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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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진을 보며 떠올린 생각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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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요하 [jiyoha] 쪽지 캡슐

2002-09-24 ㅣ No.39163

           

                           인간의 무지, 그 끝없는 바다

 

 

 

 

 10년도 더 지난 일인데, 요즘 들어 명료히 떠오르는 일이 하나 있다.

 

 어느 주일 오후 우리 성당에 혼인미사가 있었다.

 전례봉사 당번이 아니었던 나는, 그때는 우리 본당에 성가대가 없어서 성가대 봉사를 할 일도 없겠다, 부담 없이 일반 신자석에 앉게 되었다. 미사 시간이 다 되어 성당 안으로 들어가서 중간쯤의 자리에 앉았다.    

 

내 옆에는 전혀 낯모르는, 60세 안팎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앉아 있었다. 그 아주머니의 저쪽 옆으로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들이 여러 명 앉아 있었고….

 

나는 내 바로 옆의 아주머니가 전혀 낯모르는 분인 데다가 천주교 신자도 아닌 것 같아서  의식적으로 그 아주머니에게 신경을 기울였다. 그 아주머니의 얼굴에는 뭔가 언짢은 듯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이윽고 미사가 시작되었다. 주례 사제의 입장에 이어 신랑과 신부가 입장을 마치니, 주례 사제는 성호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경문 말씀으로 예절을 시작했다.

 

’말씀의 전례’가 진행되는 동안 사제의 입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니, ’성령’이니, ’주님’이니, ’하느님’이니 하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참회식 부분의 자비송을 염할 때였다. 주례 사제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지금은,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계송을 했을 때였다.

내 바로 옆자리에 앉은 그 아주머니의 입에서 묘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흥, 마리아교회가 왜 자꾸 주님을 찾구 저런디야!"

 

사제와 신자들의 입에서 ’주여’라는 말과 ’그리스도여’라는 말이 거듭 나오는 것을 듣던 그 아주머니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그 아주머니가 쉽게 나갈 수 있도록 몸을 일으키고 비켜 서 주었다. 그 아주머니는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이상야릇한 표정, 심기 불편한 기색을 한 채 성당 밖으로 나가버렸다.

 

"흥, 마리아교회가 왜 자꾸 주님을 찾고 저런디야!"

그 아주머니가 낮게 뱉은 그 기이한 말소리가 내 귓전에서 맴을 돌았다. 아주머니의 그 의문보다 더 큰 의문 덩어리가 내 머리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나는 견디지 못하고 혼례식 시간에 몸을 일으켜 살며시 성당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느티나무 밑의 통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 그 아주머니에게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내 바로 옆에 앉어 계시던 아주머니가 성당을 나가버리시니께 나두 따라나오구 싶어지데유. 좀 지루허기두 허구…."

나는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고는,

"아주머니는 이 천주교 성당에 오늘 츰 와보셨나 보네유?"

이렇게 은근히 말을 걸었다.

"그류. 오늘 츰 와봤유. 친척 혼사를 아예 모른 척헐 수가 읎으니께…."

아주머니는 계속 언짢은 기색이었다.

 

"예에…. 그런디 아주머니는 개신교 신자신가 보네유?"

"개신교유? 아니유. 난 장로교 댕겨유."

"예에…. 아주 열심헌 신자신가 보네유?"

"교회 댕긴 지 삼십 년두 넘었이유."

"아, 예. 그럼, 그 삼십 년 동안 계속 천주교를 마리아교루 알구 사셨겄네유잉?"

"그럼, 천주교가 마리아교 아니래유?"

"아니쥬. 천주교는 하느님의 교회지유."

"쳇, 그 소리는 또 듣느니 츰이네."

아주머니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허튼 수작 말라는 듯한 표정이 완연했다.

 

나는 그 아주머니의 옆에 슬그머니 앉으며 다시 말을 걸었다.  

"천주교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남유? 하느님을 한자루 쓰면 천주님이 돼유. 하늘 천(天)자에다가 주인 주(主)자지유. 하느님이나 하나님이라는 말을 그대루 한자루는 쓸 수가 읎슈. 그래서 하느님을 한자루다가 천주라구 써가지구설래미, 옛날에는 천주교에서 하느님을 천주님이라구 많이 불렀이유. 그러니께 천주교는 곧 하느님의 교라는 뜻이지유. 워떻게, 좀 알어들을 수 있겄남유?"

"그런 소리랑 허들 말유. 마리아교라구 허면 뭔가 찔리는 디가 있을 티니께, 마리아교라는 걸 감추느라구 그런다는 거, 내 다 알유."

"아까 성당 안이서, 흥, 마리아교회가 왜 자꾸 주님을 찾구 저러느냐구 허셨쥬?"

"그랬쥬. 하두 어이가 읎구 기분이 나뻐서 그냥 나오너버렸다니께유."

"예에…. 그럼, 아주머니…. 어? 이상허다…마리아교이서 왜 마리아보다 하느님, 주님을 더 많이 불를까? 그 이유가 뭘까? 이렇게 의문을 갖지는 않으셨남유?"

"의문이라구유?"

"예. 의문 말이유, 의문."

"그게 뭐 필요허대유?"

"예?"

"그런 거 필요 읎슈."

그러더니 그 아주머니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핸드백을 챙겨들더니,

"나 먼저 식당으루 가야겄네. 사진이구 뭐구 신경 쓸 거 읎이…."

중얼거리며 내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걸음을 떼었다.

 

나는 잠시 정신이 몽롱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정신을 수습하자니 끝이 날카로운 의문들이 내 뇌리를 아프게 찌르는 것 같았다.

그 아주머니는 왜 그런 의문을 가지지 않는 걸까? 왜 내가 제시해 주는 의문조차도 거부하는 걸까? 이런 현상을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까? 어째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

 

정말 나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의문이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해답을 찾아야 할지 너무도 막연하고도 막막한 일이었다.

어떤 사물이나 사안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은 인간의 고유 본능이며, 끊임없이 물음표를 세우는 일은 인간의 삶과 모든 분야의 발전을 이끌어 내는 원동력일 것이다. 하나의 의문으로부터 인간의 삶은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정상적 사고 체계 속에는 늘 의문이라는 것이 자리해 있고 작용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내 쪽에서 베풀어 드린 의문의 제시마저도 철저히 거부하는, 의문이 완전히 삭제되어 버린 그 기이한 현상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의 원인과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에 대해서도 물음표를 세워보는 일은 당연한 일일 터였다. 나는 그것을 생각했다. 계속해서 물음표를 세워보는 일을….

 

그러나 나는 곧 몹시 피로해지고 말았다. 인간의 무지와 미망, 편견과 아집, 그것들로 뭉쳐진 한계는 저 끝없는 바다와도 같다는 생각만이 내 뇌리에서 뱅뱅 돌뿐이었다.

 

 삼십 년 동안 마리아교로 알았던 천주교에서 미사 중에 주로 하느님, 주님을 찾는 소리를 들었다면 다음 순서는 당연히 왜일까? 라는 의문이어야 할 텐데, 그 의문이 완전히 삭제되어 버린 상태라면 도저히 구제 불능이라는 생각도 나를 괴롭히기는 마찬가지였다.

 

 요즘 ’가톨릭 굿 뉴스" 게시판에서 재림교회의 광신도 박용진의 발호를 보면서 다시금 인간의 한계를 생각한다. 인간의 무지와 어리석음, 편견과 아집의 바다가 참으로 광활함을 절감한다.

 

 박용진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하면 그는 필경 또다시 이 말을 내게 돌려주려고 할 것이다. 내가 추구하는 인간의 무지와 한계에 대한 물음표를 가톨릭 자체로 돌려보라는 ’충고’도 하면서 기염을 토할 것이다. 나는 이미 그에게서 ’아전인수(我田引水)’의 맹랑하고도 놀라운 경지를 보았다. 우리 인간들의 삶 안에 아전인수의 여지가 참으로 무한함을 확인했다.

 

 더불어 박용진의 논법에서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의 경지도 보았다. 그에게는 그저 코에다 붙이면 모두 코걸이요, 귀에다 붙이면 모든 것이 귀걸이가 된다. 참으로 신통한 마술을 가졌다.

 

 가톨릭교회 2천 년의 역사가 오로지 사람들에 의에서만 이루어진 것으로 그는 단정하고 있다. 그 속에 내재해 있는 하느님의 현존, 성령의 역사를 그는 모조리 사탄의 행위로 규정하는 만용과 패악을 저지르고 있다. 물론 그것은 이단 광신 집단인 그들의 몫일 터이니 그들로서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오로지 자기신념, 자기도취만이 중요할 뿐이다.

 

 가톨릭교회는 2천 년의 역사 속에 내재해 있는 수많은 역사 체험 신앙 체험과 함께 성장해 왔다. 벼인 척 위장하고 자라는 저 논의 피들처럼, 가톨릭교회 2천 년의 역사 속에는 수많은 이단들과 사이비 종파들의 준동이 있었다.

 

 생성과 소멸을 거듭한 수많은 이단들과 사이비 종파들의 준동 속에서도 교회가 오늘까지 올곧하고도 옹골차게 복음정신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성령님의 은덕이고 성모 마리아님의 돌보심 덕분이었다. 수많은 이단들과 사이비 종파들의 준동을 겪는 그 경험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쇄신하고 점검하고 확인하며 더욱 많은 지혜들을 축적할 수 있었다.

 

 나는 오늘, 재림교회 광신도 박용진의 용춤을 보며 무한한 연민을 느낀다. 인간의 무지와 어리석음, 그것의 도도하고도 광활한 바다를 보며 야릇한 비애와 공포감마저 갖는다. 그를 구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바오로를 회심시킨 하느님의 전능하신 힘은 그를 구제하실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께 전능하신 힘을 펼치시어 박용진을 구제해 주시기를 간청하는 것뿐이다. 나는 오늘도 박용진을 위해 기도한다. *

 

 

 09/24

 충남 태안 샘골에서 지요하 막시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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