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0일 (월)
(백)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교육 주간)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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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제(beracha)는 '주님께로부터 시작되는 변화'를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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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사목국 [papangelus] 쪽지 캡슐

2005-08-25 ㅣ No.63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빵이 되신 거룩한 성체 앞에서 우리는 어제 저녁부터 내적경배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그 빵은 우리의 내적 삶을 풍요롭게 하고(요한 6,35 참조) 이어나가도록 해줍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경배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성체성사 때에 우리는 요한복음이 말한 예수님의 “시간”안에 있게 됩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그분의 “시간”이 우리의 시간이 되고  우리 가운데 그분이 현존하시게 됩니다. 이스라엘을 종살이로부터 자유로 이끌어내신 하느님의 해방을 기억하는, 빠스카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거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예식을 따르셨습니다. 그분은 빵 위에 찬미와 축복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또한 새로운 것을 제정하셨습니다.


  그분은 과거의 크신 업적들에 대해서만 하느님께 감사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당신 자신이 현양 되시는 것 또한 감사드렸습니다. 그분은 율법과 예언서 전체를 담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바치는 내 몸이다. 이 잔은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이다”. 그분은 빵과 잔을 돌리셨습니다. 동시에 당신이 지금 말하고 행하는 것을 기억하여 늘 새롭게 다시 말하고, 다시 행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어떻게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과 피를 주실 수 있습니까? 빵이 당신의 몸이 되게 그리고 술이 당신의 피가 되게 하시면서, 그분은 자신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먼저 느끼셨습니다. 그분은 심중에 그것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그것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외부에서 온 무서운 폭력이 안에 들어와서는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이 된 것입니다.


  다락방에서 이루어진 것은 실존의 변화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변화들이 일어나게 하는 시작이 됩니다. 그 변화의 완성은 하느님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 1고린 15,28 참조)사람들은 항상 세상의 변화와 쇄신을 마음속으로 기대합니다. 지금 세상을 새롭게 할 유일한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폭력이 사랑으로 변하고 죽음이 생명으로 변합니다. 죽음이 사랑으로 바뀜으로 인해 죽음은 극복됩니다. 그리고 부활은 이미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죽음은 깊게 상처를 입었고 이제 그것은 더이상 모든 것을 끝내는 말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친근한 이미지를 떠올리면, 그것은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행해진 핵분열입니다.-증오에 대한 사랑의 승리, 죽음에 대한 사랑의 승리. 악을 이기는 선의 내면적 폭발만이 변화의 씨앗을 낳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더 세상을 변화 시킬 것입니다. 다른 변화들은 표면적이서 그런 것을 알지 못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구속을 이야기 합니다: 필요했던 것이 가장 깊은데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이 움직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실재로 내놓으셨기에 당신의 몸을 나누어 줄 수 있으십니다.


  폭력을 사랑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이 근본적 첫 변화는 다른 변화들을 이끕니다. 빵과 포도주는 그분의 몸과 피가 됩니다. 변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변화는 더 완전하게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우리도 변화되라고 우리를 일깨우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그분과 한 피가 되어야 합니다. 모두는 하나의 빵을 먹고, 이것은 우리가 하나됨을 뜻합니다. 경배는 일치입니다. 하느님은 더 이상 우리 앞에서 완전히 다른 존재로 있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 있고 우리는 그분 안에 있습니다. 그분의 권능이 우리를 꿰뚫고 들어와 다시 우리로부터 나갑니다. 사랑이 온 세상을 지배하는 실질적인 잣대가 되기 위해 그 권능은 다른 이들에게로, 온 세상으로 퍼져 가고 싶어 합니다.

 

  저는 새로운 의미를 하나 찾았습니다. 최후의 만찬이 우리에게 주는 ‘경배’의 여러 가지 의미입니다. 희랍어로 경배는 proskynesis 즉, ‘엎드린다’는 뜻, 하느님을 우리가 따르기로 정한 참된 심판자로 인정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유는 삶을 즐기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선을 향해 있는 온전한 자율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 우리 역시 참되고 선해야 합니다. 이런 태도는 꼭 필요합니다. 처음에 우리의 자유에 대한 목마름이 어떤 관점을 거절하더라도 말입니다. 최후의 만찬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의미를 통해, 이런 태도를 온전히 우리의 것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경배의 라틴어는 ad-oratio입니다. ‘입과 입을 마주치다.’ ‘목을 껴안다.’ 즉 완전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우리자신을 바치는 대상은 ‘사랑’이기에 경배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경배할 때 어떤 엉뚱한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또한 경배는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다시 최후의 만찬으로 돌아갑시다. 거기에서는 새로움이 생겨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옛 축복기도문이 새로운 변화의 말이 되게 하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시간에 참여시킵니다. 예수는 단지 기념일에 지나지 않아 뜻 없이 반복하는 빠스카 식사를 행하라고 사명을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시간 안으로 들어가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 Il nous a donné la mission d’entrer dans son “heure”.)


  우리는 축성의 거룩한 능력을 가진 말씀 덕분에 그분의 시간 안으로 들어갑니다.-우리를 이스라엘과 구원의 역사로 이어지게 하는 찬미 기도에 의해 이루어지는 변화는, 기도 본성상 지향하는 ‘새로움’을 우리에게 줍니다. 교회가 ‘감사기도’(prex eucharistica)라 부르는 이 기도가 성체성사를 제정합니다. 그 기도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현세의 선물들을 하느님 당신 자신의 선물로 변화시킵니다. 그분은 이 변화의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건을 ‘감사제’라고 부릅니다. 히브리 말로 감사제는 beracha입니다. 그것은 감사, 찬미, 축복, ‘주님께로부터 시작되는 변화’: 그분 시간의 현존 등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시간은 사랑이 승리하는 시간입니다. 즉,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하느님이 승리하십니다. 예수님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이 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 자신이 성체 성사를 통해서 주님이 원하시는 변화의 과정에 우리자신을 맡긴다면 말입니다. ‘감사제’는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교회가 우리에게 ‘성체성사에서 주일이 시작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긍정주의도 아니고 힘에 대한 목마름도 아닙니다. 빠스카 아침에 먼저 여인들이, 그리고 나중에 제자들이 주님을 뵙는 은총을 얻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들은 주간의 첫날, 주일날은 그분의 날, 그리스도의 날이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창조의 첫 시작일이 이제 창조를 새롭게 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창조와 구원은 함께 갑니다. 이것이 주일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입니다. 오늘날 많은 문화권에서 주일과 또는 토요일까지 휴일로 지내는 것은 흔합니다. 또 이것을 주말‘week-end'이라고 부릅니다. 만일 이 시간에 하느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텅빈채로 남습니다. 사랑하는 친구여러분 ! 처음에는 주일계획 속에 미사를 먼저 봐야하는 의무를 지키기가 아마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여러분이 마음만 먹으면 여러분은 그것이 분명 자유시간의 중심이 됨을 확신할 것입니다. 주일미사에 참여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다른 이들도 다시 주일 미사에 나가도록 도우십시오.

 

  우리에게 필요한 기쁨은 미사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항상 그 깊이를 이해하며 사랑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주일미사 참여를 열심히 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교회 전례의 풍요로운 깊이와 위대함을 되찾읍시다: 우리는 우리자신을 위해서 이 축제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축제를 준비하셨습니다. 미사를 사랑하면서 여러분은 화해의 성사를 다시 회복할 것입니다. 그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로우심이 항상 여러분 삶의 새로운 시작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이제 다른 사람들을 그분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큰 기쁨을 우리 자신만을 위해 간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전해져야 합니다. 세상의 여러 곳에서 하느님을 잊고 저질러지는 일들이 많습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아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모든 이에게 불만족과 박탈감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삶이란 게 이런 걸 순 없어 ! 아니야 정말로’라고 소리 지릅니다. 하느님을 잊은 것에 덧붙여서 종교적인 ‘붐’도 있습니다. 저는 이런 흐름에 가운데 있는 것들을 폄하하고 싶지 않습니다. 거기에서도 발견의 진정한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맥락에서 종교는 하나의 소모품이 되버립니다. 맘에 드는 것을 고르고, 어떤 이들은 거기에서 이익을 얻어낼 줄 도 알고 말입니다. 하지만 짜집기 식으로 찾아낸 종교는 결국에는 우리를 돕지 못합니다. 그것은 편함이고 위기의 시기가 닥치면 우리를 버립니다. 사람들에게 길을 가리켜주는 진정한 별, 예수 그리스도를 찾도록 도와주십시오. 우리 역시 확실한 방법으로 그분께로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힘을 갖기 위해 항상 그분을 더 잘 알도록 노력 합시다. 때문에 성서를 사랑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하고, 성서의 의미를 우리에게 열어주는 교회의 신앙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교회를 이끄시어 신앙이 자라게 하시고, 교회가 진리의 심오함을 더 깊이 깨닫도록 이끌어 주십니다.(요한 16,13참조).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라는 놀라운 작품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안에 수세기의 신앙이 종합적으로 설명 되어 있습니다. 저도 최근에 돌아가신 교황님의 요청으로 교리서의 요약본을 출판하였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 두 권의 책을 추천합니다.


  분명히, 이 책만 가지고는 부족할 것입니다. 신앙의 공동체를 만드십시오. 지난 몇 십년동안에 여러 가지 운동과 공동체가 생겨났습니다. 거기서 사람들은 복음의 힘을 강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신앙의 친교를 추구하십시오. 여정을 함께할 이들을 찾으십시오. 동방 박사들이 우리에게 처음에 알려줬던 대순례의 길을 그들과 함께 하십시오. 새로운 공동체의 자발성은 아주 중요합니다. 하지만 교황과 주교와 친교를 유지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격리된 사람들은 오솔길을 찾지 못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열두 사도와 함께 기초를 놓으신 하느님의 큰 가족안에 사는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성체성사를 되새겨 봅시다. 사도 바오로는 “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도 한 몸입니다.”(1 cor 10,17)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같은 주님을 모셨는데 그분이 우리를 맞아 주시고, 당신께로 이끄신다. 우리는 하나이다. 이것이 삶 속에서 드러나야 된다.  

 

  이것은 용서의 능력 안에서 드러나고, 이웃의 필요를 깨닫는 데서 드러납니다. 이것은 나눔의 마음에서 드러나고 외적으로 멀리 있지만 가까이에서 늘 우리를 보고 있는 이웃을 향한 투신에서 드러납니다. 오늘날 그것은 봉사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우리 사회는 서로 돕는 모습들이 시급히 필요합니다. 우리는 노인들을 외롭게 버려둬서는 안되며 고통 받는 이들을 그냥 지나쳐서도 안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친교 안에서 살고, 생각하면 우리의 눈은 열릴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만 빠져 사는데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곳을 볼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고 행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제공되는 편의시설들에만 빠져 사는 것 보다 다른 이들을 위해 도와줄 준비를 하고 사는 것이 더욱 아름답다는 것을 빨리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저는 위대한 꿈을 갖고 있는 젊은이 여러분들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투신하고픈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세상에 보여 주십시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제자들의 증거만을 기다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러분의 사랑을 통해서 신자로서 우리가 따르는 그 별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앞으로 나아갑시다. 그리고 주님의 참된 경배자로서 살아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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