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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부활하신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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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부활하신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
부활하신 후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이르신 말씀 중 핵심은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요한 20,17)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예수님을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교리에서 가르치기 때문에 예수님만 아버지의 진실한 자녀이지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 하게 됩니다.
특히 어리석은 일을 했을 때, 마음이 사나와져 사랑의 마음이 사라질 때, 나는 참으로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존재이니 더더구나 하느님의 자녀는 절대 아닌 것처럼 생각됩니다. 무기력한 마음이 되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하거나, 혹은 스스로에게 화가 나면 나뿐 아니라 남들에게도 함부로 합니다. 하필이면 이런 존재로 태어나게 했는지, 또 그렇게 나를 키워 준 부모, 내가 속한 사회를 원망하게 되기도 합니다. 부모나 사회를 원망하는 마음은 다시 하느님께 대한 원망으로 번집니다. 하느님이 있다면 나한테 이런 불행을 줄 리 없어. 또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게 하는 하느님이라면 정말 나쁜 하느님일거야. 어떻게 세상을 이따위로 방치할 수 있지? 무책임하거나, 게으르거나, 아니면 정말 우리를 괴롭히고 싶으시거나. 그러니 하느님이 있다는 논리 자체가 틀린 것이야.… 이렇게 생각이 번지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모욕과 조롱 속에서 돌아가시면서 모든 희망이 사라진 제자들의 마음에도 아마 이런 번잡하고 시끄러운 생각들이 자리잡지 않았을까요. 억압과 가난과 시련 속에서도 우리를 구원해 주실 메시아라는 희망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던 터라, 너무나 허무하고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셨으니까 말이지요. 이제 배신감까지 사로 잡힌 제자들에게는 뿔뿔이 흩어질 일만 남은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니, 당연히 믿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따지기 좋아하고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제자 토마스는 예수님의 몸을 만져 가면서 확인하려고 합니다.(요한 20, 25-29 참조) 무엇이든 만질 수 있는 물리적 증거가 있어야 참이라고 주장하는 현대의 과학자들과 비슷합니다. 만질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빛, 또 형체가 없는 소리나 중력의 존재는 인정하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 믿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하십 니다.
한편으로는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을 거듭 물으십니다.(요한 21,15-19 참조) 세 번이나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정했던 베드로였지만 예수님의 거듭된 물음에 대답을 하면서 슬픈 마음에 빠집니다. 이미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아시면서 왜 거듭 물어보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어쩌면 베드로의 배신 때문에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의 위상이 흔들릴까 봐 더 단단한 입지를 만들어 주시려는 것, 또 용서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일까 하고 추측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난 사람과의 기억으로 행복하기 위해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용서와 수용이라는 점을 가르치기 위해 이런 일화들을 남기시지 않으셨을까요. 먼저 간 사람이 혹시라도 내게 서운한 것을 다 풀지 않고 갔다면 그 사람을 용서해야 하고, 반대로 내가 부족해서 그 사람에게 더 큰 사랑을 충분히 베풀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자신을 결코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태도 역시 버려야 한다고 말이지요. 물론 남이든 나 자신이든, 잘못한 일을 용서하는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의 윤리적 소명을 수난을 통해 그대로 보여 주신 것 같습니다. 어떤 말이나 글보다 더 우리 인류를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그 영향이 수 천 년 이상 지속될 수 있는 까닭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정말 세심한 마음으로, 제자들이 공과 과를 따지며 서로 다툴까 봐 말끔하게 정리까지 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애제자의 운명이 혹시라도 자신과 달리 특별하고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 또 그 사랑을 내 이웃과 실천하는 것까지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잘못된 공정과 정의의 논리를 내세우는 우리의 마음을 다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속된 성공하는 일뿐 아니라 천국에 가는 것, 부활에 동참하는 것까지,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 하다니요! 저 사람은 나보다 더 죄가 많으니 천국에는 절대 못 갈 거야, 하는 식으로 남과 나를 죽을 때까지 비교하고 있네요. 나와 상관없는 남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느라 정작 필요한 내 일은 제대로 하지 못했던 잘못된 습관을 죽음의 순간까지 끌고 가면 내 손해입니다. 신앙이란 결국 신과 나와의 일대일 관계일 뿐이지 남들이 어떻게 되든 그게 뭐 중요하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의 자녀다운 죽음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는 막막합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수난의 길은 도저히 실천할 수도 흉내 낼 수도 없는 일들입니다. 아마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자주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냥 오늘 하루 즐겁게 살면 되지, 하고 말입니다. 우리 모두 결국 겪을 마지막 종착지라 해도, 죽음의 과정은 상상만 해도 무서우니까요. 우리 모두 피하고 싶은 바로 그 마지막 시간이 결국 내 존재의 실체와 살아온 과정 전체를 정직하게 직시하게 해 준다는 점을 성경 속의 수난과 부활의 장면들은 넌지시 이야기해 줍니다. 그 마지막 순간, 부족하고 어리석은 자신에 대한 집착과 미련은 다 벗어 버릴 수 있다면, 그래서 오로지 사랑으로 살고 사랑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신에 대한 깨달음이 번개처럼 찾아오기만 한다면, 정말 크고 깊은 축복이 되리라 감히 상상하고 소망해 봅니다.
[월간 빛, 2024년 12월호, 이나미 리드비나(서울대학교병원 공공진료센터 교수)] 0 96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