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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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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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umbrella] 쪽지 캡슐

2002-09-28 ㅣ No.39482

  아침에 일어나면 성당 문을 열어 놓습니다. 육중한 대문을 여는 것은 힘이 아니고 기술입니다.  검둥이는 문을 여는 소리에 벌써 소리를 지릅니다. 자기에게 밥을 줄 시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작은 텃밭에  물을 줍니다. 아침에 텃밭은 어제의 뜨거운 태양 때문인지 모두들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침을 먹으면 밥맛이 좋습니다.

아침 먹고 동네한바퀴 산보를 갑니다. 오며가며 동네 어른들과 인사를 나누고 요즘 살이 올라 보기 좋은 개울가의 작은 물고기를 봅니다. 개울가에 물고기들이 자유롭게 노니는 것을 보는 것도 작은 즐거움입니다.

 

 교우분들 방문은  시골길의 여행으로 이어집니다.  천식 때문에 고생하시는 할아버지, 교통사고로 고생하는 젊은이, 차멀미 때문에 성당에 못 오시는 할머니.... 길가에 핀 코스모스, 들꽃들이 바람에 날리는 것이 참 보기 좋습니다.

옥수수며, 밤이며 이제 막 시작된 가을의 결실들을 주시면 맛있게 먹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요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옵니다.

 

 저녁 무렵에는 장구경도 가고, 학교 운동장도 가보고 그것도 아니면 성당 마당에서 아이들과 놉니다. 저녁에는 열분 정도 함께 모여 미사를 봉헌합니다. 미사가 끝나면 남성 레지오가 있고, 그 남성 레지오가 끝나면 지난번에 잡은 붕어로 붕어찜에 소주 한잔을 마시기도 합니다.

 

 정지용님의 향수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아마도 이곳에서의 일상들이 향수가 되어 내 삶의 고단함을 달래 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며칠 있으면 이곳을 떠나 서울 명동 쪽으로 옮기게 됩니다.

 

 며칠 전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떠날 때는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갈 것 같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받아 갑니다.

아이들의 순수함과 아이들의 싱그러움을 받아 갑니다.

시골의 넉넉한 인심을 받아 갑니다.

 

 그 동안 시골 신부의 넋두리를 읽어 주신 가족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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