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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신부님_혼자 믿는 신앙은 왜 무너지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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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의심의 대명사로 불리는 성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뒤늦게 돌아온 그는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기뻐하자 그만 자존심이 상합니다. '왜 나만 빼놓았단 말인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내 손가락을 그 상처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 우리는 흔히 토마스의 이 이성적 의심을 탓합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의 이성이 아니라, 그가 공동체를 벗어나 홀로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첫 발현의 순간,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이 그의 불행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드레 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가 다시 공동체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찾아오십니다. 그가 형제들 곁으로 돌아온 바로 그때 부활하신 그분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고는 뼈아픈 말씀을 남기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참조) 도대체 보지 않고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이 말씀은 눈을 감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 개인의 눈'이 아니라 '공동체의 눈'으로 보라는 준엄한 초대입니다. 토마스는 제 눈으로만 보려다 여드레를 어둠 속에서 헤맸습니다. 그러나 그가 공동체로 돌아왔을 때, 비로소 그 눈이 열렸습니다. 믿음은 나 홀로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믿는 이들 안에서 받아 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신자가 정반대의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나는 주일 미사 거른 적 없고 성체도 꼬박꼬박 모시니 됐다. 성당 사람들과 부대끼며 상처받는 일은 질색이다. 내 신앙은 나 혼자 지킨다.' 이것은 철저한 예외 의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독야청청하는 개인의 신앙을 인정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 백성이라는 울타리 없이 나 홀로 성사만 챙겨 구원받겠다는 것은, 십자가의 길을 피해 가려는 가장 교묘한 이기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법칙을 짚어야 합니다. 한 생명이 어느 공동체에 속하려면, 반드시 같은 부모를 공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한 방송에서 '개가 고양이를 낳았다'는 소동이 있었습니다. 어미 개가 제 새끼들 틈에 고양이 새끼 한 마리를 품고 젖을 먹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알고 보니, 출산하던 그 짧은 사이에 밖에서 태어난 고양이 새끼를 제 새끼인 줄 물어 왔고, 냄새가 섞이자 제 자식으로 품은 것이었습니다. '부모의 흔적'인 냄새가 같아졌기에, 그 고양이는 개의 무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를 보십시오. 백조 새끼는 오리 무리 안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끝내 겉돌고 튕겨 나갑니다. 공동체란 본디 같은 부모를 증명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모기처럼 제 피만 빨려던 이기적 인간이, 공동체 안에서 기꺼이 제 피를 나누는 사람으로 변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거룩하게 낳으신 하느님 아버지의 유전자가 작동한다는 증거입니다. 구약의 파스카 이야기가 이 법칙을 소름 돋도록 준엄하게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던 그 밤, 하느님께서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 명하시며 무서운 단서를 다십니다. "너희는 아침까지 아무도 자기 집 문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 (탈출 12,22 참조)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파스카 양고기를 배불리 먹고 문설주에 피를 발랐어도, "나는 하느님을 믿으니 잠깐 밤바람이나 쐬고 오겠다"며 그 집, 곧 공동체 밖으로 나간 자는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고기를 먹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 죽음의 밤을 함께 이겨 내고 하느님 백성으로서 함께 광야를 걷는 공동체적 결속, 그것이 구원의 진짜 핵심이었기 때문입니다. 파스카는 혼자 먹는 밥이 아니라, 한 지붕 아래 함께 먹는 밥이었습니다. 이 파스카가 곧 오늘의 성체성사입니다. 성체는 나 홀로 우아하게 누리는 개인의 양식이 아니라, 한 몸을 이루게 하는 공동체의 양식입니다. 사도 바오로께서 이를 분명히 하십니다.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가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하나의 빵을 나누어 먹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7 참조) 같은 빵을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같은 아버지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요, 그렇게 우리는 한 몸이 됩니다. 그러니 성체를 모시고도 형제와 한 몸이 되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파스카 양고기만 입에 넣고 문밖으로 뛰쳐나가는 어리석음과 같습니다. 이 빛에서 보면, 우리 교회가 삼 년간 고해성사를 보지 않은 이를 냉담 신자로 규정하는 행정적 기준은 어쩌면 본질을 살짝 비껴간 것일지 모릅니다. 참된 냉담은 성사를 쉬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떠나는 것입니다. 가리옷 유다를 보십시오. 그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 손에 직접 빵을 받아 모셨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자리를 떠나 어둠 속으로 나갔습니다. 복음은 그 순간을 짧고 서늘하게 전합니다. "그는 곧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요한 13,30 참조) 성체를 모시고도 공동체를 등지고 밤으로 나간 그가, 참된 냉담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도행전의 하나니아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제 재산의 일부를 몰래 감춘 채 공동체에 속한 척하려다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습니다(사도 5,1-5 참조). 그의 진짜 아버지는 하느님이 아니라 돈과 탐욕이었기에, 하느님의 유전자를 나누는 공동체에 도무지 섞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다른 이는 결코 그 공동체에 머물지 못합니다. 반대로, 아버지가 같아지자 원수마저 형제가 된 이야기도 있습니다. 요셉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를 구덩이에 던지고 종으로 팔아넘긴 형제들이었지만, 훗날 굶주려 이집트로 내려온 그들을 요셉은 이렇게 끌어안습니다.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긴 일로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생명을 구하시려고 저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 45,5 참조) 갈라졌던 형제들이 다시 한 밥상에 둘러앉아 한 공동체가 된 것은, 그들이 한 아버지 야곱의 자녀임을, 그리고 그 위에 계신 한 분 하느님의 섭리를 함께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아버지를 알아보는 순간, 배신자도 형제로 돌아옵니다. 이것이 공동체의 은총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는 독방에서 홀로 만족하는 내 기도 속이 아니라, 나와 좀처럼 맞지 않는 형제자매와 부대끼고 깨어지며 사랑을 실천하는 그 거칠고 투박한 공동체 안에서 당신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니 스스로 예외라는 껍데기를 부수십시오. 나 홀로 성사만 누리겠다는 이기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의 몸인 공동체에 기꺼이 순명하십시오. 토마스가 공동체로 돌아왔을 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듯이, 우리도 형제들 곁으로 돌아설 때 그분을 뵙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참조) 오늘 성체성사로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은 우리가, 세상 한복판에서 '그리스도'라는 참된 아버지를 증명해 내는 거룩하고 끈끈한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 번호 | 제목 | 등록일 | 작성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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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신부님_* 오늘의 말씀(7/3) : 성 토마스 사도 축일 |
09:49 | 최원석 |
| 190421 |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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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신부님_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의 삶으로 넘어갑시다! |
09:49 | 최원석 |
| 190419 |
전삼용 신부님_혼자 믿는 신앙은 왜 무너지는가 |
09:49 | 최원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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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일 금요일 / 카톡 신부 |
08:48 | 강칠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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