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
전삼용 신부님_성체성사의 효과를 못 느끼는 이유: 가슴이 타올라야 눈이 열린다 |
|---|
|
"그제야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루카 24,31) 찬미 예수님!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 제3주일,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복음을 듣습니다. 이 이야기는 신앙생활의 가장 핵심적인 메커니즘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길을 걸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하다가, 주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비로소 눈이 열립니다. 하지만 그전에 반드시 거쳐야 했던 과정이 있습니다. 바로 길 위에서 예수님이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제자들의 가슴이 먼저 뜨겁게 타올랐다는 사실입니다. 왜 우리는 매주 성체를 모시면서도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할까요? 왜 성당 문만 나서면 다시 두려움과 걱정의 노예가 될까요? 오늘은 그 이유가 '말씀에 대한 무관심'과 '스승의 부재'에 있음을 명확히 파헤쳐 보겠습니다. 성체성사의 효과를 느끼지 못하는 첫 번째 부류는 말씀을 무시한 채 형식적인 영성체에만 매달리는 이들입니다. 말씀이 가슴을 데워놓지 않으면, 성체는 단지 밀떡일 뿐입니다. 2018년 6월, 이탈리아 남부 비보 발렌티아(Vibo Valentia) 근처의 산 탄토니오 성당에서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주일 미사 중 거룩하게 성체를 영하고 성당 문을 나선 한 50대 남성이, 주차 문제로 시비가 붙자 트렁크에서 흉기를 꺼내 이웃을 찔렀습니다. 그는 본당의 여러 소임을 맡아 하며 평생 미사에 빠지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출처: 이탈리아 일간지 「코리에레 델라 세라」, 2018.06.18 보도) 이 사건은 전 유럽 가톨릭계에 '신앙의 해리(Dissociation)'라는 화두를 던졌습니다. 그는 수만 번 성체를 모셨지만, 성체는 그에게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왜일까요? 오늘 복음이 그 해답입니다. 바로 말씀으로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은 채 성체를 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성체의 뜻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행동만 보면 그 사람이 이해될까요? 만약 여기 그림자만 보이는 두 아이로 보이는 물체가 있습니다. 둘 다 움직입니다. 한 아이는 걸음마를 하며 두 발로 일어서려 하고 한 아이는 원숭이 흉내를 합니다. 둘 다 진짜 아이일까요? 가림막을 걷어내면 정반대입니다. 사실 아기 때는 인간보다 원숭이가 더 인간 같을 수 있습니다. 행동만 봐서는. 이는 1931년,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의 심리학자 윈스럽 켈로그가 자기 아들 도널드와 침팬지 구아를 함께 키움으로써 증명되었습니다. 참 정체성을 알려면 행동보다 말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먼저 이해시켜 주신 이유가, 그래야 당신의 사랑의 행위인 빵을 떼어 나누어주는 행위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해야 함을 이해해야 성체성사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성체성사의 효과를 전혀 보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성당엔 사람들이 좋아서 다녔습니다. 어쩌면 지옥에 가기 싫어서 다녔는지 모릅니다. 미사의 의미를 크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성체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면 미사는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지적 호기심은 있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를 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예수님을 조금 더 자세히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 발토르타가 쓴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10권 전집을 만났습니다. 그 책은 성경 한 절 한 절을 마치 제가 예수님 옆에서 직접 보고 듣는 것처럼 가슴 뜨겁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주님의 숨소리와 제자들의 갈등, 십자가의 고통이 말씀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나 제 심장을 직격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왜 돌아가셔야 했는지가 조금 이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학교에 갔습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그러고 났더니 성체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체 안에 부활하시어 살아계심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제가 성경을 설명해 줄 가장 뜨거운 선생인 그 책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요? 지금까지도 성체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올 수 없음을 확신합니다. 일단 알아들어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 예화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두 아들에게 평생 나타나지 않던 아버지로부터 마지막 편지가 왔습니다. “이 편지를 읽을 때 즈음엔 나는 아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나는 너희 둘의 미래를 위해 먼 곳에서 일을 하다 보니 너희들이 크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구나. 미안하게 되었다. 내가 너희 둘을 위해 땅을 사 두었다. 그 땅에는 내가 평생 일해서 벌은 보물이 숨겨져 있다. 아버지는 병이 들어 이제 죽는구나. 너희의 행복을 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에게 이 편지를 가져왔습니다. 두 아들은 어리둥절했습니다. 그 땅으로 가서 둘은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몇 날 며칠을 파도 보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한 아들은 화가 나서, “평생 찾아오지도 않더니, 아버지가 우리를 끝까지 놀리시는군!” 하며 삽을 집어던졌습니다. 그러자 편지를 가져온 사람이 아버지의 사정을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들으려 하지 않고 가버렸습니다. “나는 당신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그분이 나에게 얼마나 잘해주셨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언제나 아들 둘을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다만 누명을 쓰고 도망자 신세였기에 살아 생전에는 발각되어 아들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편지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편지가 가짜일 수는 없습니다.” 이 설명을 들은 다른 아들은 무언가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돌을 골라낸 한 곳에 씨를 뿌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곳보다 몇 배는 더 빠르게, 몇 배는 더 많은 열매가 맺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땅은 말 그대로 영양분 덩어리였습니다. 거기에 농사를 지으니 몇 년 안 지나서 그 아들은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떠났던 다른 아들은 사기를 치다가 감옥에서 평생 썩게 되었습니다. 성경도 이와 같습니다. 누가 설명해 주지 않으면 깨달아지지 않고 그러면 왜 살과 피를 주시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그 효과를 못 누리고 성체를 영해도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체가 마치 어머니의 젖처럼 우리 정체성을 바꿔주는 것이라는 내용이 많이도 나와있습니다. 야곱이 에사우의 옷을 입고 에사우라고 정체성을 바꾸고, 요한 복음에서도 눈이 생긴 태생소경은 ‘나는 있는 나다.’라고 자신이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엄마 젖을 먹으면 아기가 인간이라 믿을 수 있듯이, 하느님의 살과 피는 그렇게 우리를 하느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카르멜 수도회의 삼위일체의 성녀 엘리사벳(St. Elizabeth of the Trinity)은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에디슨병이라는 희귀병으로 임종을 맞았습니다. 장기가 타들어 가는 극심한 통증 속에서도 그녀는 놀라운 평온을 유지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녀는 병상에서 사도 바오로의 서간들을 닳도록 읽으며 묵상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이 그녀의 영혼을 불태웠습니다. 말씀이 가슴을 뜨겁게 하자, 그녀는 매일 모시는 성체 안에서 자신과 주님이 완전히 결합됨을 실재로 느꼈습니다. 그녀는 고백했습니다. "말씀이 내 눈을 열어주었기에, 나는 내 병실 침대가 곧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제단임을 봅니다. 나는 이제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영하고 있습니다." (출처: 콘래드 드 메스테르, 『엘리사벳 신부의 생애와 영성』) 우리가 성경을 읽지 않는 이유는 시간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의 말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 귀를 기울입니다. 하지만 싫어지면 그의 모든 말이 소음이 되고 행동은 위선으로 보입니다. 세계적인 심리 학자 존 가트맨(John Gottman) 박사는 3,000쌍 이상의 부부를 연구한 결과, 이혼의 결정적 징후는 '말씀의 거부(Stonewalling)'임을 밝혀냈습니다. 한쪽이 상대방을 싫어하기 시작하면, 상대의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마음의 벽을 쌓습니다. 상대가 사랑한다고 말해도 "위선 떨지 마"라며 냉소적으로 반응합니다. 상대를 좋아하지 않으니 그의 '행동(도시락이나 선물)'조차 자신을 통제하려는 수단으로 오해합니다. 오늘날 가톨릭 신자들이 성경을 모르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분의 뜻보다 자신의 죄와 욕망 속에 머물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피하는 자에게 성체는 더 이상 생명이 아니라 거추장스러운 숙제가 될 뿐입니다. (출처: 존 가트맨, 『사랑의 심리학』) 엠마오 제자들도 성경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읽어서 가슴이 뜨거워지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가슴 뜨겁게 말씀을 설명해 줄 스승이 필요합니다. 그 스승이 바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에티오피아 내시는 당대의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수레 위에서 이사야서를 정독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알아듣습니까?"라는 질문에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8,31)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성경 박사였지만, 말씀의 '혼'을 깨워줄 스승이 없었기에 가슴이 차가웠습니다. 성경은 본인이 읽고 해석하는 게 아닙니다. 해석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성령 충만한 분이 설명해 주면 비로소 눈이 열려 성체성사의 의미를 알아보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Imitation of Christ, 제4권 11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는 두 가지가 꼭 필요하니, 곧 영혼의 양식인 '성체'와 내 발의 등불인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제 영혼의 위로를 위해 당신의 거룩한 몸을 주셨고, 제 발의 인도를 위해 당신의 말씀을 주셨나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게시판 운영원칙
Help Des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