의미하고, 새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하늘 나라의 진리를 뜻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참된 제자는 과거의 가르침과 현재의 은총을 연결하여, 자신과 다른 이들의 삶 속에서 하느님 말씀을 살아 있게 해야 한다.”(Homiliae in Matthaeum 제자직 요약)라고 강조한다. 교회의 가르침 역시 전통과 계시를 함께 이해하고, 복음을 실천 속에서 드러내는 삶을 통해 신앙의 깊이를 더할 것을 요청한다 
 
우리 각자는 교회의 한 부분이며, 완벽하지 않더라도 성장하고 회개하는 과정을 거친다. 타인을 쉽게 판단하거나 배척하기보다는 나 자신이 그물 속에서 좋은 고기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세상의 유혹과 혼란 속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에 민감하며, 은총을 통해 스스로 변화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는 개인적 성화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된다. 우리의 신앙은 과거의 성경적 가르침과 현재의 복음 체험을 연결하여 실천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교리서나 성인들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 내용을 현대 삶 속에서 적용하며, 다른 이들에게 나누는 것이 바로 “곳간에서 새것과 옛것을 꺼내는” 삶이다. 
 

하늘 나라의 그물 안에는 온갖 고기가 있듯이, 우리 삶에도 완벽함과 부족함, 성실함과 연약함이 함께 존재한다. 우리가 할 일은 그물 속에서 의인으로 성장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삶 속에서 새로운 은총과 전통의 지혜를 꺼내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하늘 나라의 기쁨을 맛보고, 교회와 세상을 빛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이병우 신부님_"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마태13,51ㄱ)


'마지막 때에 기뻐 즐거워 하자!!'


오늘 복음(마태13,47-53)은 '그물의 비유와 비유를 끝맺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구원을 위한 활동인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던지신 첫 말씀은 이렇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예수님에 의해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모습,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길을 여러 비유를 통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이 전하는 그 비유는 '일곱 개'입니다. 곧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보물의 비유', '진주 상인의 비유', '그물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개의 비유를 다 말씀하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예!" 하고 대답합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도 지난 농민주일(7.19)부터 오늘까지 이 비유를 다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우리도 제자들처럼 "예, 주님!" 하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물의 비유'는 '종말의 비유'입니다.

곧 죽음 저 너머에서 맞이하게 될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부류의 사람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자매인 죽음이여! 어서 오세요."라고 말하면서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인 것처럼,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부류입니다.

또 한 부류는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죽음을 거부하는 부류입니다.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류입니다.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 안에 있다."(예레18,6ㄷ)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의인으로 살거나 악인의 모습으로 살거나 우리는 하느님의 손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에게 시작과 마침, 생명과 죽음을 주신 것도 하느님이십니다.


내 뜻대로 살지 말고,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뜻을 찾고, 이 뜻에 순종하려고 애쓰면서 살아가는 하느님의 사랑스런 자녀들이 됩시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 기뻐 즐거워 합시다!


(~ 집회7,36)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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