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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9월 13일 (일)
(녹) 연중 제24주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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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승수 신부님 [ 연중 제24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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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cornelia2] 쪽지 캡슐

10:56 ㅣ No.191868

[연중 제24주일 가해] 마태 18,21-35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누구든지 카인을 죽이는 이에게는 그가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이고 받았던 것보다 일곱 배나 더 큰 벌을 내리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카인이 큰 죄를 저질렀음에도 그의 악을 당신의 더 큰 선으로 덮어주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나는 부분이지요. 그렇게 하신 것은 당신께서 베푸신 그 자비가 카인과 그 후손들을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퍼져나가기를 바라셔서였을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으로부터 그토록 큰 은총을 입은 카인의 후손 라멕은 자신에게 가볍게 상처를 입힌 사람과 막대로 자신을 건드린 사내 아이를 무자비하게 살해하고서는, 두 아내 앞에서 “나를 조금이라도 해치는 이는 누구든지 일곱 배가 아니라 ‘일흔일곱 배’로 앙갚음을 할 것이다!”라고 자랑삼아 떠벌립니다(창세 4,23-24). 그의 부족함과 악함 때문에 하느님께 받은 용서와 자비의 은총이 회개와 사랑의 실천이라는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이고, 그로 인해 라멕은 지옥에서 자기가 저지른 행실대로 갚음을 받게 되었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기 형제가 자기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하느냐고, 일곱 번까지 해주면 되겠느냐고 질문합니다. 물론 베드로 딴에는 꽤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결심해서 드린 질문일 것입니다. 당시 유다교 랍비들이 일반적으로 가르친 용서의 한계가 ‘두 세번’ 정도였으니, 일곱 번 정도의 용서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단의 리더로써 최선을 다하려는 자기 노력과 진심을 알아주실거라 기대했겠지요. 그러나 베드로가 말한 용서가 잘못을 저지른 형제의 회개를 위한 것이라면 아직 한참 부족합니다. 앞서 언급했던 라멕의 경우처럼 사람은 자기가 입은 자비는 쉽게 잊어버리고 자기가 받은 피해를 일흔일곱 배로 앙갚음하려 드는 부족하고 악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용서를 형제가 자기에게 잘못하는 것을 참고 견디는 것 정도로 여긴 것인데 그런 건 참된 용서라고 할 수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는 횟수를 정해놓고 적당히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가 그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그가 회개하여 올바른 길로 돌아올 때까지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건이나 한도를 정하지 않고 상대의 악함을 더 큰 선으로, 상대의 허물을 더 큰 자비로 품어 안으려는 사랑의 마음이 필요하지요.

 

그런 점을 알려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그 비유에는 주인으로부터 ‘일만 탈렌트’라는 큰 ‘빚’을 진 종이 등장하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 돈으로 6조원에 해당하는, 일반인은 그 액수를 가늠할 수 조차 없는 큰 금액이지요. 그런데 주인은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땅에 엎드려 애원하는 그 종의 모습을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를 탕감해줍니다. 여기서 채무를 가리키는 용어의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빚’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오페이테레스’는 돈을 갚아야 하는 책임과 의무, 그리고 돈을 제대로 갚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까지 포함하는 개념인 것에 비해, ‘부채’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다네이온’은 상호 동등한 두 주체의 경제적 거래 차원에 집중하는 개념이지요. 주인은 그 종의 채무를 탕감해줌으로써 주인에게 금전적 피해를 끼쳤다는 죄책감에서 그를 해방시켜 주는 대신, 그도 주인과 동등한 ‘자비의 주체’로써, 자신에게 금전적 피해를 입힌 동료의 채무를 탕감해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던 겁니다. 다시말해 그가 자신이 베푸는 자비를 그저 받기만 하는 ‘종’의 신분으로 남지 않고, 자신처럼 자비를 베푸는 자기 ‘형제’로 변화되기를 기대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 ‘무자비한 종’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가 동료에게 꾸어준 ‘백 데나리온’은 원래부터 그의 것이 아니라, 주인에게 받은 일만 탈렌트에서 나온 것임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동료’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쉰둘로스’는 ‘함께 종 된자’라는 뜻이지요. 즉 그 동료는 그와 ‘같은 주인’을 섬기는, 자신처럼 주인이 베푸는 은총과 자비가 없이는 살 수 없는 부족하고 약한 존재인 겁니다. 그 점을 생각했더라면 빚진 동료를 감옥에 가두는 무자비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처럼 부족함과 약함을 안고 하루 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그를, 자신처럼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엎드려서 비는 것 밖에 없는 무력한 그를 안쓰럽게 여겨 일으켜 세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와락 끌어 안으며 ‘그 빚은 안 갚아도 괜찮다’고, 나도 거저 큰 은혜를 입었으니 당신에게도 거저 베푸는 게 당연하다고, 대신 당신도 다른 이에게 그렇게 해주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인의 바람대로 그의 ‘형제’, ‘가족’으로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 속 비유의 의도는 우리에게 용서를 ‘의무’로 강요하는 게 아닙니다.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는다고 겁주려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용서와 자비의 은총이 나를 통해 형제들에게 전해져야만, 비로소 그 은총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완성된다는 뜻이지요. 내가 실천한 용서가 나에게 잘못한 그를 죄책감에서 자유롭게 풀어주면 그와 나 사이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내가 실천한 자비가 나를 미움과 원망으로부터 자유롭게 풀어주면 하느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닮은 완전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일만 탈렌트’만큼 큰 용서와 자비의 은총을 입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내가 형제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면 하느님께 받은 큰 은총을 인식조차 못하고 사는 불행한 존재가 되고 말지요. 하지만 ‘하루에 한 데나리온씩’만 용서와 자비를 실천해도 내가 받은 은총의 가치가 보입니다. 그러면 그 은총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기뻐하게 되고, 그 기쁨은 더 많은 형제에게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겁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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