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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ㅣ여행후기

도앙골 성지 축성식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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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관 [gabie] 쪽지 캡슐

2011-09-27 ㅣ No.717

충남 부여군 내산면 금지1리 249번지에 위치한 도앙골 성지를 9월 29일 오전 10시에 대전 교구장 유흥식(라자로) 주교님께서 축성하시는 미사를 봉헌하셨습니다. 20명의 사제들 공동집전으로 300여명의 교우님들께서 참석하시고 함께 기도하셨습니다. 비내리는 가운데 오랜 옛 신앙인들의 기도소리를 닮은 기도가  도앙골 계곡에 가득 찼습니다.  도앙골이 어떤 곳인지 소개해 드리기 위해서 아래 글을 실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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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앙골

잊혀져온 순교자들의 마을

‘홍산(鴻山)’이라는 고을명칭이 한국 천주교회 초기사 및 박해시대와 그 후대의 문헌들 가운데 빈번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홍산 도앙골’이라는 구체적 지명도 등장합니다.

 

1. 홍산 도앙골과 이존창 선생, 그리고 순교자들

한국 천주교회 초기사에 관련하여 ‘홍산’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내포(內浦)의 사도’라 일컬어지는 단원(端源)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1752-1801)선생의 이름과 더불어 나타납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주로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를 근거로 하여, 단원 선생께서 ‘신해박해’(1791) 때 체포되어 충청감영(공주)에서 풀려나온 후 고향(여사울)을 떠나 피신한 곳이 ‘홍산’이라고 전하고 있는데, 그분의 생애에 관한 언급을 종합하여 소개하고 있는 ‘여사울 성지’의 홈페이지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공주에서 체포되었다가 배교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유의 몸이 되자 자신의 잘못을 통회하고 더 적극적으로 전교활동에 들어간다. 고향을 떠나 홍산으로 가서 전교에 열을 올린다. 곧 이곳도 천주교 마을이 되었다.”<http://www.yeosaul.or.kr>

그렇다면, 단원께서 “고향을 떠나 홍산으로 가서 전교에 열을 올린” 곳은 구체적으로 ‘홍산’의 어느 곳일까 하는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홍산이란 그 당시의 홍산현(鴻山縣)을 일컬음인데, 그 홍산현은 현재의 홍산면 소재지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홍산 고을의 관아가 소재하던 현재의 홍산면 소재지에서 선생께서 직접 전교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당시의 홍산 관아가 소재하던 곳은 현재 보존 복원된 동헌 및 객사 등이 위치한 홍산면 북촌리 일대이며, 남촌리 일대의 저잣거리 지역과 더불어 지역민들이 흔히 일컫는 ‘홍산읍내’ 어딘가에서는 당시의 현감 지령에 의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해서 공주 감영 혹은 홍주 진영으로 이송하기 전에 문초하고 고문하던 곳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홍산 읍내에 대해서는 신자들이 고난 중에 신앙을 증거하던 일종의 ‘순교지’로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학(邪學)을 숭상한 죄목으로 곤욕을 치렀던 단원 선생께서는 홍산 현청 소재지에서라기보다는 홍산 현의 방대한 관할지역 내의 어딘가에서 은밀히 신앙인들을 규합해 나갔을 것입니다. 그러한 개연적 방증을 다음과 같은 증언기록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당하여 심한 고문과 교활한 꼬임에 빠져 한 때 배교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도 베드로처럼 즉시 뉘우치고 이 배교에 대한 양심의 가책으로 그의 땀이 어린 고향 내포지방을 떠나 새로운 회개의 삶을 살게 되었다. 홍산(鴻山)으로 이사한 그는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며 더욱 열심히 수계생활을 하고 전교에 힘썼다. 이로 인하여 그의 눈물과 땀으로 전교한 내포와 홍산 지방에서는 박해 중에 불굴의 증거자들이 잇달아 배출될 수 있었다.”『김길수 ,신유박해 순교자들(8)-이존창 루도비코, 가톨릭신문 2001.4.22(http://www.catholic.or.kr/자료실 성인/순교자/성지 제226호 2004.10.31)』

이러한 단원 선생의 전교활동에 의하여 신앙의 터전이 된 ‘홍산 지방’의 신자들이 교우촌을 이룬 곳으로 우리는 도앙골을 지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해 중에 불굴의 증거자들이 잇달아 배출된 교우촌들 가운데 특별한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록상 ‘홍산 도앙골’이라는 지명이 단원선생 이후로 많이 등장하는 까닭에 그렇습니다. 도앙골에서 잡혀가 순교한 분들과 출신 신자들과 관련하여 그 교우촌 형성의 정황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도앙골 출신 순교자들을 다수 찾아낼 수 있고, 갈매못에서 병인년에 순교한 분들의 유해를 거두어 모신 사람들 가운데 ‘홍산 도앙골’의 신자가 아주 적극적이었으며, 황석두(루카) 성인의 유해를 우선 모신 장소가 도앙골 고개 넘어 ‘삽티’라는 곳인 걸 보면 이 도앙골은 일찍이 교우촌을 이룬 곳임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습니다.

2. 도앙골은 어디?

현재의 행정명칭으로 ‘충남 부여군 내산면 금지리’의 깊은 계곡을 ‘도앙골’이라고 오래전부터 일컬어왔습니다. ‘금지리(金池里)’라는 동리명칭은 그 계곡이 흘러내린 월명산 정상부(上端部) 아래에 금지사(金池寺)라는 고찰이 소재한데서 연유합니다. 금지사 본전(本堂)의 뒤편 바위 밑에서 솟는 샘물은 특이한 약수로 알려져 있는데, 그 샘으로부터 흘러내리는 계곡물가의 좌우로는 산복사(일명 개복숭아)나무가 많이 자랍니다. 봄철에는 그 계곡 따라 붉은 복사꽃이 굽이쳐 피고 산골 가득 그 향기가 채워집니다. 하여 ‘도원곡(桃園谷 혹 桃花谷)’이라 일컫던 산골 이름을 ‘도왕골’ 또는 ‘도앙골’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답니다.

도앙골 계곡을 따라 끝까지 올라가면 월명산(月明山 해발 544m)의 정상 바로 아래 동북향 해발 475m 지점에 삼태기 형상으로 오목한 곳에 들어앉아있는 천년고찰 금지사를 만납니다. 그 절의 본전(本殿) 뒤편에 갈라진 바위 틈 밑으로 솟는 샘이 도앙골 계곡의 원천(源泉)입니다. 이 샘에서 황금 잉어(金鯉魚)가 나왔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해서 그 샘을 ‘금지(金池)’라 합니다. 이 샘물은 철분과 칼슘을 많이 함유하여 보통의 물보다 중량이 더 나가는 양질의 약수로 알려져 있어 홍산 원님(縣監)이 부하들을 시켜서 매일 길어다 마셨는데, 그 심부름꾼들이 매일 다녀오기가 어려우므로 꾀를 내어 며칠에 한 번쯤은 전날 길어온 물을 남겨두었다가 다른 물과 섞어서 원님에게 바쳤더니, 그 맛이 다른 걸 느낀 원님은 그 섞은 물과 그 다음 날 길어온 물의 무게를 저울로 달아본 후 그 부하들을 엄벌에 처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금지리 주민들에게 전해오는 말에, 중병으로 죽어가던 사람이 들것에 실려 이 동네에 와 금지(金池)의 물을 마시며 얼마간 지내다가 거뜬히 살아나갔답니다. 그리고 혹 다시 아프면 되 와서 그물을 마시곤 했다 하여 ‘되완골’이라 한다는데, 사실여부는 모르겠고 꾸민 전설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도앙골’이라는 명칭의 근거로는 그럴 듯 하지요. 그러나 이 도앙골에 몰래 들어와 천주교 신앙을 살았던 사람들은 죽음에로 끌려 나갔으니 그 사연은 역설적(逆說的)이기도 합니다. 영원히 살기 위해 끌려 나간 분들이지요.

3. 도앙골과 최양업 신부

이 도앙골의 더욱 특별한 사연이 있습니다. 최양업(토마스) 신부님의 사연인 것입니다. 우리의 두 번째 방인사제이신 ‘땀의 순교자 최양업’의 발자국이 선명히 찍힌 곳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분께서 귀국하여 첫 번째의 편지를 쓰신 곳입니다.

최양업 신부님께서 천신만고 끝에 귀국하여 서울에 도착한 것은 1850년 1월(혹 1849년말)입니다. 그분은 당시 중병을 앓고 있던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난 다음 곧바로 전라도를 시작으로 공소 순방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6개월간 5개도를 두루 돌았는데, 그해 가을에 자기 은사인 르그레즈와(P.L.Legrégeois)신부께 그간의 활동보고를 올리는 편지를 씁니다. 그의 ‘귀국 후 첫 번째 서한’인 이 편지는 1850년 10월 1일자로 작성되었으며, 그 발신지를 ‘도앙골’이라 명기하고 있습니다(Toouangcol la Octob. 1850).

최양업 신부님께서 귀국하여 선종하기까지 12년 동안의 사목활동 중에 그분의 은사인 르그레즈와 신부와 리부아 신부에게 보낸 13통(그 중 1통은 유실됨)의 편지 중에 도앙골에서 쓴 첫 편지가 가장 긴 문건입니다. 그 편지에서 자신의 순방활동 중 발각될지도 모를 위험한 상황을 늘 직면하고 있다고 피력합니다. 어떤 마을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이장에게 달려가서 수상한 사람이(혹 서양 사람이) 잠입했다고 알리는 바람에 이장이 마을 사람들을 소집하여 잡아 죽이자고 의논을 하는 중에 밤을 지새워 기도했다는 이야기도 쓰고 있습니다. 귀국 후 전국 교우촌 오지를 방문하며 지낸 9개월가량의 활동에 대하여 서한작성으로 정리 회고하는 그분은 서두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드디어 그렇게도 오랜 동안 소망하던 때가 왔습니다. 저의 가련한 조국에서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저의 형제들에 대해 사랑하올 신부님들께 편지를 쓸 수 있는 때가 마침내 왔습니다.”(라틴어 원문 : “Tandem advenit diu optatum tempus: tempus nempe quo ex mea misella patria charissimis Patribus de meis tantopere desideratis fratribus scribendi facultas sit.”)

장문의 편지를 그 자신의 표현대로 “드디어” “마침내” 참으로 차분하게 써내려갈 수 있었던 그 “시간을 과연”(tempus nempe) 어떻게 마련할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편지에서 집필 장소의 사정에 대한 설명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드디어” “마침내” 그런 장소를 얻게 되었다는 말은 없지만, 과연 그럴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 장소에 머물게 되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오래”(diu) 소원해왔던(optatum) 적지(適地)를 만난 심정이 이 편지의 서두 인사말에 묻어납니다. 그 심정을 저의 느낌으로 강조하기 위해 약간의 감동적 표현으로 몇 가지 단어를 고쳐서 직역하는 식의 번역을 해봅니다. : “마침내(Tandem) 오래 소원해온 시간(diu optatum tempus)이 당도했습니다(advenit). 그 시간은 과연(tempus nempe) 편지 쓸 수 있는 기회가 되는(scribendi facultas ) 그런 ... (quo...sit) 때입니다.”

언제 어디서 스승님께 그간의 사연을 말씀 올릴 편지를 쓸 수 있을까 노리고 노리다가 이제야 비로소 차분히 편지를 쓸 수 있는 그런 “시간을 과연”(tempus nempe) 어디서(어떤 곳에 숨어서) 얻을 수 있었을까요? 지금 그런 곳에서 드디어 이렇게 편지를 최양업 제자는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곳이 곧 ‘도앙골’이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께서는 가련하게 숨어사는 교우들을 찾아 12년 동안 전국의 수 백 개 오지마을을 순회하다가 결국 과로에 병을 얻어 순직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땀의 순교자’라 일컫지요. 그 수백 개의 오지 교우촌 가운데 아홉 군데의 마을에서 열 세 번의 편지를 쓰십니다(1년에 한번 꼴로 활동보고를 하신 것이지요). 그 많은 오지마을을 숨어들어 신자들을 만나시던 그분이 일 년에 한 번 간신히 안전한 곳에서 편지를 쓰실 수 있었지요. 그 수백 곳의 마을 중에 그분이 차분히 편지를 쓰실 수 있었던 곳은 아마도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곳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충분히 안정적으로 머물 수 있는 곳에서 편지를 썼을 것이고, 활동보고서 성격의 문건을 작성할 수 있는 시간은 그간의 활동을 얼마간 매듭짓는 계기였을 것입니다. 일종의 휴가지 처럼 지낼 수 있는 장소에서 그런 시간을 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휴가처럼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는 교우촌에서 사제가 머물 수 있는 신자의 집은 사제 스스로도 신세지는 마음이 덜 부담스런 사람의 집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보건대 도앙골에 부담스럽지 않은 집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금지리의 도앙골에는 1970년대까지 대여섯 채의 빈한한 농가가 있었는데 그 중에는 최(崔)씨 성을 가진 구교우 집이 있었습니다. 속칭 ‘뗏집’이라고 하는 움막집에 경주 최씨 신자가 누대에 거쳐 살아왔습니다. 그 신자 가정에 대해서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가계는 최 야고보-최영식(바오로)-최순성(비오)-최용성(요한)-최영철(베드로) 순으로 내려오는 5대의 것입니다. 현재 생존하는 사람은 최용성과 그의 아들 최영철입니다. 최용성(2011년 현재 72세)은 현재 제가 있는 만수리 공소에서 지척간의 도화담 공소에 사는 신자분입니다. 그 최용성 씨의 고모인 최춘희(마리아 1912년생)는 성가소비녀회의 창립 초기 입회자로서 2009년 10월에 선종한 수녀님(수도명 다두)입니다. 최용성 씨는 선대(최 야고보 이전 조상들)가 ‘청양 누곡(다락골)’이라는 곳에서 도앙골로 이주해 살았다고 증언합니다. 그 최씨 일가가 거주하던 ‘뗏집’은 그 조상 때부터 살던 것으로써 조금씩 손보며 살았다고 하는데, 최용성 씨가 34세 때(1970년대) 도앙골에서 떠난 이후 그 집터를 인수한 외교인이 헐어 없앴다고 합니다.

이러한 도앙골의 최씨 가계를 최양업 신부님의 가계(족보)와 연관성을 두고 연구해볼 필요가 있는데, 저의 느낌으로는 최양업 신부님의 가족과 멀게라도 친척관계가 된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양업 신부님께서 귀국 후 첫해의 고단하고 위험스런 사목활동을 일단 정리하고 보고서를 집필하려 할 때 되도록 안전하고 마음부담이 덜한 장소로 도앙골의 친척(?) 최씨 집을 선택하였을 개연성이 짙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차후 편지들은 어느 정도 신자들과의 관계가 익숙해진 다른 곳으로 이동해가면서 작성하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인 반면에 귀국 후 초기 활동 시에는 부담 없이 신세를 질 수 있는 친척의 교우촌(도앙골)에 가서 머물 수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최양업 신부님의 귀국 후 첫 번째 장문의 편지가 집필된 곳을 도앙골로 확정하는 논거로써는 도앙골의 그 최씨네 ‘뗏집’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 터는 현재의 형상으로도 은둔 장소다운 곳이기에 더욱 최양업 신부님과 관련해서 눈길이 가는 곳입니다.

4. 그러면 우리는?

홍산 지방에 대하여 ‘도앙골’을 중심으로 이존창 선생과 최양업 신부님에 관련된 것을 위와 같이 살펴보게 된 기회에 도앙골과 인근 지역(홍산 지역 순교성지)을 새롭게 인식하고, 그로써 제안하고 싶은 내용을 아래와 같이 설명합니다.

사실상, 도앙골을 포함한 홍산 지역의 교회사(박해사)에 대하여 우리는 무관심으로 지내왔습니다. 그 무관심은 ‘하부내포’에 대한 무관심 속에 함께 묻혀 있어온 것입니다. 솔뫼, 합덕, 해미, 홍성, 여사울 등 충청 서북부 지역의 성지조성을 주로 하여 ‘상부내포’의 신앙증거 역사는 나름대로 잘 인식되어 왔으나, 홍산 지역을 포함한 현 부여·보령·서천 지역인 ‘하부내포’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으로 일관한 것입니다.

‘하부내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이른바 ‘순교영성’을 전승시켜야 할 책무를 이 시대의 신앙인으로서 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자각은 매우 늦은 감이 있습니다. 바로 앞 세대에서 지금의 우리에게까지 이르는 신앙을 전수해준 직전시대 선배신앙인들의 족적을 수집 정리할 것을 또한 우리의 과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바로 앞 세대 신앙의 족적이란 박해가 끝난 시기로부터 한국의 근대 산업화 시대에 이르는 시기까지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시대의 자료를 나름대로 찾아내어야 할 것입니다만, 그것을 정리함에 있어서는 아래와 같이 두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 시대를 살아온 신앙을 우리의 이 시대에 이른 바 ‘순교신앙’으로 어떻게 적응시킬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저 나름으로 시대구분을 하여봅니다.

첫째 시기는, 박해가 끝난 직후(조선말)에서 일제 강점기로 접어든 시기(1880년대-1910년대)입니다. 이 시기는 본당 중심으로 사목하기 시작한 때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박해를 면하게 된 교회가 제도적 바탕을 다지기 위해서 ‘본당(本堂)’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박해시기의 오지마을을 중심으로 신자들이 신앙생활 하던 패턴의 교회에서 세상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대처(大處)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바뀌어 가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그래서 이른바 ‘본당(本堂)’이라는 것이 여기저기에 설립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 시기의 산물로 엉뚱하게도 ‘본당(本堂 : 불교적 殿堂 명칭)’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본래 교구(敎區 dioecesis)라는 교계제도 수립단위 내에서 관할구획(區劃)을 맡은 사목구(司牧區 paroecia)를 ‘본당(本堂)’이라는 불교건물 명칭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일종의 난센스인 것입니다. 그것은 사목자가 주재하는 곳을 뜻하여 본주재소(本駐在所)라는 의미로 ‘본당’이라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른바 ‘공소(公所)’라는 용어로 먼 곳에 가서 만나는 신자들이 모이는 곳을 지칭했는데, 그곳은 사목자가 일시적으로 주재하여 신자들을 돌보는 곳이었습니다. 이런 의미로 2차적 주재소(statio secundaria)를 ‘공소’라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소’란 평소 신부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그 동네 신자들끼리 집회하는 곳을 일컬어 강당(講堂)이라 하였고, 반면에 신부님께서 늘 계시는 본당의 전례 집전소(執典所)는 성당(聖堂)이라 한 것입니다.

이 시기는 그럼으로써 옛 은둔지 같은 오지의 마을을 중심으로 해서가 아니라 대처(도시형성지역, 大處)를 사목중심지로 삼는 변화를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대처중심교회(大處中心敎會)의 향배(向背)를 비판적으로 평가하자면, 숨어 있던 교회가 세상 앞에 당당하게 나섬으로써 마치 세과시(勢誇示)로 전략을 바꾼 듯한, 일종의 개선주의(凱旋主義 triumphalismus)와 흡사한 노선의 시기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박해시대에 세상에서 힘없는 사람들로 숨어 살던 오지(공소)의 신자들은 변화된 세상에서 주력을 이루는 본당지역(대처지역) 사람들 앞에 열등한 처지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른바 ‘공소신자들’은 본당 사목의 2차적 대상으로써 열등한 수준의 신자들로 여겨집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열등 신자들의 공소들은 그 시대 사제 수도자 성소배출의 주산지였습니다. 이러한 예로써 홍산 지방의 사목구(금사리 본당)에서 그 시대에 사제가 된 분들의 출신지를 주목해볼 수 있습니다. 강성삼 신부, 윤예원 신부, 이완성 신부와 이재성 신부의 출신 마을이 그렇습니다. 방인 사제 3번째로 사제가 된 강성삼 신부(1896년 서품)의 출생지는 홍산 지방 순교자들이었던 강 씨들의 연고지 옥산 내대 산골 혹은 미산 ‘쌩계 판숫굴’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윤예원 신부(1914년 서품)의 출생지는 도앙골 아래 금지리(괴목)입니다. 또 병인 순교자들 유해이장을 주도했던 이화만(바오로)과 그 아들 이범식(그레고리오) 및 이치문(힐라리오)이 순교한 후 그 손자인 이수병이 이 시대에 거주했던 외산면 화성리 ‘거칠’에서 그의 아들 이우대의 아들 이완성 신부(1941년 서품)가 출생하고(1914년생), 이우대와 재종(再從)간인 이우철 신부(1941년 서품)는 서천 산골 ‘작은재’ 에서 출생하였습니다(1915년생). 이러한 점에서 직전시대 박해를 당한 체험을 지닌 신자들의 성소 배출을 하던 곳이 그 시대의 오지 마을이었습니다.

그리고 둘째 시기는,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과 한국전쟁 후 산업화 시기 이전까지(1910년대 후-1970년대 이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는 일제강점과 전쟁으로 인한 민족수난과 격동의 시대로써, 교회는 격동공간에서 사목을 하던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시대적 격동공간의 혼란을 직면하여 신자들에게 따르기만 하라는 식의 틀로써 지시일변도(指示一邊倒)의 교육을 하는 사목을 하게 됩니다. 그 예로써, 정기적 판공계획에 따라 사목하는 것이 대표적 형식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지의 공소 신자들은 일 년에 한두 번 사목자의 성사 혜택과 더불어 기도문과 교리문답에만 의존하는 교육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공소신자들은 더욱 열등 신자처럼 여겨집니다. 공소신자들이 그럼으로써 평소 사는 모습은 신앙인답지 못하면서도 판공성사로써 냉담을 면하는 나태에 안주해 갔던 것입니다. 그 시대의 사목적 틀에서 시행되던 ‘판공성사(辦功聖事)’란 우리 한국에만 존속하는 구시대적 잔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긍정적으로 틀에 맞춘 사목방편이던 판공성사의 부정적 역기능을 오늘의 우리 시대에도 도시 및 시골의 사목자들이나 신자들의 의식 속에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사생활이란 판공 때 정도의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일 년에 부활절 맞이로 한 번은 꼭 성사를 보라는 최소한의 법적 권고를 사목활동과 신자생활의 정형판단으로 여길 만큼 판공(辦功)이 왜곡돼 왔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앞 시대를 이어 우리의 이 시대 교회가 더욱 복잡한 인구 밀집지(도시)중심의 사목을 함으로써 ‘흩어져 사는 신자들’은 사목의 사각지대에 버려져 있습니다. 사목자의 활동 영역은 늘 한계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흩어져 사는 신자들’이란, 장소적으로 오지 산간의 산재된 곳의 신자들을 뜻하기도 하지만, 도시 중심적 교구 사목 정책에 익숙하지 못하는 시골 본당의 신자들뿐만 아니라, 또한 계층적 및 세대적 괴리로 관심의 한계선 밖에 소외된 신자들을 뜻하기도 한다. 사목자의 관심과 활동은 언제나 한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만, 우리가 이 한계성을 직면하여 그 타개책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박해시대의 신자들이 살았던 모습에서 찾아낼 수 있는 신앙이 그것입니다. 그 신앙이란, 우리 시대처럼 세상에 적응 내지 대응하여 사는 ‘따라서 신앙’이 아니라 ‘오로지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로지 신앙’이란 ‘신앙이 먼저’이기 때문에 스스로(사목자를 늘 만날 수 없어도) 신앙을 살았던 그 백해시대 사람들의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의 배움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이른바 ‘성지순례’를 하곤 하지요. 그래서 위와 같은 시대적 반성과 더불어 우리가 신앙을 전수한 뿌리를 ‘오지’에서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이른바 ‘성지개발’이라는 과제 역시 ‘오지’에 관심을 두는 것이라고 저는 제안 삼아 말하고 싶습니다. 그 ‘오지(奧地)’란 접근성이 난이한 (장소)을 뜻하기도 하지만, 어렵사리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의 행위를 발견할 수 있는 경우’를 뜻합니다. 이 후자의 뜻으로, 오지사람들 즉 이름을 크게 남기지 못한 사람들(민초들?)의 신앙에서 이른바 ‘순교신앙’을 찾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성인 반열에 들어 ‘큰 이름으로 기억되는 분들의 사적지로 알려진 ‘성지(聖址)들’과 더불어 시복시성(諡福諡聖)의 자료조차 찾지 못하여 잊혀져갈 사람들의 신앙을 엿볼 수 있는 곳들 또한 ‘성지’로 알아보며 찾아오는 순례자들이 곧 오늘 우리 자신들이기를 바랍니다. 그 ‘큰 이름으로 기억되는 분들의 사적지로 알려진 성지(聖址)들’은 우리 대전교구 내에서 주로 ‘상부내포’에 개발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의 관심이 결여되었던 ‘하부내포’에 대규모 인원의 순례단 보다는 걸어서 소규모로 혹은 개인으로 옛 신앙의 흔적을 찾는 순례자가 우리 자신들이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하부내포’의 홍산 지역에서는 충분히 선대의 피로 축성된 ‘성지’가 다수 헤아려집니다. 그 중의 한 곳이 ‘도앙골’입니다. 이 도앙골에서 더욱 그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의 행위를 발견할 수 있는 경우’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양업 신부님께서 최초의 서한을 장문으로 편안히 작성할 수 있었던 곳이기에 그렇습니다. 숨어서 편지를 쓴 곳! 은둔소(隱遁所)였습니다.

이 은둔소의 터를 확보해보고자 여러 해 궁구하던 중에 천행으로 아주 가까운 지점을 교회의 이름으로 확보할 수가 있었습니다. 아직 아주 작은 면적(800평)이지만 은둔소에서 정말로 기도하며 머물고 싶은 신앙인을 맞이할 거주공간까지 장만되었습니다.

앞으로 또한 인근에 산재한 박해시대의 옛 교우촌(옛 홍산 지방이라 일컬어지는 거칠, 내대, 삽티, 뒹굴, 서짓골, 쌩계 등)의 산골에서 걸음걸음 발자국을 남기는 기도 소리가 철따라 골짜기에 퍼지기를 바랍니다. 그 기도의 걸음걸음은 옛 가난한 사람들이 험한 세월에 남긴 피의 발자국이 되어, 오늘 힘 센 자들의 거친 세상에 평화를 심는 땀의 기쁨으로 이어져나가리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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