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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8주간 수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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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窮)하면 통(通)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궁하다는 것은 막다른 곳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고,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끼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뜻밖의 길이 열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궁하면 통한다.’라고 말합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인간의 길이 막힌 자리에서 하느님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내 힘이 다한 자리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통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반도체가 ‘HBM’ 메모리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이전의 반도체가 한 층으로 된 단층 구조였다면, HBM 반도체는 여러 층을 쌓아 올리는 방식이라고 합니다. 이런 발상을 했던 과학자가 서울에서 대전으로 가는 차 안에서 길가의 아파트 공사를 보았다고 합니다. 아파트의 층이 하나씩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반도체도 저렇게 층층이 쌓으면 더 많은 정보를 담고 더 빠른 성능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꿈같은 이야기였지만, 그 발상이 인공지능 시대를 만나면서 큰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막혀 있는 것처럼 보였던 기술의 한계가 새로운 생각을 통해서 열리게 된 것입니다. 저도 사목 현장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작은 성당에서 가정방문을 하다가 태권도 사범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성당에서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사범님은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7명의 아이가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100명이 넘는 아이들이 태권도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태권도를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성당에 오게 되었고,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이들이 세례를 받자, 부모님들도 성당에 나오게 되었고, 부모님들도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작은 시작이 큰 결실이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궁하면 통한다.’라는 말을 사목 현장에서 체험했습니다. 차동엽 신부님은 ‘통하는 기도’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내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내가 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과 나의 마음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궁한 처지에 있을 때, 기도는 더 간절해집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께 마음을 열게 됩니다. 그래서 궁한 사람의 기도는 때로 더 깊고, 더 진실합니다. 부족하기에 기도하고, 막혔기 때문에 두드립니다. 그리고 그 두드림 안에서 하느님의 문이 열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안에서 궁한 사람들에게 통하는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베짜타 못가에 있던 병자는 서른여덟 해 동안 아무도 자기를 못에 넣어 주지 못한다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라고 하셨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은 세상의 편견 속에 살았지만, 예수님을 만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병환자는 사람들 가까이 갈 수도 없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손을 내미시고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백인대장은 이방인이었지만, 자기의 종을 살려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 종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모두가 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두가 막다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들의 삶은 통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여인은 이방인이었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의 시선으로 보면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갈 자격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딸이 마귀 들려 몹시 고통받고 있었기에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도, 제자들의 냉담함도, 예수님의 침묵도 그 여인을 멈추게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말씀하셨을 때도 그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그 말 안에는 절망이 아니라 믿음이 있었습니다. 체념이 아니라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자존심을 앞세우는 마음이 아니라, 딸을 살리고 싶은 어머니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자기 처지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가 자기 처지보다 크다는 것도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그 순간 여인의 딸은 나았습니다. 궁한 여인의 기도가 예수님의 자비와 통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막히는 순간이 있습니다. 건강이 막히고, 관계가 막히고, 일이 막히고, 마음이 막힐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그때를 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때가 바로 기도의 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바로 하느님의 은총이 통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궁한 자리는 부끄러운 자리가 아닙니다. 궁한 자리는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자리입니다. 궁한 자리는 믿음이 깊어지는 자리입니다. 시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 네 길을 맡겨라.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 이 말씀은 달리 말하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물론 이 말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고통이 사라지고, 문제가 한순간에 풀리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삶이 막히고, 마음이 무너지고, 길이 보이지 않을 때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맡기면, 하느님의 때에, 하느님의 방법으로, 하느님께서 길을 열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의 가나안 여인은 바로 그 믿음을 보여 줍니다. 딸이 고통받고 있었고, 사람들의 시선은 차가웠고, 예수님의 응답도 처음에는 침묵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라는 그 간절한 기도 안에는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라는 믿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 믿음은 결국 예수님의 마음과 통하였고, 딸은 치유되었습니다. 우리는 쉽게 포기합니다. 한두 번 기도하다가 응답이 없으면 그만둡니다. 한두 번 노력하다가 결과가 없으면 내려놓습니다. 그러나 오늘 가나안 여인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믿음은 끝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쉽게 물러서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야구에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붙잡는다면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닙니다. 궁하면 통합니다. 그러나 저절로 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두드릴 때 통합니다. 겸손으로 엎드릴 때 통합니다. 사랑으로 포기하지 않을 때 통합니다. 오늘 복음의 가나안 여인처럼, 우리도 삶의 막다른 자리에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기도는 절대 헛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넓고,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깊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궁하면 통하는 것이 신앙의 힘입니다. 주님께 맡기고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잘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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