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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4일 (목)
(녹)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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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신부님_우리는 무엇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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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6-06-03 ㅣ No.189933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마르 12,27) 
 
찬미 예수님! 연중 제9주간 수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들과 예수님의 치열한 논쟁을 봅니다.
그들은 일곱 형제와 결혼한 여자가 부활하면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아주 유치하고도 인간적인 질문으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무지를 꾸짖으시며, 부활한 이들은 천사들과 같아진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아주 장엄한 결론을 내리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입술을 열어 대영광송을 부르며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정체성은 한없이 낮고 초라한 밑바닥에 내버려 둔 채 입으로만 부르는 찬미가
과연 하느님께 진정한 영광이 될 수 있을까요? 자기 정체성은 끌어올리지 않으면서 말로만 영광을 드리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공허한 소음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순간은, 우리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신성으로
끌어올려 주셨음을 굳게 믿고 그 위대한 본성에 맞게 살아갈 때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단순히 '죽어서 무덤에 묻힌 사람'과 '심장이 뛰어 숨을 쉬는 사람'을 구분하는 정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의 진짜 의미는 훨씬 더 거대하고 우주적입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산 이들'이란 단순히 호흡을 이어가는 생물학적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과 본성에 참여하여 '하느님과 똑같은 존재(神)'로 수직 상승한 위대한 상속자들을 의미합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굳이 인간을 하느님으로 만드셔야만 직성이 풀리실까요?
이 깊은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스승과 제자의 실화 하나를 먼저 들여다보겠습니다. 
 
눈멀고 귀먹어 짐승처럼 날뛰던 헬렌 켈러와, 그녀의 곁에서 평생을 바친 앤 설리번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처음 헬렌을 만났을 때, 헬렌은 손으로 음식을 마구 집어 먹고 화가 나면 사람을 물어뜯는 야생 동물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만약 설리번 선생님이 헬렌에게 밥을 잘 떠먹여 주고,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는 '친절한 사육사' 역할에만 만족했다면 어땠을까요?
헬렌은 평생 배부르고 안전한 짐승으로 살다 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설리번 선생님의 목표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피눈물 나는 인내심을 쏟아부어, 헬렌의 손바닥에 끊임없이 글자를 적어주었습니다.
물의 감각을 깨닫게 하고, 사랑의 의미를 가르쳤습니다.
왜 그토록 지독하게 가르쳤을까요? 헬렌을 그저 '살아있는 동물'이 아니라, 자신과 똑같이 생각하고, 사랑하고, 세상을 향해 웅변할 수 있는 '완벽한 인간'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헬렌 켈러가 자신의 본성을 인간으로 끌어올리지 않은 채, 개나 고양이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입으로만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 영광 받으세요"라고 웅얼거렸다면 그것이
스승에게 영광이 되었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마침내 1904년, 헬렌 켈러가 하버드 대학교의 래드클리프 칼리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던
날이었습니다.
헬렌이 학사모를 쓰고 세상에서 가장 지성적인 여인으로 당당하게 단상에 섰을 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설리번 선생님은 기쁨의 눈물을 펑펑 흘렸습니다. 
 
설리번 선생님에게 영광은 무엇이었을까요? "나는 평생 짐승 같은 아이를 굶기지 않고 잘 키운 보모다" 라고 말하는 것이 영광일까요? 아닙니다. "보십시오! 이 위대한 철학자이자 작가인 헬렌 켈러가 바로 나의 제자이며 나의 딸입니다!"라고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 스승의 진짜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제자가 스승과 똑같은 지성과 인격을 갖춘 고귀한 존재로 성장했을 때, 스승의 위대함도 완벽하게 증명되는 것입니다. (출처: 헬렌 켈러, 『내가 살아온 이야기』) 
 
하느님의 마음도 이와 정확히 똑같습니다.
부모가 "나는 죽은 아이의 부모다" 혹은 "나는 평생 밥만 먹고 뒹구는 식충이의 부모다"라고 말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겠습니까?
부모의 가장 큰 자랑은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이 아이의 부모다!"라고 외칠 때 완성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분은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라고 선언하신 것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는 고작 땅에 코를 박고 돈과 쾌락만 쫓아다니는 죽은 인간들의 신이 아니다.
나는 나와 똑같은 사랑을 실천하고, 나와 똑같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느님들(Gods)'의 아버지다!" 라고 당신의 가장 거룩한 자존심을 온 우주에 선포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 없다고 겸손한 척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 목적을 부정하는 지독한 교만이며, 하느님의 영광을 철저히 가리는 짓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과 욕구는 자신의 '본성'에서 나옵니다.
개라고 믿으면 땅에 떨어진 음식 찌꺼기를 탐하게 되고, 사람이라고 믿으면 식탁에 앉아 품위 있게 식사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죽어 흙으로 돌아갈 인간'으로만 믿는다면, 우리의 욕구는 철저하게 세상의 돈, 권력, 쾌락이라는 썩어 없어질 것들에만 머물게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 보시기에 죽은 자들의 무덤일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체성사를 통해 "나는 하느님의 피를 수혈받은 하느님이다!"라는 정체성을 굳게 믿게 되면, 우리의 욕구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느님처럼 원수를 용서하고, 하느님처럼 가난한 이를 위해 내 살을 내어주고 싶은 '거룩한 욕망'이 불타오르게 됩니다. 
 
우리 인간은 본래 죄악 속에서 40년, 80년 뼈 빠지게 일하다가 흙으로 돌아가야 할 일벌과 같은
비참한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한 일벌로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의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당신의 살과 피를 쥐어짜 내어 만든 영적 로열젤리, 곧 '성체'를 우리 입에 물려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성체를 먹는 순간, 우리 영혼 속에는 찌질한 인간의 유전자 발현이 멈추고, 썩지 않는 하느님의 거룩한 DNA가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꿀을 찾아 헤매는 일벌이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고 생명을 낳는 하느님 나라의 여왕벌, 즉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유일한 목적은 바로 인간을 하느님으로 만들기 위함이셨습니다.
이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처럼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 보시기에 '살아있는 자'가 되며 하느님께 완벽한 영광을 돌려드리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인 티모테오 2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두려움에 떠는 티모테오에게 이 위대한 정체성을 벼락처럼 일깨워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2티모 1,7).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돈이 부족할까 봐, 사람들에게 무시당할까 봐 불안해하는 그 '비겁함'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땅에 속한 인간의 죽은 본성일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네 안에 하느님의 힘과 사랑의 영이 있으니, 제발 고아처럼 굴지 말고 하느님의 상속자답게 불꽃을 피워 올려라!"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위대한 교부이신 성 이레네오 주교님은 『이단 반박』에서 이렇게 사자후를
토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완전히 살아 숨 쉬는 인간이며,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
(Gloria Dei vivens homo).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출처: 성 이레네오, 『이단 반박』). 
 
그렇습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최고의 영광은 나의 정체성을 하느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한복판에서 십자가를 지고 원수를 사랑하며 "보십시오 아버지! 제가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위대한 하느님입니다!"라고 당당하게 살아낼 때, 아버지는 가장 크게 영광을 받으십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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