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11일 (금)
(녹)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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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 마태오신부님(빠다킹신부님) 9월 11일 https://cafe.daum.net/bbadaking/4Zol/7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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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양석 [pys2848] 쪽지 캡슐

2026-09-10 ㅣ No.191807

2026년 9월 11일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학창 시절에 다른 사람의 외모를 비하하는 별명을 부르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제게도 별명을 붙였습니다. 개그맨 누구를 닮았다면서 ‘이원숭’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이 친구에게 ‘개구리’라고 불렀습니다. 약간 눈이 튀어나왔거든요. 제 말에 불같이 화를 내는 것입니다. 저는 “너도 내게 ‘이원숭’이라고 부르잖아.”라면서 화를 낼 수 없었습니다. 싸움을 잘하는 친구였거든요.

 

소위 ‘내로남불’인 친구였습니다. 이 친구에게 많은 친구가 있었을까요?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이 적지 않아 보입니다. 자기가 준 상처는 생각하지 않고, 남에게 받은 상처만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 친구에게 받은 상처만 크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신경을 쓰지 않아야 자기에게 더 유익합니다. 아예 받아들이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저도 ‘이원숭’이라는 별명을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 개그맨과 가까운 관계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단군의 자손이라고 말입니다. 상처로 아예 받아들이지 않으니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영향받지 않으니, 그렇게 부르는 친구도 없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형제의 눈에 티가 있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보다 티를 빼 주려는 내 눈에 들보가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전혀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자비와 겸손으로 더 정확하게 보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자기의 큰 잘못은 보지 못하면서 형제의 작은 잘못만 놀랍도록 정확하게 알아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에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자기 죄를 깊이 깨달을수록 다른 사람의 죄를 가볍게 여기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심각성을 알면서 죄인에게 왜 자비가 필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바로잡기 전에 먼저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형제의 티를 보기 전에 제 눈의 들보를 보게 해 주십시오. 제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지 말고 형제를 살리게 해 주십시오. 단죄하는 눈이 아니라, 스승이신 예수님의 자비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해주십시오.”

 

결국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의 눈을 치유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이 치유되어야 길을 잃은 사람을 올바로 인도할 수 있고, 형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그의 눈에서 티를 빼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눈으로 형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사과는 사랑스러운 향기다. 사과는 아주 어색한 순간을 우아한 선물로 바꾼다(마가렛 리 런백).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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