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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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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착한 목자
어제 주일부터 우리가 읽고 묵상하는 복음 말씀은 예수님을 착한 목자에 비유하여 소개하는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이 비유 말씀의 출처를 찾아 올라가면, 구약시대 바빌론 유배지에서 소명을 받고 예언자로 활동한 사제 에제키엘의 작품에(에제 34장) 이를 수 있습니다. 에제키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국땅 바빌론으로 끌려와 유배라는 처절한 징벌 속에 놓이게 된 모든 책임은 사악한 지도자들에게 있음을 고발하면서, 하느님이 친히 “양들을 찾아서 보살필 착한 목자”로 나서실 것임을 예고합니다. 복음저자 요한은 이 비유 말씀을 예수님께 적용함으로써, 예언자의 말씀이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밝히려 합니다.
오늘 말씀 바로 앞부분, 곧 어제 주일 복음에서(10,1-10) 예수님은 당신을 양들이 드나드는 ‘문’으로 소개하셨습니다. 낮에는 양들을 이끌고 나가 방목하다가, 밤이 되면 양 우리로 모아들이는 목자, 늑대나 여우와 같은 사나운 짐승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키곤 했던 목자의 기능이 돋보이는 표현입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갑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애정이, 사랑의 목소리가 전제되며, 그 사랑에 대한 응답이 바로 따름입니다: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이어서 예수님은 이르십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이 바로 착한 목자의 기본 기능인 ‘구원의 문’이심을 밝히십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떼를 돌볼 생각은 하지 않고 이익 챙기기에만 급급했던 악한 목자들과는 전혀 다른, 자기 양들을 알고 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할 뿐만 아니라, 부드러운 목소리로 우리 밖의 양들까지도 불러 모으시는 목자입니다. 이 착한 목자를 중심으로, 그리고 그분을 본받아, 양들 또한 서로를 알고 사랑하며 희생을 아끼지 않는 전혀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착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어 고백하는 신약의 신앙공동체는 구약의 공동체와는 달리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열린 공동체입니다. 직업의 귀천이나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실천에 옮기려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기 때문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우리의 부활 신앙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자녀임을 드러내 보여야 할 부활 시기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예수님을 좀 더 깊이 알고 좀 더 가까이 따르는 몸짓이 될 수 있도록 소중히 다스려 나가는, 은총 가득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착한 목자”라 부르신다. 이 목자는 단순히 양들을 돌보는 사람이 아니라,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는 분이시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11절)라고 말씀하시며, 십자가 위에서 성취될 사랑의 완성을 미리 보여 주신다.
예수님은 착한 목자를 삯꾼과 대비시켜 말씀하신다. 삯꾼은 양에 대한 사랑이 없고,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다가 위험이 닥치면 양을 버리고 도망간다. 그러나 착한 목자는 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안다(14절).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그분은 ‘목숨을 준다.’고 하지 않고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고 하셨다. 이는 자발적으로, 자유롭게, 기꺼이 내어놓으심을 뜻한다.”(In Ioannem Hom. 59,3) 곧, 예수님의 희생은 강요된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비롯된 자유로운 헌신이었다.
예수님은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14절)라고 말씀하시며, 이 관계를 “아버지와 나의 관계”에 비유하신다. 이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사랑의 친밀한 일치를 뜻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그분을 알고, 그분은 은총을 통해 우리를 아신다.”(In Ioannem Tract. 45,3) 곧, 우리의 신앙 고백 안에서 주님을 알고, 주님의 은총 안에서 우리는 더욱 깊이 알려지고 사랑받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16절)라고 말씀하시며, 한 목자 안에서 한 양 떼를 이루는 보편적 구원의 뜻을 드러내신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모든 민족이 구원의 공동체 안에 불러들여 오리라는 약속이다. 성 치프리아노는 교회의 일치를 강조하며 이렇게 가르친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그리스도도 한 분이시며, 교회는 하나이고, 신앙도 하나이며, 모든 백성을 견고한 몸의 일치로 모으신다.”(De unitate Ecclesiae 23) 착한 목자는 모든 양을 모아 일치된 공동체로 세우신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18절)라고 말씀하시며, 아버지께 받은 명령을 자유롭게 완수하신다. 교회 헌장은 이렇게 선언한다. “그리스도, 착한 목자는 당신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으시며, 그들을 하나의 양 떼로 모아 한 목자 아래 일치시키신다.”(6항) 곧, 십자가의 순명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사랑의 절정이며, 동시에 교회의 일치를 이루는 근원이 된다. 예수님은 착한 목자로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으셨다. 우리는 이 목자이신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따라야 한다. 때로 세상의 이리와 같은 위험이 우리를 위협할지라도, 착한 목자는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병우 신부님_"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요한10,16)
'옴니부스 옴니아!'
오늘 복음(요한10,11-18)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착한 목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10,11.14-15)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요한10,16)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기쁨이며 희망!'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와 영원한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이 사랑과 구원이 유다인들과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를 넘어 모든 이에게로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옴니부스 옴니아(Omnibus Omnia)이신 분', 곧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 나의 사랑도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처럼 너에게로 열려져 있어야만 합니다. 끼리끼리를 뛰어 넘어 나와 다른 너에게로도 향해 있어야만 합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사도11,18)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십자 나무에 매단 유다인들은 자기들끼리 안에만, 율법이라는 틀 안에만 갇혀 있었던 사람들이고, 그 모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모든 이에게로 확장되어지는 사랑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가고, 착한 목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제들을 잘 따라가는 착한 양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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