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성지순례ㅣ여행후기

청주교구 연풍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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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임 [kr3217] 쪽지 캡슐

2012-08-10 ㅣ No.751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청주교구 연풍 성지


 연풍은 1866년 병인박해 때 갈매못에서 순교한 성 황석두 루카의 고향이며, 최양업 신부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곳으로 초대 교회부터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던 뿌리 깊은 교우촌이다. 연풍 마을과 문경 새재의 구석구석마다 선조들의 자취와 피의 순교 역사가 어려 있다.

 

위치: 충북 괴산군 연풍면 삼풍리 187-2
문의: 연풍 성지 TEL (043) 833-5064

찾아가는 길:[승용차] 중부내륙고속도로 연풍IC에서 내리면 우측 5분
거리에 연풍면사무소가 있는 마을이 나온다.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
연풍 초등학교 건너편에 성지가 있다.

 
 

연풍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로 추정
된다. 달레의<<한국천주교회사>>에 보면, 을해박해 당시 안동 감옥에서
세상을 떠난 김흥금이 1801년에 입교했는데 너무 가난하여 연풍 고을
교우들이 사는 곁으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침 대박해가
일어나서 그 신자들이 붙잡혀 서울로 이송되어
가자 김흥금은 진보(경북
청송군 진보면) 땅으로 도주했다고 나온다.


이 기사로 봤을 때 1800년 이전에 이미 연풍에 신자들이 사는 마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는 이미 이곳 신자가
체포된 기록이 나타난다.


이후 박해가 계속되면서 이 연풍 지역에도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나 프랑스 선교사들이 경상도
지역을 순방하기 위해 자주 넘나들던 경유지가 되었다.
산세가 험난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경기, 서울을 중심으로 일어난 박해를
피해 충청도와 경상도를 중심으로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 나서는 순교자
들의 피난의 요로로 일찍이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연풍에서는 황석두(黃錫斗, 일명 재건, 1813~1866, 루카) 성인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다. 부유한 양반집 자손으로 나이 스물에 과거 길에
나섰다가 천주교 신자가 되어 돌아온 그는 3년 동안의 벙어리 흉내
끝에 가족들을 모두 입교시켰다. 학식과 신앙이 깊었던 연유로
다블뤼 안(Daveluy, 安敦伊, 1818~1866,안토니오) 주교는 그를 회장
으로 두고 성경 번역과 서전 편찬에 종사토록 했다.

 

 

그뿐만 아니라 신앙에 눈뜬 뒤 그는 정결을 지키는 생활을 해 페레올
(Ferreol, 高, 1808~1853), 요셉 주교가 그를 사제로 서품하려 했으나
부인이 들어가 있을 정식 수녀원이 조선에 없다는 이유로 교황청의 허락
을 구하지 못했다. 병인박해 때는 다블뤼 안 주교 등과 함께 갈매못에서
칼을 받아 순교하였다.

 
 

갈매못 모래밭에 가매장된 황석두 성인의 시신을 성인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황천일 요한이 4월 그믐에서 5월 초승 사시에 수습하여 홍산 삽티(현 부여군홍산면 상천리)에 이장했는데 <((병인박해 순교자 시복 재판기록(1차)>> 6권1095쪽과 1111쪽), 황석두 종조손인 황 마르타(황 안드레아의 딸)가 분명히증언하기를 "4월 16일에 나의 백부가 가서 시체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홍산(鴻山) 삽티에 묻었습니다. 지금은 자손(子孫)이 없기 때문에 가더라도 찾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즉 황석두의 무덤이 실전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설에는 그의 시신이
가족
들에 의해 거두어져 연풍의 평해 황씨 문중 산에 안장되었다가 1982년 연풍 성지로 이장되었다고 한다.


연풍에는 한 가지 웃지 못할 일화가 전해진다. 병인박해로 한국 교회는 아홉 명의성직자를 잃었다. 천신만고로 세 명의 선교사가 목숨을 건졌는데 그중 칼레 (Calais,姜, 1833~1884, 아돌프) 신부에 얽힌 이야기가 그것이다.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 의하면 칼레 신부가 연풍을 지나던 중 포졸들에게 발각돼 도망치다가 붙잡히려는 찰나에 그만 전대가 풀어져 돈이 떨어졌다. 그를 쫓던 포졸들은 돈을 줍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틈에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김흥금(金興金)

김흥금(1765!1815),순교자, 세례명 미상, 일명 명숙,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가난으로 인해 연풍의 교우촌으로 이사한 후 1801년 아들 장복(長福), 딸 작단(作丹)과 함께 입교하였다. 그러나 입교한  지 얼마 안 되어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경상북도 진보로 피신, 그곳에서 살았다.

그러던 중 1815년 부활 축일을 지내다가 김시우, 이시임 등 마을 교우 30여 명과
함께
체포되어  안동 진영에서 이송되어 이해 10월(음) 아들 장복과 함께 형벌과
굶주림으로
대구 감영에서 옥사하였다. 그러나 딸 작단은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성지 안내글의 출처: 가톨릭출판사/ 순교자의 맥을 찾아서 / 오영환. 박정자 지음

 

http://paxkorea.kr/   <<  참고하세요~!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중부 내륙지방에 저희가 순례를 떠나기 전까지 무척 가물었습니다.
밭에 심어 놓은 작물들이 죽지 않고 견디는 것이 무지 감사하고 고마웠습니다.
그러한 상황이 만약 내 인생에 닥쳐 왔다면 난 어떻게 견뎠을까?
하늘을 바라보며 견뎌 주었던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합니다.
저도 그들이 그랬듯이 인생의 가믐이 오면 그날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런데 연풍성지 순례 전날 밤에 집중호우로 대지는 기뻐 환호하였습니다.
뭐라고 표현할 말이 생각나지 않지만 제 일생에 이렇게 집중호우를 바라보며
기뻐했던 기억은 없었습니다.
살았다는 환호일까? 고맙다는 화답일까?

이제 조금 주님을 알아가고 있다는 뜻일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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