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일)
(홍) 성령 강림 대축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자유게시판

너의 개가 잘못을 저지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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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식 [goodactor] 쪽지 캡슐

2024-05-05 ㅣ No.231378

(너의 강아지가 잘목을 저지르면)

 

영화 내부자에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그 중에서 깡패 안상구는 기레기 권력자?와 결탁해 그 합을 맞추며 전문대도 나온 엔터테인먼트 사장이 되어 극중에서 한 역할을 다하게 된다
그런 안상구가 기레기 권력자와 유착된 정계와 재계의 거물들의 비리를 포착하게 되고 지 딴에 형님, 형님 하며 모시던 지 성공의 은인?인 기레기 권력자에게 그 사실을 신나게 까발리며 결국 제 무덤을 파게 된다
그래서 재계 거물의 온갖 구린 일들을 뒷처리하는 조상무라는 인간에게 한쪽 손목을 잘리게 된다
그리고, 안상구는 이런 말을 한다
밥도 먹고 똥도 닥는 사랑하는 제 손을 잘라 버린 그렇게 자신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그 인간들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말이다
복음에서는 사뭇 다른 비유가 가르침으로 중요한 뭔가를 일깨워준다
복음에서는 네 손이 잘못하거든 그 손을 잘라버리고 네 눈이 잘못하거든 그 눈을 빼어버리라고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 나라의 삶이라고 가르친다
안상구 같은 인간에게 손이 어떤 것인지를 안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 속에서는 많은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진다
그 중에서도, 반려견, 누군가가 키우던 개가 사고를 치는 일도 벌어진다
그러면 아무도 그 개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그 개의 주인에게 책임을 묻는다
왜 그럴까
사람 일의 보편적이고, 통상적인 기준은 인격이다
즉 잘못을 하나 죄를 저지르나 그 책임을 물으려면 그럴 만한 인격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성격을 비화시키기에는 이런 말이 좀 그럴 수도 있겠지만 촉법소년이나 미성년자들에 대한 법적 잣대를 달리 하는 것도, 그리고 그럴 경우 그 부모들에게 일정 정도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은 그렇게 애들에게 그 모든 잘못에 대한 책임을 완전히 묻고 지우기에는 그 인격들이 충분하지 않고 뭔가가 부족하고 모자라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런 기준이 있다하더라도 인격적으로 온전히 책임을 묻고 지우는 한 사람이 저지를 법한 결과가 참혹하고 잔인한 범죄를 그런 애들이 저지르게 되면 그 사후에 대해서 고민이 깊어질 수 밖에 없다
다윗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 다윗도 욕망이라는 것이 앞서 바람직한 인격을 저버리고 큰 죄를 저지르게 되었다
그러할 때 그래도 되는 줄 아는 사람에게는 그 잘못을 일깨워줄 필요가 있게 된다
그래서 예언이라는 표현 양식은 그러한 관계 선상에서 나타나게 된다
다윗에게도 정중한 예언이 나탄이라는 예언자를 통해 인격적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그 예언의 의미를 깨달은 다윗은 옷을 찢고 머리에 재를 뿌리며 깊고 큰 회개를 하게 된다
사람은 자신의 인격으로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고 실수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바람직한 인격의 의미와 가치를 저버리며(하느님 나라의 성격과 깊은 관계가 있는) 말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럴 수도 있는 사람이기에 하느님 편에서 전해진 그 모든 것에 대한 예언의 핵심은 바로 회개이다
그 잘못이나 죄를 개같이 물고 늘어지는 게 아니다
그것은 어떤 악감정이나 악의가 있기 때문에 그 상대를 그렇게 대하고 몰아부치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의 반감이나 반발심을 심각하게 자극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느님 편에서 마련한 바람직한 회복과는 무관하게 많은 인간들이 그런 짓들을 대낮에도 서슴없이 뭐가 잘났다고 저지르는 것이다
복음에서는 네 손을 잘라버려라와 같이 표현이 때론 극단적이리만치 '단호함'을 요구하기도(결연한 의지와  그 실천의 단순함이 필요하다는 역설처럼) 하고 또한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왔다는 말도 있다
복음의 전체적인 기조는 회개와 회복이다
그리고 그 회개와 회복은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향하고 지향한다
그런 중심 맥락을 놓고 볼 때, 평화가 아닌 칼은, 문장에 담긴 속뜻을 깊이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가르침이라는 것은 사람 편에서의 순응과 실천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 또한 사람 편에서의 의지와 심성 정도에 따라 차이가 나고 다르기도 하겠지만 그런 입장이 다 다르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보통 앞뒤 다 자르고 텍스트만 달랑 던져 놓은 말 같은, 내가 평화를 주러 온 줄 아냐, 아니다 칼을 주러 왔다 와 같은 표현은 그 말을 한 사람의 성격, 그 사람의 전체적 삶과 그 사람이 행해왔던 일과 모든 행위, 그 사람의 개인사나 행적을 다 파악하고 이해할 정도가 되어야만 그 해석이 바람직하게 가능해진다
그래서 그 사람이 사람만이 아니라 신이라면 그것은 주어진 모든 정보와 자료 속에서 최대한 조망하고 유추하는 가운데 어떤 이해의 단상으로 밖에 종합될 수 밖에 없다
단지 그 문구에만 집중해 그 모든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란 말이다
그리고 가장 좋은 것은 그 말을 한 당사자에게 그 이해가 가능한 설명을 직접 듣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지니고 있고 그러함을 늘 살아있는 가운데 보이는 그 당사자에게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런 영감에 대한 진위, 참과 거짓, 사실과 오류 사이에서 한바탕 다툼과 시비가 벌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 이해에 따라 사람들은 많은 것을 달리 하고 사람들에게도 많은 것이 갈리워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참과 거짓, 사실과 오류에 관한 것은 결코 어떤 차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진실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단과 사이비라는 말이, 거짓 예언자와 거짓 교사, 위증과 사기라는 말이 세상에 있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웬만하면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함께 해서도 안 좋은 것들이며, 악의 실현도가 가장 높은 악화된 진상이며 실상이기에, 덕이 있는 사람들이나 덕을 지향하는 사람둘에게는 보다 신중한 입장에서의 태도와 대응이 필요한 일일 것이다
이단 논쟁은 카톨릭 역사에서 그 교리의 확립을 위해 오랜 시간 벌어졌던 일이다
이단과 같은 것들에게는 그 어떤 평화도 가능하지는 않다
이단들과는 어떤 이해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의 유무와 오류의 파생과 같은 아주 중요한 의미에 대한 문제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이단들의 승복만이(이단들이 자신들의 오류를 버리고 진실을 수용하고 받아들여야만) 평화를 위한 길이 된다
평화가 아닌 칼, 그것은 평화를 위한 문제 해결의 길인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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