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월)
(백)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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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고난회 김준수의 신부님 성주간 화요일: 요한 13, 21 - 33. 36 ?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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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승 [bona24] 쪽지 캡슐

2024-03-25 ㅣ No.170903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13,25)

혼자 사는 게 아니고 더불어 살아가자면 그 관계 안에는 배신과 배반으로 상처받고 상실로 인해 아파할 수밖에 없겠지만, 결국은 사람만이 희망이다, 고 인정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 는 속담은 믿지 않는 사람보다 믿는 사람에게 배신과 배반의 큰 상처를 받는 것처럼 예수님 역시도 바로 당신과 함께 3년을 함께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의 배신과 배반을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셨습니다.” (13,21) 얼마나 예수님의 마음이 산란(=어수선하고 뒤숭숭하다.)했으면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표현엔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이49,4)라는 자조와 한탄에서 솟아 나온 표현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13,21) 하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복음은 마음이 산란하였다, 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드러내 놓고 그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하셨을까 상상하면 괜스레 제 마음 또한 덩달아 산란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산란하신 까닭은 당신 자신 때문만이 아니라 제자들의 나약함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그 나약함이 배신과 배반, 도망침의 근거이며, 그런 일이 일어난 다음에 제자들이 겪을 후회와 절망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지 제자들만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연민이며 사랑에서 기인합니다. 

그런 예수님의 애타는 마음과는 달리 제자들은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면서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13,25) 라는 질문이 오히려 예수님의 산란한 심사를 더 불편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물론 이 질문에는 “저는 아니겠지요?” (마르14,19) 라는 자기암시와 자기변명을 내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모르는 무지에서 한 질문일 뿐입니다. 우리 역시도 나만 아니면 된다, 는 의식이 없지 않나 성찰해 볼 일입니다. 사건의 본질보다도 ‘누구야?’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사입니다. 막말로 배신자가 누군지 알아서 어떻게 하려고요? 판단과 단죄 아니면 왕따 혹 축출하려고요. 이는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것과 같음을 이후에 일어나는 사실로 드러나잖아요. 참으로 알 수 없는 사람의 저 간사하고 나약한 마음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은 담백하게 받아들이시는 마음으로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13,26) 하고 언급하십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며, 유다를 도구 삼아 사탄은 미뤄놓았던 그 죽음의 잔을 마시게 하리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그에 대한 원망보다도 안타까운 연민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13,27) 하고 그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때는 밤이었다.” (13,30) 라는 표현에서 그 밤은 어둠의 시간이며, 죽음의 어두운 안개가 점차 도처에 내려앉은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 밤은 유다에게는 사탄의 유혹을 받는 밤으로 갈등과 고뇌의 밤이 되겠고, 예수님께서는 이제 곧 자신을 통하여 아빠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가 다가오고 있으며, 자신 역시도 영광스럽게 되실 것임을 확신하는 밤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그 밤의 어둠이 짙어가며 갈수록 유다의 인간적인 고뇌와 혼란은 점점 더 깊어 갈 것입니다. 그러기에 유다는 빵을 받았지만, 축복한 빵도 먹지 않았고 축복의 잔도 마시지 않았음은 그가 생명으로 나아가지 못했으며 나아갈 수 없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잃을 사람은 잃겠지만 나약한 제자들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희망은 오직 하느님이시지만, 하느님의 희망은 오직 사람의 협력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애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13,33)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베드로는 자신의 열정만을 믿고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도 내놓겠습니다.” (13,37) 라는 호언장담에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단 말이냐.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13,38)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물론 베드로는 훗날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3번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21,17) 라는 예수님의 질문을 받고,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알고 계십니다.”고 겸손스레 응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21,18) 라는 말씀을 통해서 베드로는 자신이 고백한 바를 실천할 것입니다. “주님, 제 입은 당신 구원의 행적을 이야기 하리이다.” (화답송 후렴/시71,15)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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