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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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님_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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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4-04-29 ㅣ No.171978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요한 14,27-31ㄱ).”

 

 

 

1) ‘평화’가 무슨 물건은 아니기 때문에,

 

물건을 주고받듯이 평화를 주고받을 수는 없고,

 

주님께서 주신다고 자동적으로 우리가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라는 말씀은, “나를 믿으면 그 믿음을 통해서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라는 약속으로 해석됩니다.

 

‘주님의 평화’는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 가운데

 

하나이며, ‘영혼의 평화, 내적 평화, 영적 평화’입니다.

 

<‘영혼의 평화’를 ‘마음의 평화’로 바꿔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영혼과 정신과 마음을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많은 경우에 이 세 가지가 같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 겁을 내는 것”은

 

‘주님의 평화’를 누리는 모습의 반대쪽에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평화’를 누리는 사람의 모습은,

 

마음의 평온함을 유지하는 모습이 될 것이고, 두려움에서

 

벗어나서 용기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세상의 평화는 ‘몸의 평화, 겉으로 아무 일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온갖 의심과 불안과 미움과 증오심과 탐욕이

 

가득 차 있어도, 겉으로 아무 일이 없으면,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평화라고 착각합니다.

 

 

 

2) 주님께서 주시는 ‘주님의 평화’를 얻어 누리려면,

 

첫 번째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29절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한 말씀이고, ‘믿음을

 

통해서’ 평화를 누릴 수 있게 해 주려고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일’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가리킵니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은 힘이 없어서 당하는 일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당신이 스스로

 

목숨을 내주신 일이라는 것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 때에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평화를 잃는 일도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개인의 신앙생활과 인생에서도,

 

주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믿음이 있으면

 

어떤 고난과 시련을 겪어도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 믿음을 잃으면 평화도 잃게 됩니다.>

 

 

 

3) ‘주님의 평화’를 온전히 누리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고 죄 속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평화가 없습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죄의식 자체가 없이, 혼자서 마음 편하게

 

잘 지내는 자들이 있긴 한데, 피해자가 어떤 고통 속에

 

있든지 신경 쓰지 않고 혼자서만 마음 편하게 지내는 그것을

 

평화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참 평화는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성이 어떤 고통을 겪든지 말든지 관심도 없이 혼자서

 

잘 지내는 독재자의 경우, 그 자신은 그것을 평화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생각은 착각일 뿐이고,

 

혼자서 잘 지내는 그것은 결코 평화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냥 ‘무덤 속 같은 적막함’일 뿐입니다.>

 

 

 

4) ‘주님의 평화’를 누리려면 믿음과 회개 외에도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살아 있어야만 참 평화를 제대로 누릴 수 있습니다.

 

<희망이 없으면 평화도 없습니다.

 

완전한 절망 상태는 ‘죽음’과도 같습니다.>

 

 

 

5) 주님께서 주신 ‘내적이고 영적인 평화, 마음의 평화’를

 

온전히 얻어 누리는 모습을,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헤로데가 야고보 사도를 죽인 다음에, 베드로 사도를

 

죽이려고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습니다(사도 12,1-3).

 

“그는 베드로를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네 명씩 짠 네 개의

 

경비조에 맡겨 지키게 하였다. 파스카 축제가 끝나면 그를

 

백성 앞으로 끌어낼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

 

헤로데가 베드로를 끌어내려고 하던 그 전날 밤, 베드로는

 

두 개의 쇠사슬에 묶인 채 두 군사 사이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문 앞에서는 파수병들이 감옥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더니 감방에 빛이

 

비치는 것이었다. 천사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두드려 깨우면서,

 

‘빨리 일어나라.’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쇠사슬이

 

떨어져 나갔다(사도 12,4-7).”

 

사형 집행 전날 밤인데도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고 태평스럽게

 

잠을 자고 있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그것도 천사가

 

‘옆구리를 두드려’ 깨워야 할 정도로 아주 깊이 잠들어 있는

 

모습은, 살든지 죽든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린 채

 

‘참 평화’를 온전히 누리고 있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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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활 제5주간 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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