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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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처럼 탄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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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resa [sh3652] 쪽지 캡슐

2001-11-01 ㅣ No.4992

야곱의 우물에서 가져왔습니다.

 

마음속으로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스스로를 달래보지만,  왠지 모를 답답함을 떨쳐버릴 수 없는 오늘 아침,  가슴 가득 채워주시는 주님의 현존은  감사의 눈물이 되어 답답함을 씻어주네요.

 

‘너는 잘할 수 있다. 네 곁에는 언제나 내가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욥처럼 탄식하며

 

8개월 반이 된 만삭의 몸으로 비행기를 탔다. 태평양 상공을 지날 때 한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때의 심정은 마치 부모, 형제, 친척을 떠나 하느님께서 가라고 하는 곳을 찾아가는 아브라함과 흡사했다. 이민살이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아이를 낳고 7개월쯤 지나서 빨래를 하려고 아이를 업고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세탁장엘 갔다. 갑자기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오더니 권총을 꺼내 드는 것이었다. 너무 놀란 나는 ‘하느님, 여기서 제가 죽어야 하나요? 아직은 때가 아니잖아요?’ 하며 아들을 더욱 당겨 업었다. 아이가 방실방실 웃자 그 흑인 강도는 총을 주머니에 넣더니 돈을 요구했다. 아직 말이 통하지 않던 나는 겁에 잔뜩 질린 표정으로 손짓 발짓하며 없다는 시늉을 했더니 달려들어 주머니를 뒤졌다. 말대로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 사람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다시 총을 꺼내 위협을 하고는 나가버렸다. 어떻게 집으로 들어왔는지 모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나는 그 일을 잊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학교 다니고 일하고 아이 키우면서 외로운 삶을 이겨 나가려고 애를 썼다.

경제적으로도 안정이 되었고 아이가 6살이 되었을 때 어느날 하늘로 마냥 치솟는 불길과 시커먼 먹구름이 마치 지옥을 방불케 한 LA 흑인 폭동이 일어났다. 영화 속에서나 보는 일이 현실이 되었다. LA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때 우리는 폭동이 일어난 바로 그 동네에서 세탁소를 하고 있었다. 동네 마켓들은 모두 불타고 물건들은 약탈당했으며 너무나 무서워 가게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숨어서 가게가 불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참다참다 뛰어나갔던 사람들을 흑인들은 주인이라고 구타하고 차까지 부숴버렸다. 소수민족의 서러움과 아픔을 무슨 말로 다 하랴.

남편은 성난 호랑이처럼 방안을 맴돌고 언제 뛰쳐나갈지 몰라 나는 그이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이틀 밤을 우리 가족은 묵주를 들고 성모님께 매달렸다. 어쩌다 창문을 열면 매캐한 냄새와 바닥엔 재들이 눈이 온 것처럼 하얗게 쌓여 있었다. TV에서는 불타고 있는 가게들과 약탈해 가는 모습들, 삶의 터전을 잃고 주저앉아 통곡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춰주고 있었다. 새벽 5시쯤 되었을까. 더이상 참을 수 없다며 남편은 나와 아들의 손을 뿌리치고 나갔다. 남편이 꼭 죽을 것만 같은 불안과 걱정에 내 입에서는 끊임없이 화살기도가 흘러 나왔다.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을 때 전화가 걸려 왔다. 직감적으로 남편일 거라 생각하면서도 전화 받기가 몹시 두려웠다. “앞 가게, 옆 가게 다 불탔는데 우리 가게만 괜찮아.” 남편의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주님 감사합니다.’ 나는 엉엉 소리내어 울어버렸다.

시간이 흘러 모든 것이 수습되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평온을 찾았다. 우리집 앞뜰에도 장미꽃이 만발하였고 난과 채송화도 아름답게 피었다. 그리고 안방 울 밑에는 누가 언제 심었는지 모르지만 봉숭아가 꽃잎을 터뜨리기 시작하였다. 어렸을 때는 봉숭아 꽃이 피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던 때가 있었는데 그러다 꽃이 피면 어김없이 열 손가락마다 봉숭아 물을 들였지. 그리곤 피로 물든 못박히신 예수님의 손을 생각했었는데’……. 옛날 고향집이 그리웠다. 그러나 그런 평온함이 오래가진 못했다. 정직하게 열심히 살았건만 겪어야 할 또 하나의 시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재산과 집마저 하루아침에 거둬가셨다. 너무나 엄청난 시련이라 욥처럼 원망과 탄식 속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불러보았지만 내 눈에 보이는 건 고통뿐이었다. 남편의 좌절은 더 크고 무거웠다. 정든 집에서 쫓겨 이사 나오던 날 착잡한 내 심정을 드러내듯 바람은 밤새 창문을 뒤흔들었다.

참다 못한 나는 차를 타고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와서 내 차를 들이받아 주기를 바라면서 달려간 곳은 끝없는 수평선이 펼쳐진 서쪽 바닷가. 저 수평선 넘어 끝이 닿는 곳은 내 고향 부산이겠지. 여름이면 동네 아이들과 언니들과 함께 수영하며 물장구치던 바닷가. 누군가 풋사과 하나를 물속에 던지면 그걸 잡으러 뛰어들어 건져 한 입 깨물면 입에 하나 가득 고이던 새콤달콤했던 그 맛. 뙤약볕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올라오다 성당에 들러 샘물을 한 바가지 퍼서 벌컥벌컥 마시고는 또 한참을 뛰어 놀았던 성당 마당. 나무가 햇볕을 가려주고 시원한 바람이 늘 불던 성모상.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을 추억하다 눈에 들어오는 글씨가 있었다. ‘세라 피정센터.’ 부자들만 사는 동네에 피정의 집이 있다니. 나는 간판을 바라보며 무작정 그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곳에는 허리를 굽혀서 무엇인가를 주는 것 같은 모습의 성모상이 서 있었다. ‘성모님, 제가 잘못 살았습니까? 부모 형제를 떠나 홀홀 단신 친구 하나 없는 이 낯선 땅에서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성모님, 아픔 속에 고통받는 가난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얼굴이 빗물과 눈물로 범벅이 된 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춥고 비가 오니 성당으로 들어가라고 성당을 가리켰다. 감실 앞에서 나는 알지 못할 따뜻함과 평온함을 느끼며 용서를 빌었다. 또다시 눈물이 폭포수같이 쏟아졌다. 얼마나 울었을까.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말씀이 있었다. ‘너는 잘할 수 있다. 네 곁에는 언제나 내가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그분의 힘있는 음성을 들은 것이다. 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주시고 함께해 주시는 분. 한 문을 닫으시면 다른 문을 열어주시는 분. 내 눈을 열어주시고 나를 이곳까지 불러주셔서 돌보심의 얼굴로 나타내 보여주신 분. 감사를 느끼면서 집으로 왔을 때 한 통의 편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온통 꽃 그림으로 가득찬 글과 해바라기 꽃잎으로 된 종신서원 초대장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동생의 종신서원에 참석하겠다고 약속했건만 지금 내 상황은 한국까지 갔다 올 여유가 없었다. 누구에게도 내 어려움을 말하지 못했던 나는 비록 참석은 못하더라도 동생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

서원식이 있기 일주일 전 아르헨티나에 사는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른 사람은 못 가더라도 너는 가야 하잖아. 동생 수녀도 너만 기다리잖니” 하며 여비를 송금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개신교 집안으로 시집간 언니, 불교 집안으로 시집간 언니들이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성당에 있었다. 그래서 가톨릭 집안으로 시집온 나를 유독 부러워하기도 했다. 우리들 자매는 부모님께 물려받은 신앙을 최고의 유산으로 받았기에 더 끔찍이 동생 수녀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생이 서원하던 날, 나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마음속으로 동생과 함께 서원을 했다. ‘주님, 저는 비록 수도자는 아니지만 가정에서 지혜롭고 충실한 아내, 착한 엄마, 사랑받는 당신의 딸이 되고자 하오니 받아주십시오. 겸손하게 봉헌하며 살겠습니다. 은총의 밭에서 아름답게 피어 많은 열매를 맺고 좋은 땅에 다시 떨어지겠습니다.’ LA로 돌아오는 길은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누가 이 행복을 이해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말했다. 하느님께서는 다 채워주시지도 않고 다 빼앗아 가지도 않으신다고. 늘 나와 함께해 주시는 분임을 나는 안다. 힘들고 지칠 때 한결같은 음성을 들려주시는 그분의 음성도 나는 안다. 이런 굳건한 신앙의 힘으로 다시 일어나 어느덧 남의 땅에서 살아온 지 15년이 되었다. 아들은 벌써 고등학생이 되었고, 사도신경, 십계명, 주모경을 우리말로 외워야 복사를 할 수 있었던 성당에서 여름 내내 고생하며 외운 기도문은 발음이 안 되어 ‘전는하신 턴듀선부 턴디에 탄도쥬를 저는 믿나이다’로 발음하는 아들 녀석이 그래도 복사 찰고 시험에 합격해 몇 년째 복사를 하고 있다. 그 기도문을 외운 뒤 우리 가족은 묵주기도만이라도 우리말로 바쳤다. 이 땅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아니 꼭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 있다면 부모님께 받은 가톨릭 신앙의 유산을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 그것일 것이다.

 

 

글 : 남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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