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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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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십자가는 사랑의 승리
[말씀]
■ 제1독서(사도 2,14.22ㄴ-33)
사도 베드로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유다인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을 향하여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는 메시아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 주님을 모른다고 한 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아직도 세속적인 메시아사상에 갇혀 있던 동족들을 향하여 그분은 예언자들이 예고한 참된 메시아였음을 선포합니다. 사람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음으로 몰아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다시 살리셨으며, 자신은 다른 사도들과 함께 참된 증인임을 밝힙니다.
■ 제2독서(1베드 1,17-21)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하신 방법을 깊이 인식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를 실천에 옮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은이나 금이 아니라 사랑의 선물, 곧 모든 이를 위하여 희생되신 어린양이라는 선물로 말미암아 구원되었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은 언제나 자비로우신 분임을 깨달았기에 이제는 그분만을 마음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 복음(루카 24,13-35)
엠마오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두 제자는 주님을 만나기는 하나, 이스라엘을 해방해 줄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던 그들로서는 그분을, 죽음까지 포함한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하여 악의 세력에 대한 사랑의 승리를 역설해 오셨던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특히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비로소 그분을 알아봅니다. 이로써 모든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 실천하고 성체를 정성껏 모시는 삶으로 힘을 얻어 이웃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새김]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하느님의 나라, 곧 예수님의 이 세상 오심과 세상의 구원을 위한 수난과 죽음과 부활 덕분에 누구나 살 수 있게 된 나라를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주 힘없는 이들의 짓밟힘과 곳곳에서 도움을 호소하는 가난과 피할 수 없는 비통한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맥을 놓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 무엇인가를 희망한다는 것, 평화와 기쁨 속에 산다는 것은 여전히 가능한 일인가? 오히려 이러한 현실은 우리의 믿음이 허망한 것임을 알아차리도록 독려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질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비참하게 돌아가시고 난 다음 제자들이 던졌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엠마오로 향하는 길에서 두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의 도우심으로 눈을 열어 비로소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성경을 풀어 설명해 주실 때, 특히 빵을 들어 아버지께 찬미를 드리시고 난 다음 떼어 나누어 주실 때 눈이 열려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은 언제나 승리한다는 진리를, 십자가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참된 승리였음을 깨닫기에 이른 것입니다. 죽은 것처럼 보이나 그 죽음 안에는 새로운 생명이 이미 움트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이로써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인류의 역사는, 비참한 현실까지 포함한 인류의 역사는 그 참된 의미를 되찾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늘 우리 가운데 있으며,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이 나라를 선포해야 할 사명 앞에 섭니다.
그렇습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가 부활 신앙에 이르게 된 결정적 토대는, 부활하신 분의 도움으로, 그리고 그분을 중심으로 성경을 다시 읽음과, 최후의 만찬 중에 그분이 세우신 성찬례 참여였습니다.
성경을 늘 가까이하는 신앙생활, 주일미사는 물론 평일미사에도 열심히 참여하여 성체를 자주 모심으로써 부활 신앙인의 모습을 분명히 드러내겠다는 다짐으로, 이 한 주간을 아름답게 꾸며나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엠마오의 제자들과 부활 신앙
1. 엠마오로 가는 길: 믿음의 여정
루카 복음서의 엠마오 사건은 인간의 믿음의 여정을 상징한다. 제자들은 “모든 일이 일어난 그날”(13절), 절망 속에서 예루살렘을 떠나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희망을 걸었지만,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모든 기대가 무너졌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21절) 이 고백은 십자가 앞에서 무너진 인간의 이해를 드러낸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묵상한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걷고 있었으나,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스도는 그들 가운데에 계셨으나, 그들의 눈은 가려져 있었다. 그들의 마음이 열리기 전까지는 눈도 열릴 수 없었다.”(Sermo 235, 2) 부활의 신비는 눈으로 보는 사건이 아니라, 마음의 눈이 열려야만 인식되는 신앙의 신비다. 따라서 부활 신앙은 단순히 ‘죽음 이후의 생명’에 대한 교리적 수용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도 주님이 동행하신다는 믿음의 체험이다.
2. 말씀의 전례: 타오르는 마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말씀을 설명해 주셨다.”(27절) 이 장면은 성경의 완전한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Christocentric hermeneutics)을 보여 준다. 성 예로니모가 말했듯이,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Comment. in Isaiam. Prol.) 성경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며, 부활하신 주님 자신이 그 안에 현존하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덧붙인다. “성경은 단순한 글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와 말씀으로 대화하시는 성전이다. 성경을 펼칠 때마다 그리스도의 입술이 열린다.”(Homiliae in Matthaeum, 2,6)
제자들은 이 말씀의 전례 안에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한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32절) 그들의 마음을 불태운 것은 논리나 증거가 아니라, 성경 안에 현존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반복된다. 매 미사에서 봉독되는 성경 말씀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말씀(Verbum vivum)으로서 우리를 부활의 신앙 안으로 이끈다. 교리서도 이렇게 가르친다. “성경 전체는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구약은 그분을 예고하고, 신약은 그분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풀어 주실 때, 성경의 모든 구절은 새 생명을 얻는다.”(134항)
3. 빵의 전례: 성체 안의 현존
엠마오의 제자들은 나그네로 보이던 이를 그들의 집으로 초대한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30절) 이 장면은 명백히 성체성사(Eucharistia)를 암시한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들은 말씀으로 그리스도를 들었고, 성체로 그리스도를 보았다.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셨고, 빵을 떼심으로써 그들의 눈을 여셨다.”(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10,121) 이때 제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았다.”(31절) 그러나 곧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31절)
이는 성체 안에서 현존의 방식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더 이상 육안으로 보이지 않지만, 성체 안에서 참으로 현존하신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중심적 신앙 고백이다.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성체성사 안에 참으로, 실질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1374항) 그러므로 엠마오의 제자들은 말씀과 성체의 두 식탁을 통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 두 식탁은 오늘날 성찬례의 전례 구조, 즉,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의 원형이 되었다.
4. 되돌아감: 파견된 증인
그들은 즉시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33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는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 만남은 선교적 열정으로 이어진다. 그들이 떠났던 예루살렘은 더 이상 공포의 장소가 아니라, 복음 선포의 시작점이 된다. 성 그레고리오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들은 주님을 빵을 떼며 알아본 후, 곧장 일어나 돌아갔다. 사랑은 게으르지 않다. 사랑은 즉시 움직이고, 사랑은 파견한다.”(Homiliae in Evangelia, 23,3)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머물러 있는 신앙이 아니라, 나아가는 신앙을 낳는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선교 사명의 기초이며, 부활의 증거이다.
5. 우리의 엠마오: 오늘의 부활 체험
오늘 우리도 엠마오의 제자들과 같은 여정을 걷고 있다. 때로는 절망과 혼돈 속에서 부활의 빛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걸으시며, 말씀과 성체를 통해 당신을 드러내신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성체성사로 사는 교회: Ecclesia de Eucharistia”에서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엠마오의 제자들과 함께 매일 성찬례의 식탁에 앉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분의 현존 안에서 새로운 힘을 얻는다.”(6항) 그러므로 부활의 신앙은 단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살아 있는 만남’이다.
6. 결론: 말씀과 성체, 그리고 증언의 삶
엠마오의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말씀 안에서 마음이 타오르고, 성체 안에서 눈이 열리며, 선교의 길 위에서 부활의 증인이 된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성체를 모실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고 하신 약속은 새롭게 실현된다. 그분이 지금도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심을 믿는 이가 바로 부활의 사람이다.
이병우 신부님_"그들은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24,30 참조)
'날마다 엠마오로 떠나자!'
오늘 복음(루카24,13-35)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약11km) 떨어진 엠마오로라는 마을로 가고 있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과 함께 걸어가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눈이 가리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루카24,17)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섭니다.
'침통한 표정'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도 그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안에만 갇혀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나눌 때,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음을 믿게 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날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 아름다운 모습이 매일 거행되는 미사(Missa) 안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세우신 성체성사 안에서 일어납니다.
'미사'는 우리가 매일 떠나는 '엠마오'입니다. '엠마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곳이고, 그래서 내가 부활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부활한 두 제자가 서로 말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24,32)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내가 다시 부활하는 가장 멋진 엠마오가 바로 미사(성체성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매일 사제의 손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러 가야 합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담아 미사에 참례해야 하고, 그래서 성체를 받아모시고 다시 부활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리고 오늘 두 독서가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송영진 신부님_<“그들은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루카 24,28-35).>
1) 다른 이야기들과 비교하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이야기’에서 특이한 점이 한 가지 보이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는 당신의 부활 소식을
사도들에게 알리라고 지시하셨고(요한 20,17), 사도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에는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루카 24,47-48).
그런데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는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으셨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설명해 주셨을 뿐입니다.
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라고 증언한 일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시키셨기 때문에 한 일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그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을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선 두 제자는, 메시아의 수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실망하는 신앙인들을 상징하는(또는, 대표하는)
인물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일은,
모든 신앙인에게 ‘부활 신앙의 은총’을 주기 위해서
나타나신 일입니다.
2)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메시아의 수난을 설명해 주신
것은, 사실상 부활을 설명해 주신 것이고, ‘십자가 수난과
부활은 하나의 사건’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려면 먼저 예수님의 죽음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인류 구원을 위한 일이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에게 바로 그것을 설명해 주셨고,
그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설명 덕분에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았고,
‘큰 실망’에서 벗어났습니다.
“깨달은 다음에는?” 진리를 깨닫고 믿었다면,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기쁨을 얻었다면,
그 다음에 할 일은 ‘증언’입니다.
두 제자가 명시적으로 지시받은 것이 없는데도 자신들의
깨달음과 믿음과 기쁨을 증언한 것은, 복음 선포는 원래
그렇게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무슨 지시를 따로 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셨으니까 수행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기쁘니까’,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 자신이 원해서
하는 일, 그것이 복음 선포입니다.
복음 선포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전해 주는
일이면서 동시에 복음 선포 자체가 ‘기쁜 일’입니다.
3) 그러면 사도들에게는 왜 복음 선포를 ‘지시’하셨을까?
아마도 그것은 사도들의 ‘공적 직무’에 관련된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막달레나가 한 일도 사도들의 공적 직무에 연결된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도들의 사도’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4)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을 초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초대한 것이 아니라,
누구인지 모르는 낯선 나그네를 초대했습니다.
그 일에서 다음 말씀들이 연상됩니다.
“(너희는)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5.40).”
“형제애를 계속 실천하십시오. 손님(나그네)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나그네)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하느님을, 또는 주님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1-2).”
‘사랑 실천’은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위한 지름길입니다.
5)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겪게 되고,
크게 실망할 때도 있는데, 만일에 그런 때에
신앙생활을 중단하거나 포기하면 그것으로 끝나버리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기도하고 노력하면,
누구든지 그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은, 아마도 분명히
포기하지 않고 둘이 함께 기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 라는 예수님의 약속을(마태 18,20)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말씀을 들려
주셨고, 받아먹을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빵을 떼어 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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