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2일 (수)
(녹)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홍보게시판 교구ㅣ수도회ㅣ본당ㅣ기관ㅣ단체ㅣ기타 가톨릭 관련 각종행사 교육, 알림 게시판 입니다.

파티마 발현의 시대적 의미

스크랩 인쇄

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1-02-22 ㅣ No.1581

파티마 발현(1917년)이 일어난 지

거의 1세기가 되어가고 있는 지금에 와 마리아의 뜻은

함께 출발한 두 체제에 대해

확고히 승리하였음을 역사는 드러내 주고 있다.

 

그야말로 사탄은 마리아의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오히려 그 머리를 밟힌 꼴이 되었다.

사실 파티마는 사탄의 도전에 대한 마리아의 대응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을 떠올리게 만든다.

 

골리앗처럼 시끄럽게 떠들며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까지 싸움을 걸어온 그 사탄에 대응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다윗처럼 보잘 것 없기만 하다.

마치도 개울가에서 주운 다섯 개의 다윗의 자갈돌을 연상시켜 주는

다섯 단의 로사리오만을 들고서 그 격심한 도전에 응해 갔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마리아는 사탄의 정수리를 강타하고

전쟁과 핵무기를 극복하면서 참 평화를 이루어 나가고 있다.

참으로 평화는 칼이나 창 따위로 오지 않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소련 공산주의·미국 자본주의와 전쟁 횡포는

오히려 인류를 각성시켜 주고, 양심을 일깨워 주었으니,

그것은 제 칼로 제 목이 잘리우게 된 골리앗의 신세를

사탄에게 안겨 준 꼴이 되었다.

 

사실 1917년 러시아 공산혁명으로 등장한 소련 공산주의체제는

이제 분명 실패했음을 스스로 인정하며 개혁의 길로 돌아섰고,

역시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을 깃점으로하여

세계사의 주역으로 올라선 미국도

그 자본주의체제가 지닌 구조적 모순 때문에 몸살을 앓으며

지금 모두에게 시대적 회개와 반성을 촉구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기실 그 둘은 각기 평등과 자유의 기치를 드높이며

자신을 경쟁적으로 드러냈었지만

그 차이란 단지 빵 모양 바꾸는 짓일 뿐

그 뿌리가 모두 물질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으니

결국 둘은 한 몸인 것이다.

 

마치 묵시록의 두 짐승이 큰 용으로부터 모두 힘을 받았듯,

그것의 원천은 모두 맘몬이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두 가지인 것이다.

설사 그들이 표방하는 바 이상사회를 온전히 이룬다 할지라도

물질주의의 바벨탑만을 쌓는 자기 한계를 벗어날 순 없는 것이다.

한데 그 물질주의야말로 참된 인류사회공동체의 실현을 저해하면서

현대문명의 온갖 병폐적 현상을 낳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이 빵만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살리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깊이 새겨 볼 것이다.

그 말씀은 중요한 것은 빵 모양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빵에다 말씀을 부여하는 것

곧 말씀의 의미 안에서 빵을 나누는 것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이 빵(물질) 그 자체에만 매달려 아귀다툼하다

빵 모양 바꾸는 것이 낳은 환각의 연쇄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비참한 이 세계를 구하려면 무엇보다 영혼의 변혁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성체의 의미를 구현하는 것이다.

참 사랑만이 모든 것을 만족케 한다.

 

파티마의 메시지, 곧 마리아의 길은 이 물질주의를 극복하면서

자유와 평등간의 상호 모순을 하나로 해소시키며

그를 실현시킬 수 있는 제3의 길이다.

그것은 참사랑의 길이다.

단지 사랑이란 단어가 지닌 의미가 너무나도 훼손되어져 있기에

혹 아름다운 빈말로써만 그칠까 봐

참사랑에 이르는 길을 보다 단순한 방법으로 제시해 주신 것이다.

 

마리아께서 요구하신

’보속·희생·봉헌·기도’ 그 모두는 참사랑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또한 그것은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

곧 참된 공동체를 실현시킬 수 있는 디딤돌이기도 한다.

그것은 이기적인 나를 없이하고 모두에게 모든 것이 되는

사랑과 봉사와 친교를 낳는 까닭이다.

 

본회퍼는 "사랑의 길은 끝없이 지체되는 길"이라고 했다.

사랑은 관심과 동참(루까 10,33-34)이니

이웃에 무관심한 채 휑하니 바람처럼

그냥 지나칠 순(루까 10,31-32) 없는 까닭이다.

참으로 그 도정의 순간 순간이

바로 궁극의 도달점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사랑의 길이다.

그 사랑만이 참된 공동체를 실현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결국 우리는 프랑스 대혁명의 기치에로 돌아간다.

평등·자유와 함께 사랑을 내세웠던 그들.

참으로 그 모두는 이 제3의 길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제3의 길이 지금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1917년 함께 드러난 세 갈래의 길 가운데

하필이면 참된 길은 제쳐놓고 물질주의에 노예화된 채

나머지 두 길로 제멋대로 나아가 좌충우돌하며 방황하다

이제야 비로소 함께 사는 길을 깨닫고서 어리석음을 회개하며

돌아온 탕자처럼 깊은 좌절감에 휩싸인 채

참된 길을 찾아가려는 우리들에 있어

파티마의 메시지는

그 참된 빛을 확연히 드러내며 우리는 이끄는 등불이 되고 있다.

 

이제 한 시대가 지나고 새 시대, 마리아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그때 마리아는 하느님나라로 나아가는

하느님 백성의 여정에 있어 이끄시는 분이 되고

동시에 태양보다 앞서 솟아 아침을 알리는 샛별처럼

다가올 하느님나라의 길을,

제3의 엘리야 이 시대의 세례자 요한 되시어

"회개하라, 보속하라, 봉헌하라, 희생하라, 기도하라" 외치며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계신다.

진정 마리아는 나아가는 인류의 선두요,

동시에 다가오는 하느님나라의 선두이시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제3의 길에 의해 펼쳐질 새 시대의 주춧돌로서

파티마의 메시지를 깊이 성찰하면서

그를 온 몸으로 실천해야 할 것이다.



540 0

추천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