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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5주간 금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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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 작가의 ‘세종의 나라’를 읽었습니다. 저는 김진명 작가의 작품을 좋아합니다. 이야기가 재미있고, 상상력을 키워 주고,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워 주기 때문입니다. ‘세종의 나라’에는 두 개의 축이 있습니다. 하나는 명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조정의 관료들, 양반들,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명분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 명분의 기준은 명나라였고, 중국의 고전인 사서삼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명분 안에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곧 애민과 애족이 설 자리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 명분 안에는 양반의 자리, 기득권의 자리, 지배하는 사람들의 자리가 컸습니다. 다른 하나는 실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세종 대왕과 세종 대왕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은 실리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실리의 기준은 관찰이었습니다. 백성이 어떻게 사는지, 무엇 때문에 고통받는지, 무엇이 백성에게 필요한지를 살피는 것이었습니다. 실리에는 신분의 높고 낮음이 없었습니다. 실리에는 남녀노소의 차별도 없었습니다. 하늘의 태양이 모든 이에게 고루 비추듯이, 우리가 숨 쉬는 공기가 모든 이에게 무상으로 주어지듯이, 참된 실리는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세종 대왕은 그런 나라를 꿈꾸었습니다. 그래서 훈민정음이 탄생했습니다. 글이 지배하고 다스리는 도구가 아니라, 백성의 생각과 뜻을 드러내는 자유와 공정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은 제자들 때문에 바리사이들의 비난을 받으십니다. 바리사이들은 명분을 이야기했습니다. 안식일에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의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명분 안에 빠져 있던 더 큰 뜻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예수님께서 꿈꾸신 하느님 나라는 율법이 사람을 억압하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사람이 율법의 노예가 되는 나라가 아니라, 율법을 통하여 사람이 살아나고, 자비를 통하여 사람이 회복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주권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주권은 힘으로 누르는 방식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주권은 자비로 살리는 방식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죄인을 단죄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죄인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은 사람을 밀어내는 거룩함이 아니라, 병든 사람을 고치고, 굶주린 사람을 먹이고, 소외된 사람을 다시 공동체 안으로 불러들이는 거룩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과 함께 식사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안식일에도 고쳐 주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명분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희생시키는 나라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명분의 참뜻을 새롭게 밝혀 주는 나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히즈키야 임금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생명을 연장해 주십니다. 그리고 해시계의 그림자를 열 칸 뒤로 돌리시는 표징을 보여 주십니다. 이는 단순히 자연의 질서를 바꾸신 기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람에게 다시 생명의 시간을 허락하시는 분이심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정해진 명분과 질서 안에 사람을 가두시는 분이 아니라, 자비로 사람을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독서와 복음은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차가운 명분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자비입니다. 세종 대왕이 백성을 위하여 훈민정음을 만들었듯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잘 아는 사람들, 성전에 가까운 사람들, 정결하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죄인이라고 손가락질받던 사람, 여인과 어린이, 이방인에게까지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세종의 문자가 백성에게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면, 예수님의 복음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교회도 이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명분만을 앞세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규칙이라는 이름으로, 체면이라는 이름으로, 혹시 누군가를 아프게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물론 전통과 규칙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전통과 규칙의 목적은 사람을 살리고 공동체를 세우는 데 있습니다. 신앙의 명분이 자비를 잃어버리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무거운 짐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비가 있는 신앙은 사람을 살리고, 공동체를 회복시키며,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드러냅니다. 성체성사는 바로 그 하느님 나라의 표징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리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지배의 언어가 아니라 봉사의 언어입니다. 권위의 언어가 아니라 사랑의 언어입니다. 명분의 언어가 아니라 자비의 언어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모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자비를 내 안에 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비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꿈꾸신 하느님 나라는 멀리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굶주린 이에게 밥을 나누어 줄 때, 상처받은 이를 따뜻하게 맞아 줄 때, 규칙보다 사람을 먼저 바라볼 때, 판단보다 자비를 먼저 선택할 때, 그곳에 하느님 나라가 시작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명분을 버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명분의 참뜻을 자비 안에서 완성하는 나라입니다. 율법을 없애는 나라가 아닙니다. 율법을 사랑 안에서 완성하는 나라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가정이 자비의 자리가 되고, 우리의 본당 공동체가 사람을 살리는 공동체가 되며, 우리의 신앙이 누군가에게 무거운 짐이 아니라 복음의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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