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8일 (토)
(홍)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헤로데는 베들레헴에 사는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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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참사람, 참영성가 “예수님 닮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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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경 [forgod] 쪽지 캡슐

2024-12-27 ㅣ No.178823

2024.12.27.금요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1요한1,1-4 요한20,2-8

 

 

참사람, 참영성가

“예수님 닮기”

 

 

욕망의 사욕에 함몰된 시대정신이요 사회정의같습니다. 이게 기성세대의 민낯입니다. 작금의 국내사태는 단지 좌우,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과 비상식, 진리와 거짓, 정의와 불의의 문제같습니다. 상식에 바탕한 영성이요, 먼저 상식에 바탕한 사람이 되라고 누누이 강조했던 옛 장상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양쪽 공히 상식과 진실, 정의에 바탕을 두고 각자의 이상을 펼쳐가야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너무나 뻔뻔한 후안무치, 적반하장의 몰상식이 범람하는, 중심을 잃고 길을 잃은 양심 실종의 혼탁한 세상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가르침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욕망에 실려 떠나버린 나를 다시 찾아오기란 어렵다. 인생에서 가장 시급한 일은 나를 지키는 것이다.”<다산>

“천하만물 가운데 굳이 지킬 것이 없지만, 오직 나만은 지켜야 한다. 천하에 잃기 쉬운 것에 나만한 것이 없다.”<다산의 여유당전서>

 

모두 참사람의 나를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수십년전 어느 수녀의 말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누구나의 바람일 것입니다. 참사람 하나 만나면 주님을 만난 듯 반가울 것입니다. 참사람은 아주 현실적이며 일상적인 사람입니다. 참으로 꿈과 비전을 지닌 섬세와 배려, 예의와 존중, 겸손과 섬김의 사람입니다. 한마디 말에 인격을 담을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대화의 사람’이라면 참 좋은 참사람일 것입니다.

 

“1.대화중 상대방의 말을 끊지 않는다.

 2.잘 모를 때는 정중하게 질문한다.

 3.대화할 때 상대방의 눈을 보며 이야기한다.

 4.계산적이지 않고 요점을 간략하게 말한다.

 5.평소 비속어나 욕설을 쓰지 않는다.

 6.강단있게 말하되 인상은 환하게 유지한다.“

 

수도원 청원자 형제의 어머니가 성탄축제날 피정중 면담고백성사를 봤습니다. 이미 세상 떠난 형제의 부친은 49년생 저와 소띠 동갑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자랑하는 남편이자 형제의 아버지는 참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평생 시골에서 이발사를 하면서 가난중에도 네 자녀를 모두 사랑하며 밝고 반듯하게 키웠고 존경을 가득 받았기에 지금도 네 자녀들이 아버지를 몹시 그리워한다 했습니다. 성서를 읽듯 배우는 마음으로 장시간 경청했습니다. 아들 청원자 형제에 대한 세 긍정적인 언급도 잊지 못합니다.

 

1.변덕이 없다.

2.남을 판단할줄 모른다.

3.손재주가 좋다.

 

저보다 네 살 적은, 평생 아들을 키워온 어머니의 말을 들으니 정말 믿음직한 수도자의 자질을 지닌 청원자 형제였습니다. 하느님은 보물같은 형제를 수도원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후배는 선배를 그대로 보고 배웁니다. 새삼 아버지답게 처신해야 하겠다는, 독신의 수도자이지만 정말 아버지다운 참사람 수도자가 되기 위해 계속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는 자각을 새로이 했습니다. 이제 젊은 수도자들의 아버지뻘 나이를 훨씬 넘기 때문입니다. 

 

정말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공부가, 평생공부가 참영성을 지닌 참사람되는 공부입니다. 학식이 아니라 지혜와 자비를 겸비한 참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영성가라는 토마스 머튼의 평가를 기억합니다. 

 

“머튼은 가톨릭인이었으나, 가톨릭인이기보다는 그리스도교인이었고, 그리스도교인인이기보다는 종교인이었고, 종교인이기보다는 인간이었다.” 

 

참으로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는 참사람이요, 영성의 최고봉 경지에 이른 머튼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읽은 교황님 문서에 나오는 성 바오로 사도의 인품에 대한 묘사가 참사람 바오로 사도임을 깨닫게 합니다. 무엇보다 참사람은 현실주의자입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란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성 바오로는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인생은 그의 기쁨과 슬픔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고, 사랑은 시련들중에 시험되고 있음을 알았으며, 희망은 고통을 직면하면서 흔들릴수 있음을 알았다. 그럴지라도 그는 다음과 같이 힘차게 고백한다.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로마5,3-4)”

 

예수님을 그대로 닮은 참사람이자 참영성가, 현실주의자 바오로 사도임을 깨닫습니다. 더 분명히 하면 늘 천상에 눈길을 둔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라함이 맞습니다. 이런 좋은 본보기가 또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입니다. 오늘은 어제 성 스테파도 첫 순교자 축일에 이어, 예수님의 애제자로 추정되는, 사도들중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천수를 누린 사랑의 성 요한 사도 축일입니다. 늘 예수님과 함께 했던 최측근 베드로, 야고보, 요한 셋중 요한이 바로 오늘 기념하는 사도축일입니다. 마지막 십자가의 예수님곁에서 자리를 지켰던 에제자 요한이였습니다. 

 

예수님을 그대로 보고 배운 애제자 요한이야말로 진정 참사람, 참영성가였습니다. 그는 결코 영육의 이원론자나 영지주의 이단자도 아니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육화의 주님을, 하느님이자 인간이신 예수님을 철석같이 믿고 사랑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유령이 아닌 참사람이자 참하느님이심을 알았습니다. 참으로 신적일수록 인간적이요 인간적일수록 신적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날로 닮아갈수록 참사람에 참영성가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요한1서의 말씀을 통해 요한의 체험이 흡사 우리의 체험처럼 생각됩니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성 요한, 성 바오로처럼 영원한 생명이신 파스카의 예수님과 깊어지는 일치와 더불어 참사람, 참영성가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수제자 베드로와 애제자 요한의 대조가 참 흥미롭습니다. 빈무덤에 먼저 달려온 것은 열렬한 사랑의 애제자 요한이었고 빈무덤 입장도 수제자 베드로에게 양보함으로 겸양의 사랑이 빛납니다. 빈무덤 안에 잘 개켜져 있는 수건을 보는 순간, “보고 믿었다”라는 묘사에서 보다시피 사랑의 눈이 활짝 열려 주님의 부활을 직관하고 믿은 애제자임이 분명합니다. 시공을 초월한 사도 요한의 선포와 초대가 고맙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아버지와 아드님이신 당신과 나누는 친교에 참여한 우리 모두가 참사람이, 참영성가가 되어 충만한 친교의 기쁨을 누리며 살게 하십니다.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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