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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관한 ‘비밀’ - ④) 미사의 희생 제사는 어떻게 재해석되어 왔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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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신앙에서 거룩한 미사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다>
가톨릭 신앙에서 거룩한 미사는 단순한 식사가 아닙니다. 미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칼바리아에서 당신 자신을 아버지께 봉헌하신 희생 제사를 성사적으로 현재화하는 제사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Ecclesia de Eucharistia, 2003)에서 이 점을 매우 분명하게 가르쳤습니다. 그는 성찬례를 단순히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는 행위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성체성사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깊이 각인되어 있으며, 그것을 단순히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성사적으로 재현한다." ("The Eucharist is indelibly marked by the event of the Lord's passion and death, of which it is not only a reminder but the sacramental re-presentation.")
그리고 이어서 더욱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성체성사의 희생은 하나의 동일한 희생이다." ("The sacrifice of Christ and the sacrifice of the Eucharist are one single sacrifice.")
요한 바오로 2세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미사의 희생 제사와 성찬의 만찬을 서로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미사는 동시에, 그리고 불가분하게, 십자가의 희생이 지속되는 희생의 기념이며 주님의 몸과 피와 친교를 이루는 거룩한 만찬이다." ("The Mass is at the same time, and inseparably, the sacrificial memorial in which the sacrifice of the Cross is perpetuated and the sacred banquet of communion with the Lord's body and blood.")
따라서 희생과 만찬은 서로 경쟁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성체성사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희생과 분리된 별개의 식사가 아니라, 십자가의 희생을 현재화하는 성체성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만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하나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미 2003년 당시 교회 안에서 성체에 대한 ‘축소된 이해’가 나타나고 있음을 직접 경고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때때로 성체의 신비에 대한 극도로 축소된 이해가 나타난다. 희생적 의미가 벗겨진 채, 단순히 형제적 만찬인 것처럼 거행되는 경우가 있다." ("At times one encounters an extremely reductive understanding of the Eucharistic mystery. Stripped of its sacrificial meaning, it is celebrated as if it were simply a fraternal banquet.")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지적한 것은 단순히 미사를 식사처럼 표현하는 언어상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성체의 신비 자체가 '극도로 축소된 이해'로 받아들여지는 현상을 지적했고, 그 결과 성체가 희생적 의미를 잃은 채 형제적 만찬처럼 거행되는 경우가 이미 당시 교회 안에 존재하고 있다고 경고한 것입니다.
더욱이 교황은 같은 문단에서 사도적 계승에 근거한 직무 사제직의 필요성이 흐려지고 있으며, 성체의 성사적 본질이 단순한 선포의 효과로 축소되는 현상까지 함께 언급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에 대해 깊은 슬픔을 표하면서, 성체는 "모호함과 평가절하를 용납하기에는 너무나 위대한 선물"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2004년 신앙교리성의 『구원의 성사』(Redemptionis Sacramentum)는 이러한 교황의 경고를 다시 확인하면서, 교회의 항구적인 가르침이 성체를 단순히 식사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희생 제사(pre-eminently as a Sacrifice)"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밝혔습니다. 또한 희생적 의미가 벗겨지면 성체의 의미가 단순한 형제적 만찬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다시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앞으로의 변화를 살펴볼 때 우리가 세워야 할 기준점입니다.
성체에는 희생이 있고, 현존이 있으며, 만찬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황이 경고한 것은 이 가운데 어느 한 차원을 지나치게 축소하거나 다른 차원으로 대체하여 성체의 신비 전체를 축소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후의 신학적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출발점 가운데 한 사람 ― 에드워드 쉴레벡스>
이 변화의 역사를 살펴볼 때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에드워드 쉴레벡스(Edward Schillebeeckx, O.P.)입니다.
에드워드 쉴레벡스는 네덜란드 도미니코회 사제이자 신학자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후의 가톨릭 신학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특히 교회론과 성사론, 그리스도론, 사제직에 관한 연구로 널리 알려졌으며, 네덜란드의 가톨릭대학교에서 오랫동안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2009년 선종했습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이 1980년에 출간된 『교회 직무』(Kerkelijk Ambt)입니다.
여기에서 쉴레벡스는 사제가 없는 특별한 상황에서 공동체가 선택한 사람이 성체를 집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신학적으로 제시했습니다.
그의 주장은 단순한 실천적 제안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정상적인 경우에는 성체 집전이 사도적 계승 안에서 성품을 받은 성직자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교회의 질서를 전제로 하면서도, 예외적인 상황에서 다른 방식의 성체 집전이 가능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제시했습니다.
이 문제는 단순히 누가 성체를 집전하는가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성체성사의 거행을 사도적 계승과 직무 사제직에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나아가 성체에 대한 교회의 신앙과 공경을 어떤 성사적 질서 안에서 지켜갈 것인가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1984년 이 문제에 대해 공식적으로 답변했습니다.
신앙교리성은 쉴레벡스가 말하는 "예외가 가능하다(exceptions are possible)"는 주장을 직접 언급하면서, 공동체가 자체적으로 성체를 거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할 수 있다는 그의 견해가 교회의 사도적 구조와 양립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신앙교리성은 특히 다음과 같이 강조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에게 맡기신 권한 가운데에는 성체를 이루는 권한도 포함되어 있다." "Included among these powers which Christ entrusted exclusively to the apostles and their successors is the power of confecting the Eucharist." 그리고 성체성사의 거행과 사제직의 관계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재확인했습니다.
따라서 쉴레벡스의 경우는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의 성사적 구조와 성체 집전에 관한 기존의 이해가 새로운 신학적 관점에서 재검토되었고, 그 재검토가 교도권의 공식적인 판단과 충돌한 실제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성체에 대한 공경과 경외의 문제도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체성사의 거행이 사도적 직무 사제직과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될 때, 성체 역시 단순한 공동체의 식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현존하시는 거룩한 성사로서 그에 합당한 공경과 흠숭의 대상이라는 점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요한 바오로 2세와 라칭거 추기경의 판단>
1980년대 중반 신앙교리성은 쉴레벡스의 성직 사역에 관한 후속 저술에 대해서도 공식적인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쉴레벡스의 성직 사역에 관한 개념이 "교회의 가르침과 중요한 점들에서 여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판단이 내려졌습니다.
당시 신앙교리성 장관은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Joseph Ratzinger)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례는 이후 교회 안에서 성체와 사제직, 성사 집전, 교회의 사도적 구조에 관한 전통적인 이해가 어떻게 새로운 신학적 해석의 대상이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중요한 사례가 됩니다.
그리고 이 점은 훗날 요한 바오로 2세가 2003년에 지적한 "사도적 계승에 근거한 직무 사제직의 필요성이 때때로 흐려지고 있다"는 문제와도 연결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005년 ― 희생과 친교는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2003년 요한 바오로 2세는 성체의 희생적 의미가 벗겨지고 단순한 형제적 만찬처럼 이해되는 현상을 경고했습니다.
그렇다면 2005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가 성체의 희생과 친교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005년 자료는 성체성사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역사 안에서 현재화하며, 그분의 죽음뿐 아니라 부활도 현재화한다고 설명합니다.
"성체성사는 시간과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재현하기 때문에 그분의 죽음뿐 아니라 부활도 현재화한다." ("the Eucharist being the re-enactment, in time and history, of the Sacrifice of Christ, makes present not only His death but also His resurrection") 그리고 성체는 동시에 "구세주와 이루는 가장 깊고 숭고하며 근본적인 친교의 원천(source of the deepest, most sublime and radical communion with the Redeemer)"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교회의 기준은 분명합니다.
희생과 친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희생을 현재화하는 성체성사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친교와 교회의 친교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후의 신학적 흐름을 살펴볼 때 기억해야 할 기준입니다.
<에드워드 킬마틴 ― 성체 희생신학을 역사적으로 다시 검토하다>
이러한 배경에서 에드워드 킬마틴(Edward J. Kilmartin, S.J.)의 연구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킬마틴은 미국 예수회 사제이자 전례신학자로, 성체와 전례의 역사적·신학적 발전을 연구했습니다. 그는 1994년 선종했으며, 그의 연구를 정리한 『서방의 성체: 역사와 신학』(The Eucharist in the West: History and Theology)은 1998년에 출간되었습니다.
킬마틴의 특징은 성체의 희생을 단순히 부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서방 교회에서 성체와 희생에 관한 신학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다시 검토했습니다. 따라서 질문도 달라집니다.
"미사는 희생이다." 라는 명제를 단순히 반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성체의 희생을 역사적·성서적·신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킬마틴은 이후 등장하는 신학적 재해석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루이-마리 쇼베 ― 성체를 설명하는 신학적 틀을 다시 보다>
킬마틴이 성체 희생신학의 역사적 형성을 다시 검토했다면, 루이-마리 쇼베(Louis-Marie Chauvet)에게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간 변화가 나타납니다.
쇼베는 프랑스의 가톨릭 신학자이자 사제로, 현대 성사신학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대표적인 저서가 『상징과 성사』(Symbol and Sacrament: A Sacramental Reinterpretation of Christian Existence)입니다. 쇼베의 중요한 특징은 성사를 설명하는 전통적인 실체(substance), 인과성(causality), 형이상학적 범주를 그대로 반복하기보다, 상징(symbol), 관계, 공동체적 참여를 중심으로 성사신학을 새롭게 구성하려 했다는 점입니다.
그의 성체론에서도 중요한 질문은 단순히 "성체는 희생인가, 아닌가?"에 머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자기 봉헌과 성체의 희생을 어떤 신학적 언어로 이해할 것인가라는 문제 자체가 다시 제기됩니다.
따라서 쇼베에게서 중요한 변화는 희생을 만찬으로 단순히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성체를 설명하는 신학적 사고의 틀 자체를 재구성하려는 시도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킬마틴과 쇼베의 역할은 구별됩니다.
킬마틴은 성체 희생신학의 역사적 형성을 다시 검토했고, 쇼베는 성사를 설명하는 신학적 틀 자체를 다시 구성하려 했습니다. <데이비드 파워 ― 희생을 선물과 친교의 관계에서 다시 해석하다>
쇼베와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인물이 데이비드 노엘 파워(David Noel Power, O.M.I.)입니다.
파워는 가톨릭 사제이자 신학자로, 성체의 희생과 현존, 친교의 관계를 연구했습니다.
그의 특징은 성체의 희생을 단순히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과 선물(gift), 그리스도의 현존과 친교의 관계를 새롭게 해석하려 한 것입니다.
특히 그는 성체를 이해할 때 우리의 봉헌만을 강조하기보다 하느님의 선물과 그 선물을 통해 이루어지는 친교에 주목했습니다. 따라서 파워에게서 나타나는 변화는 쇼베와 조금 다릅니다.
쇼베가 성사를 이해하는 신학적 틀을 문제 삼았다면, 파워는 그 틀 안에서 희생이라는 개념의 중심성을 선물과 친교의 언어를 통해 다시 해석하려 했습니다. 이 때문에 파워는 이후 성체를 선물·친교·공동체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전례신학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연결고리로 볼 수 있습니다. <현대 전례학의 확장 ― 말씀·식사·공동체>
이러한 신학적 재해석과 함께 현대 전례학에서는 성찬례를 바라보는 범주도 넓어졌습니다.
이 흐름을 보여주는 인물이 고든 래스럽(Gordon Lathrop)입니다.
래스럽은 가톨릭 신학자가 아니라 미국의 루터교 목회자이자 전례학자입니다.
그는 전례를 말씀(Word)과 식사(Meal)의 구조로 이해하면서 공동체의 삶과 전례의 관계를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래스럽은 가톨릭 성체신학의 직접적인 계보라기보다는, 현대 전례학 전체에서 성찬례를 설명하는 언어가 제사와 제물에서 말씀·식사·기억·감사·친교·공동체 등으로 확대되어 간 배경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존 발도빈 ― 성체의 여러 차원을 함께 바라보다>
이러한 전례학적 배경 속에서 현대 가톨릭 전례신학의 인물로 존 F. 발도빈(John F. Baldovin, S.J.)을 볼 수 있습니다.
발도빈은 미국 예수회 사제이자 가톨릭 전례학자로, 전례개혁과 성체신학을 연구했습니다.
그는 성체를 그리스도의 자기 봉헌, 현존, 공동체, 교회, 선교 등의 여러 차원과 함께 이해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특정한 하나의 의미를 다른 의미로 교체하는 것보다, 성체의 여러 차원을 함께 설명하려는 통합적 접근이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발도빈은 앞선 쇼베나 파워와 달리, 성체의 의미를 다시 해체하는 인물이라기보다 현대 전례신학 안에서 성체의 여러 차원을 함께 묶어 설명하는 방향을 보여주는 인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케빈 어윈 ― 성체를 여러 모델로 체계화하다>
이러한 접근은 케빈 어윈(Kevin W. Irwin)의 『성체의 모델들』(Models of the Eucharist, 2005)에서 더욱 체계적으로 나타납니다.
어윈은 미국의 가톨릭 사제이자 전례신학자로, 가톨릭대학교 미국에서 전례학을 가르쳤으며 신학대학원 학장을 역임했습니다.
그는 성체를 하나의 모델로만 설명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여러 모델을 제시합니다.
특히 "주님의 만찬"과 "성사적 희생"을 서로 다른 신학적 모델로 제시한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그는 현대 성체신학에서 사용되는 여러 의미를 '모델'이라는 방식으로 병렬적으로 체계화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토머스 리스 ― 신학적 논의가 직접적인 교회 담론으로 나타나다>
토머스 리스는 미국 예수회 사제이자 저널리스트·신학자로, 가톨릭 주간지 『아메리카』(America)의 편집장을 지냈으며 이후에도 가톨릭교회와 교황권, 전례와 성체, 교회와 사회 문제에 관한 글을 지속적으로 발표해 왔습니다.
그는 또한 교회의 여러 교리적·윤리적 쟁점을 둘러싸고 교도권과 긴장 관계를 형성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아메리카』 편집장으로 재직하던 시기에는 종교다원주의, 낙태, 동성애, 사제 독신제, 가톨릭 정치인의 영성체 문제 등과 관련하여 논쟁적인 글들이 잡지에 게재되었고, 이에 대해 교황청 신앙교리성이 여러 차례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결국 2005년 리스는 『아메리카』 편집장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리스는 현대 가톨릭 신학과 교회 담론에서 전통적인 가르침을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흐름을 살펴볼 때 주목할 만한 인물입니다.
앞선 신학자들이 주로 학문적·신학적 언어를 통해 성체를 재해석했다면, 토머스 리스에게서는 이러한 논의가 훨씬 직접적인 언어로 나타납니다.
2019년 리스는 성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미사는 예수님을 흠숭하거나 심지어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The Mass is not about adoring Jesus or even praying to Jesus.") "궁극적으로 미사는 빵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에 더 관한 것이다." "Ultimately, the Mass is more about us becoming the body of Christ than it is about the bread becoming the body of Christ."
그의 설명에서 성체의 중심은 점점 공동체, 그리스도의 몸이 됨,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위한 사랑, 정의와 평화, 그리스도의 사명을 계속 수행하는 것으로 이동합니다.
이러한 경향은 2024년 리스의 글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는 미국의 성체 부흥운동이 "예수님의 실제 현존(Jesus’ real presence)"에 지나치게 집중한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흠숭하도록 제대 위에 현존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받아먹고 우리가 받아 모신 분과 같은 존재가 되도록 현존하신다." ("Christ is not made present on the altar table so that we can worship him. He is present so that we can eat him and become what we eat.")
이 표현은 지금까지 조사한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실제 현존에 관한 논의를 부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실제 현존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무엇을 그 중심적인 의미로 강조할 것인가에 대한 관점의 변화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 대안으로 먹음, 공동체, 그리스도의 몸이 됨, 선교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2025년 12월 23일 리스는 「성체는 예수님을 흠숭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The Eucharist is not about adoring Jesus)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습니다.
제목 자체가 상당히 직접적입니다.
그는 미국 성체 부흥운동이 성체 안의 예수님의 실제 현존에 거의 집중하면서 성체가 지닌 다른 의미들을 소홀히 했다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수님을 흠숭하고 싶다면 미사에 가지 말고 성체강복에 가라." ("If you want to adore Jesus, don’t go to Mass, go to Benediction.")
여기에서는 상당히 분명한 구분이 이루어집니다. 리스는 미사와 성체강복·성체조배를 구분하면서, 미사의 의미를 예수님에 대한 흠숭 자체보다 감사와 공동체의 변화,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는 데 더 강하게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는 어디에 와 있는가?>
킬마틴에게서는 성체 희생신학의 역사적 형성을 다시 검토하는 작업이 나타났고, 쇼베에게서는 성사를 설명하는 전통적인 신학적 틀 자체를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나타났습니다.
파워에게서는 희생을 선물과 친교의 관계 안에서 다시 해석하려는 방향이 나타났으며, 이후 전례학에서는 말씀·식사·기억·감사·공동체·친교·선교와 같은 범주가 더욱 강조되었습니다.
발도빈은 성체의 여러 차원을 함께 바라보는 통합적인 접근을 보여주었고, 어윈은 이를 여러 신학적 모델로 체계화했습니다.
그리고 토머스 리스에게서는 이러한 논의가 보다 직접적인 교회 담론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흐름을 하나의 직선으로 표현하기보다는, 희생의 역사적 재검토 → 성사 이해의 재구성 → 선물과 친교의 강조 → 말씀·식사·공동체·선교의 확대 → 여러 성체 모델의 병렬화 → 실제 현존과 흠숭에 대한 강조 방식에 대한 비판
이라는 복합적인 흐름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성체의 여러 차원 가운데 무엇이 중심에 놓이는가라는 문제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성체를 희생, 실제 현존, 친교, 만찬, 감사, 교회의 일치와 선교가 서로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신비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문제는 단순히 성체의 여러 차원 가운데 하나를 강조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 차원을 성체의 다른 차원들과 분리하고, 다른 차원의 의미와 중요성을 약화시키거나 그것을 대신하는 중심 개념으로 만들 때 발생합니다.
특히 희생을 친교로, 실제 현존을 공동체적 상징으로, 흠숭을 공동체의 참여와 선교로 대체하는 방향으로 이해될 때, 그것은 성체의 여러 차원을 풍요롭게 설명하는 것을 넘어 성체의 신비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들의 관계 자체를 바꾸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요한 바오로 2세가 2003년에 경고한 말씀이 다시 중요해집니다.
성체의 희생적 의미가 벗겨지고 "단순히 형제적 만찬인 것처럼" 거행되는 현상에 대한 그의 경고는, 단순히 미사의 한 측면이 덜 강조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성체의 신비가 희생적 의미를 잃으면서 축소되는 현상을 지적했습니다.
따라서 요한 바오로 2세의 경고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신학적 흐름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성체의 의미를 새롭게 설명하는가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성체를 성체이게 하는 핵심적인 신비가 보존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바로 이 기준에서 성체에 관한 성모님의 메시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강조하시는 성체의 중심 ― 실제 현존과 흠숭>
앞에서 살펴본 신학적 흐름을 이러한 기준에서 바라볼 때, 성체에 관한 성모님의 메시지는 매우 다른 방향을 강조합니다.
마리아 사제운동의 1988년 성목요일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성체성사의 제정과 새 사제직의 제정이 함께 이루어진 사실을 강조하시면서, 사제들을 예수님의 사제적 사명에 참여하도록 불린 이들로 설명합니다.
또한 사제들에게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 깊은 흠숭과 감사와 보상을 드리도록 권고하시며, 축성된 제병 안에 예수님께서 참으로 현존하신다고 강조합니다.
(377. 예수 성체의 요한들,7) "나는 또 너희가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 깊은 흠숭과 감사와 보상을 드리며 삶과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 습관을 붙이도록 인도한다. (...) 축성된 모든 '제병'에는 그 흰 형상 안에 감추인 예수께서 참으로 너희 가운데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성모님께서 실제 현존과 친교를 서로 분리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 친교의 출발점은 인간 공동체 자체가 아닙니다. 성체 안에 참으로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입니다.
더 나아가 성모님께서는 성체를 교회 안의 ‘옥좌’에 모시고 신자들의 존경과 흠숭을 받으시게 하며, 성체를 자주 현시하여 공경받으시게 하라고 권고합니다. (377. 예수 성체의 요한들,12) "이제 나는 너희에게 이 엄마의 뜻을 털어놓거니와, 그것은 예수님의 '성체'를 너희 교회 안의 당신 '옥좌'에 모심으로써 신자들의 존경과 흠숭을 받으시게 하라는 것이다. 천사들과 성인들과 연옥 영혼들의 무수한 군대 역시 거기 계시는 분을 영원히 에워싸고 있다. 그리고 너희의 사랑과 효경의 표시로 이 '지극히 거룩한 성사'를 꽃과 등불로 둘러싸기 바란다. 자주 현시하여 신자들의 공경을 받으시게 하여라. 모여서 공동으로 바치는 흠숭의 시간을 늘임으로써 그분께서 받으시는 무관심, 능욕, 수많은 모독, 끔찍한 독성죄를 보상하여라. 끔찍한 독성죄는 불경스런 악마 예배인 검은 미사 중에 저질러지는데, 갈수록 널리 퍼지는 그 모독적인 예배의 절정은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를 겨냥하여 형언할 수 없도록 추잡한 짓거리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 특별히 강조하시는 것은 성체 안의 예수님의 실제 현존과 그분께 드리는 흠숭과 공경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현대적 접근 가운데 공동체·친교·식사·선교 등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과 단순히 대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모님의 메시지는 그 모든 것이 누구와의 관계에서 시작되는지를 분명히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체의 중심에는 공동체 자체가 아니라, 성체 안에 참으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중심에 계실 때, 그분과의 친교는 공동체의 친교로 이어지고, 그분께 드리는 흠숭은 삶과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다시 확인해야 할 것> 성체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현존하십니다. 그러므로 성체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며, 단순한 공동체적 상징도 아닙니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현재화하며,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현존하시는 거룩한 신비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현존을 믿는다면 자연스럽게 흠숭과 공경이 뒤따릅니다.
결국 우리가 다시 바라보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성체의 여러 의미를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의미의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체는 우리를 하나로 모으기 위한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참으로 현존하시는 신비입니다. 그분과의 친교에서 공동체가 생겨나고, 그분께 대한 흠숭에서 사랑과 선교의 삶이 흘러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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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5 | 박소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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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김건태 신부님 묵상 |
2026-08-25 | 최원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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