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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5일_ 전삼용 신부님_양승국 신부님_이영근 신부님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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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7월 5일 몸이 불편한 점과 제속회 일정으로 신부님들 묵상글을 못 올려 죄송합니다. 늦었지만 ..
전삼용 신부님_충전하는 시간, 소진하는 시간
찬미 예수님. 오늘 우리는 이 땅의 첫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기립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조금은 사적인 고백으로 강론을 시작하려 합니다. 저는 얼마 전 안식년에 들어갔고, 그 보름을 지내며 한 가지를 깊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소진시키는 시간과, 나를 충전시키는 시간입니다. 오늘 김대건 신부님의 삶이 바로 이 두 시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밭에도 안식년이 있습니다 먼저 밭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상한 명령을 하나 내리셨습니다. "여섯 해 동안 밭에 씨를 뿌리고 소출을 거두어라. 그러나 일곱째 해에는 땅을 놀리고 묵혀 두어라."(탈출 23,10-11 참조)
일곱째 해에는 씨도 뿌리지 말고 밭을 통째로 쉬게 하라는 것입니다. 농부의 상식으로 보면 미친 소리입니다. 일 년을 통째로 노는데 무엇을 먹고 살라는 말입니까. 그러나 여기에 창조주의 지혜가 숨어 있습니다. 땅은 쉬지 않고 소출만 뽑아내면 반드시 메마릅니다. 지력이 고갈되어,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은 텅 빈 흙이 됩니다. 실제로 현대 농학이 이를 증명합니다.
같은 밭에 같은 작물을 쉼 없이 심으면 수확이 해마다 줄어드는데, 이를 연작 장해라 부릅니다. 반대로 한 철 밭을 묵히거나 콩과 식물을 심어 쉬게 하면, 흙 속에 질소가 다시 채워지고 미생물이 살아나 이듬해 수확이 도리어 늘어납니다. 쉬는 것이 게으름이 아니라 다음 열매를 위한 투자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강론의 열쇠를 얻습니다. 열매를 맺는 것은 소진입니다. 밭이 자기 안의 양분을 내어 주어 곡식을 맺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소진이 계속되려면 반드시 충전이 있어야 합니다. 안식년이란, 소출을 멈추고 땅 자체를 비옥하게 채우는 시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밭에게도 이 충전의 시간을 명령하셨습니다. 하물며 사람에게, 사제에게, 영혼에게 이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저의 이야기를 조금 더 솔직하게 나누겠습니다.
안식년에 들어와서도 저는 처음에 매일 강론을 써서 올렸습니다. 신자분들이 원하시니, 숙소에 있는 동안이라도 계속 말씀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보름을 그렇게 지내고 나니 문득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것 역시 소진하는 시간이 아닌가. 강론이란 결국 내 안에 있는 것을 꺼내어 내보내는 일입니다. 밭이 곡식을 내놓듯, 내 안의 양분을 퍼내는 일입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안식년까지 이렇게 퍼내기만 한다면, 저는 안식년을 안식년으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밭을 쉬게 하라는 그 명령을 저 혼자 어기는 셈입니다.
그래서 저는 방향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이제부터 이 안식년 동안은 내보내는 강론이 아니라, 모아들이는 성경 통독을 하려 합니다. 올해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마카베오기 하권까지, 구약의 역사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하며 짧은 해설을 붙여 올릴 생각입니다.
하루에 세 장씩 천천히 읽어 나가려 합니다. 속도가 붙으면 구약 전체로, 나아가 신약까지도 욕심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 통독을 올리는 것도 겉으로는 무언가를 내보내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강론은 내가 이미 가진 것을 꺼내는 일이지만, 통독은 내가 새로 받아들이며 그 넘치는 것을 나누는 일입니다. 앞엣것은 내 곳간을 비우고, 뒤엣것은 내 곳간을 채우면서 그 채워지는 향기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공부는 남에게 무언가를 주는 동시에,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거름을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한 해, 강론을 쉬려 합니다. 이 충전의 시간을 오롯이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원하시는 분들은 매일 이 성경 통독 해설을 함께 들으셔도 좋을 것입니다. 어쩌면 잘 다듬은 강론 한 편보다, 날것 그대로의 말씀을 함께 씹어 삼키는 그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더 깊은 거름이 될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 결심을 하면서 바로 오늘의 주인공, 김대건 신부님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놓였습니다. 그분의 삶이야말로 이 축적과 소진의 신비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김대건 신부님을 '한국 최초의 사제'로만 기억합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숫자만 보면 뜻밖의 사실과 마주칩니다. 그분이 사제로 사신 시간은 겨우 일 년 남짓이었습니다. 1845년 8월에 사제가 되어, 1846년 9월에 순교하셨으니 말입니다. 신학생으로 뽑혀 마카오로 떠난 것이 1836년, 열다섯 살 때였습니다. 그러니 사제가 되기까지 약 십 년을 준비하고, 정작 사제로 일한 것은 단 일 년입니다. 십 년을 쌓아 일 년을 쓰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이 듭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그토록 아까운 분을 이렇게 일찍 데려가셨을까. 십 년을 공들여 길러 낸 사제를 겨우 일 년 쓰시다니, 이보다 비효율적인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토록 한국인 사제를 목말라하던 교우들을 생각하면, 십 년, 이십 년을 더 사목하셨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이 의문 앞에서 도리어 오늘 강론의 진실을 확인합니다. 그분의 그 십 년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십시오. 열다섯 소년이 압록강을 건너 만주와 요동을 지나, 무려 구천리 길을 걸어 마카오에 이르렀습니다. 낯선 라틴어와 프랑스어와 신학과 철학을 밑바닥부터 익혔습니다. 마카오에 민란이 일자 필리핀으로 피난을 갔고, 병약한 몸으로 온갖 질병과 싸웠습니다. 함께 떠난 동무 최방제는 열여섯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국에서는 기해박해가 터져 아버지와 스승과 주교가 순교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사제가 되어 돌아올 때는 상해에서 배를 타고 오다 서해에서 풍랑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러고도 그분은 선교사들이 들어올 뱃길을 뚫으려 지도를 그리고 바닷길을 살피다 붙잡히셨습니다. 보십시오. 이 십 년은 허비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이 십 년이야말로 밭을 비옥하게 채운 충전의 시간이었습니다. 걸음마다, 피난마다, 죽을 고비마다, 그분의 영혼에는 무언가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습니다. 믿음이 쌓이고, 인내가 쌓이고,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쌓였습니다. 그렇게 십 년을 응축한 영혼이었기에, 그분은 단 일 년의 사목에서, 아니 마지막 순교의 그 한순간에서, 백 년 사목보다 더 큰 열매를 맺으실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한 해, 강론을 멈추고 말씀으로 저를 채우려 합니다. 이것은 물러섬이 아니라, 더 큰 열매를 위한 휴경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십 년을 채워 일 년을 위대하게 사셨듯이, 안토니오가 이십 년을 채워 사막에서 걸어 나왔듯이, 베네딕토가 숨은 삼 년으로 유럽을 바꾸었듯이, 저도 이 한 해를 채워 남은 사목을 더 비옥하게 살고 싶습니다. 성냥이 인화물질을 머금듯, 저도 이 안식년에 하느님의 말씀을 가득 머금어, 언젠가 다시 강단에 설 때 여러분의 촛불에 더 뜨거운 불을 옮겨붙이고 싶습니다.
소진하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다만 충전하는 시간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하느님 앞에서 낭비되는 축적이란 없습니다. 걸어온 모든 길, 견뎌 낸 모든 고비, 조용히 채운 모든 시간이, 언젠가 단 한 순간에 위대한 열매로 타오를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그러하셨듯, 우리도 그러할 것입니다.
양승국 신부님_이제 곧 영원한 생명이 제 안에서 시작되려고 합니다!
수도회 입회하기 전에 직장생활을 좀 했었습니다. 그때 마침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시성식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주례로 여의도에서 개최되었고, 전국에서 모인 수십만 인파 속에 저도 들어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때 받은 감동이 저를 수도 성소로 이끌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꽤 웃기는데, 그때 당시 여의도 시성식을 마치고 제가 살던 거제도로 돌아가는 길에 제 마음이 어땠는지 아십니까? 정말이지 순교 영성으로 활활 불타올랐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저는 기회만 닿으면 순교해야지 하면서 계속 어디 순교할 기회가 없나?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녔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순교할 기회는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습니다. 당장이라도 순교를 하려고 했지만, 시대가 저를 받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한 가지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꼭 피를 흘려야만 순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입니다. 신유박해나 기해박해가 없는 지금 이 시대 하느님께서 제게 바라시는 순교는 피를 흘리는 적색 순교가 아니라, 매일의 고통과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가는 백색 순교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순교는 한 그리스도인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은총입니다. 순교는 작고 나약한 한 인간이 크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과 온전히 합일하는 축복입니다. 순교는 보잘것없는 인간 존재이지만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은혜로운 사건입니다.
순교는 인간의 극점이 하느님임을 엄숙이 선포하는 신앙고백입니다. 결국 순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완벽히 모방하는 일, 완전한 그분의 제자로 거듭나는 일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신앙은 얼마나 확고했는지 주변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랄 지경이었습니다. 스물다섯, 참으로 꽃다운 나이이며 아까운 나이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요즘 스물 다섯은 아직도 제대로 서지도, 아직 제 앞가림도 하기 힘든 나이입니다. 그런데 스물다섯의 신부님께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직전, 남기신 말씀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그의 부활 신앙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제게 이런 형벌을 주신 관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관장님께서 제게 내리시는 이 형벌을 통해서 저는 더욱 하느님 사랑을 느낍니다. 우리 하느님께서 관장 나리를 더 높은 관직에 올려주시기를 빕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저는 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위한 죽음이기에 절대로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이제 곧 영원한 생명이 제 안에서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 행복해지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하느님을 굳게 믿으십시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비롯한 수많은 한국 순교자들의 피가 우리 안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놀랍고도 위대한 순교 영성이 우리 한국 교회 역사 안에 자리 잡고 있음에 큰 자부심을 지녀야겠습니다.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영예로운 순교 영성을 오늘 내 삶의 자리에서 실천해야겠습니다.
오늘 이 시대, 내 삶 안에서 순교자로 살아가야겠습니다. 이 시대 순교는 죽을 각오로 현실의 고통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순교는 적당히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죽기 살기로, 목숨 걸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순교는 순교자의 마음으로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 시대 순교는 일상의 비루함과 나 자신의 한계와 작은 고민거리들을 기쁜 마음으로 수용하는 일입니다. 이 시대 순교는 매일의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더없이 환한 얼굴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이영근 신부님_<자신의 생각과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향하여 나아가는 일>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귀중한 선물을 주십니다.
그 어떤 어려움에서도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선물입니다.
그것은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내 이름 때문에”(마태 10,22) 발생됩니다.
곧 성인께서는 살아있을 이유도, 핍박을 받고 고통을 받을 이유도, 죽을 이유도, 오직 예수님 때문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성인께서는 하느님을 '임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성인께서는 ‘임자’를, 오로지 한 분 주인님으로 섬기고 사랑하셨습니다.
오롯한 한 마음으로 ‘임자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 모진 핍박과 수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사랑으로 기뻐하고 감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으로써 그 사랑을 증거하셨습니다. 이러한 그분의 사랑은 옥중 편지에서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관장께서 내가 천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형벌을 당하게 해주시니, 관장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 천주님이 이런 은공을 갚고자 당신을 더 높은 관직에 올려주기를 바랍니다.”
성인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고문을 달게 그리고 기쁘게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당신을 고문하는 관장에게 감사를 드렸으며, 나아가 오히려 그를 더 높은 관직에 올려달라고까지 기도하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랑입니다. 이 유쾌함, 이 놀라운 사랑!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오히려 자신을 못 박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듯이, 스테파노가 죽어가면서도 자신에게 돌팔매질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듯이, 성인께서는 매질하는 관장에게 오히려 감사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더 높은 관직에 올려 지기를 희망하고 기도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이처럼 순교란 단지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하며 스스로 자신의 전부를 내어놓으면서, 마침내 자신이 믿고 사랑하는 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하며 기뻐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그분의 죽음이 ‘순교’임을 드러내는 진정한 표시가 됩니다.
그러니 우리도 성인과 함께 제2독서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로마 5,2-3)
그것은 고통 중에도 오로지 하느님께 희망을 두며, 우리의 희망이 아니라 하느님의 희망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도록 우리 자신을 허용할 때 가능해지는 일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로 이렇게 십자가에서 아버지를 증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증거는 단지 십자가에서만 있었던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공생활을 통한 일상적인 삶 전부였습니다.
바로 그러한 일상적인 증거의 삶이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의 성인의 삶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 우리의 순교 역시 우리의 삶의 현장과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연속되는 죽음 속에 자리 잡아야 할 일입니다.
곧 일상의 삶 안에서, 나 자신의 뜻에는 스스로 죽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순교하는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는 비록 목숨 바쳐 순교할 기회는 없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생각과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향하여 나아가는 일이 바로 ‘순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순교'는 믿고 있는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있는 분’을 증거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곧 자신의 죽음으로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2고린 4,10-11)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 이름 때문에~”
(마태 10,22) 주님!
제 안에 새겨두신 당신 이름을 기억하게 하소서.
당신 이름으로 부어주신 사랑을 기억하게 하소서.
당신 이름에 희망을 두오니, 당신 이름에서 구원을 주소서!
당신 이름 때문에, 돌팔매질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이름을 증거하는 순교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 번호 | 제목 | 등록일 | 작성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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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 마태오신부님(빠다킹신부님) 7월 7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
18:09 | 박양석 |
| 2948 |
[마지막글] <묵상 에세이 2부> 진리를 잃어버린 시대, 이성의 절대화와 상대주의의 독재 |
15:57 | 박소영 |
| 190474 |
7월 5일 이병우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김건태 신부님 묵상 |
13:13 | 최원석 |
| 190473 |
7월 5일_ 전삼용 신부님_양승국 신부님_이영근 신부님 묵상 |
13:12 | 최원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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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6일 월요일/ 카톡 신부 |
10:50 | 강칠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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