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12일 (일)
(녹) 연중 제15주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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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5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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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umbrella] 쪽지 캡슐

09:39 ㅣ No.190571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발견하기를 읽고 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 수련을 중심으로 다양한 기도의 방법을 전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그리스도교의 영성에는 두 개의 전승이 두 줄기 강물처럼 흐르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아포파틱(apophatic)’이고 다른 하나는 카타파틱(kataphatic)’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아포파틱을 이야기하고 내일은 카타파틱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아포파틱은 부정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말과 생각으로는 하느님을 온전히 규정할 수 없다는 겸손한 고백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도 믿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의 언어와 개념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바닷물을 손바닥에 담을 수 없듯이, 무한하신 하느님을 유한한 인간의 생각 안에 모두 담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포파틱 영성은 하느님 앞에서 말을 많이 하기보다 침묵하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하느님을 붙잡으려 하기보다 하느님께 붙잡히는 길을 가르쳐 줍니다.

 

성경 안에서도 아포파틱의 전통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는 있는 나다.”라고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셨지만, 그 이름조차 인간이 하느님을 소유하거나 통제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엘리야 예언자도 하느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거센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 속에 계시지 않고,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운데 엘리야에게 다가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예상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의 삶 안에서도 아포파틱의 길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뜻보다 깊고 크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아포파틱 영성의 깊은 자리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느님을 움직이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 수 없는 하느님의 뜻 앞에 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외치셨습니다. 그 외침은 하느님의 침묵을 경험하는 인간의 가장 깊은 고통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바로 그 침묵 속에서 구원의 신비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아포파틱 기도는 기도가 응답 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를 지켜 줍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해도 하느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병이 낫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억울한 일이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쉽게 실망하고 원망합니다. “하느님께서 정말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실까?” 하고 묻게 됩니다. 그러나 아포파틱 영성은 말합니다. 하느님의 침묵이 하느님의 부재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신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도 일하고 계십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위대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에 대하여 방대한 신학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나 생애 말년에 깊은 신비 체험을 한 뒤, 자신이 쓴 모든 것이 지푸라기처럼 보인다.”라고 고백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신학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말과 이성이 아무 의미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하느님의 신비가 인간의 모든 언어와 사유보다 훨씬 크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말할 수 있지만, 하느님을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지만, 하느님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지만, 하느님을 내 생각 안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무지의 구름의 전통도 같은 길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에는 지식의 구름이 아니라 무지의 구름이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완전히 이해해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때로 이해보다 깊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다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하듯이, 우리가 하느님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모든 답을 아는 것이 아니라, 답을 알 수 없는 순간에도 하느님께 머무르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내 뜻을 관철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앞에서 내 마음을 비우는 여정입니다.

 

아포파틱 기도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검색하면 답을 얻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인공 지능에게 물으면 즉시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검색 결과처럼 붙잡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입력한 질문에 즉시 답을 출력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신비이십니다. 하느님은 인격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관계에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침묵이 필요합니다. 비움이 필요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순간에도 신뢰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아포파틱 기도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고백하게 합니다.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깨닫게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언제나 하느님의 뜻은 아닐 수 있음을 받아들이게 합니다. 기도 중에 아무 느낌이 없어도, 하느님께서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져도, 그것이 실패한 기도는 아닙니다. 때로 하느님께서는 위로보다 침묵으로 우리를 정화하십니다. 감동보다 기다림으로 우리를 성숙하게 하십니다. 응답보다 신뢰로 우리를 깊어지게 하십니다. 아포파틱 기도는 바로 그 침묵의 자리에서 하느님께 머무르는 길입니다. 아포파틱은 하느님의 존재를 알기는 하지만 하느님의 모습을 온전히 알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코끼리를 온전히 알 수 없듯이,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느님을 온전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합니다. 다만 하느님의 모습이 아닌 것은 알 수 있으며,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자비를 느낄 수는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을 느끼지만, 하느님을 직접 볼 수는 없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만 알 뿐,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보다는 어떤 모습이 하느님이 아니신가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합니다. 기도 중에 하느님과 직접 통하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고 원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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