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19일 (일)
(백) 부활 제3주일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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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성모성지 이상각 신부님 - "믿음은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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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경루카 [achim9202] 쪽지 캡슐

2026-04-18 ㅣ No.189162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랑은 슬픔이 됩니다.

영원한 생명은 이미 지금, 관계 안에서 시작됩니다.

사월은 늘 기적처럼 다가옵니다.

 

얼어 있던 땅이 풀리고,

나무마다 새싹이 돋고,

산과 들이

그림처럼 피어나는 시간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이렇게 아름다운 일이었나

새삼 느끼게 되는 계절입니다.

그런데 사월은

아름다울수록

더 깊은 그리움을 불러옵니다.

꽃이 피어날수록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고,

바람이 따뜻해질수록

더 또렷해지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4월16일.

이날이 다가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멈추게 됩니다.

 

 

“그날 이후, 우리의 시간은 잠시 멈추었습니다.”

사진 이상각

 

 

 

 

그날의 바다와,

그 안에 머물러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누군가에게는

그 아이들이

세상의 전부였을 것입니다.

아침에 밥을 차려 주고,

등을 토닥이며

학교로 보내던 그 아이들,

저녁이 되면

다시 돌아올 줄 알았던

그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그날,

그 아이들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그 말을 믿고

그 자리에 머물렀던 아이들.

그 아이들이

얼마나 무서웠을지,

얼마나 기다렸을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 아이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조용히 무너지고,

부모의 마음을 생각하면

말이 멈추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사월의 빛은

조금 더 조용해지고,

이 봄의 아름다움은

조금 더 깊은 슬픔으로

우리 안에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한 문장은

설명이라기보다

마음처럼 들립니다.

받아들여지지 않는 말,

닿지 않는 진심,

열려 있지만 닫혀 있는 관계 앞에서

흘러나오는 깊은 슬픔처럼 느껴집니다.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아픔입니다.

마음을 다해 전했는데 닿지 않을 때,

이해받고 싶었는데 외면당할 때,

사랑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그것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생겨나는 상처이고 슬픔입니다.

이 복음 안에는

그 감정이 조용히 배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단순히 감정의 차원에서만 머물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앞의 흐름과 이어져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미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그 고백 다음에 이어지는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밝히는 신앙의 고백이며,

동시에 그분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 앞에서

가슴 아파하는 공동체의 목소리처럼 들립니다.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무렵,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같은 하느님을 믿는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공동체 밖으로 밀려나기도 하고,

오해와 배척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 안에서 이 말씀은

더 절실하게 울려옵니다.

우리가 믿는 이분이

정말 위에서 오신 분이신데,

정말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신데,

왜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는가.

그래서 이 말씀 안에는

확신과 함께

지울 수 없는 서운함과 슬픔이 함께 흐릅니다.

그러나 복음은

슬픔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중심에는

아주 분명한 신앙의 핵심이 놓여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의 생각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을 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한량없이 주어지는 성령 안에서 흘러나옵니다.

또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을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교는

관계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아버지와 당신의 관계를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버지와 하나다.

나는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러 왔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을 너희에게 전한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은

언제나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 있습니다.

그분은 홀로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

아버지와 사랑의 관계 안에서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도

단순히 어떤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께 마음을 열고,

그분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때 순종은

억지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종속적인 복종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관계 안에서

마음으로부터 믿고 따르는 것,

그것이 복음이 말하는 순종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듣게 됩니다.

사랑 안에서는

강요보다 신뢰가 먼저 움직입니다.

그래서 순종은

억압이 아니라 사랑의 열매입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이 말씀도

죽은 다음에야 주어지는 어떤 보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이미 지금,

그분과 관계를 맺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삶입니다.

하느님과 연결되어 살아가는 삶,

사랑 안에 머무는 삶,

생명 안에 머무는 삶이

이미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우리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점점 더

하느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기술은 발전하고,

삶은 편리해지고,

AI는 인간을 더 편하고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한때 우리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이 더 가까워지고,

세상이 더 하나가 되고,

사람과 사람이 더 따뜻하게 연결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는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버튼 하나로 좌표를 만들고,

화면을 보며

미사일을 날리고

드론을 조종합니다.

그 안에서

슬픔도, 연민도 없이

사람의 생명이 사라집니다.

마치

게임처럼.

이것은

지금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비인간적인 시대의 모습입니다.

문명은 발전했지만

인간의 마음까지 함께 자란 것은 아닌 듯합니다.

연결은 많아졌지만

관계는 더 깊어지지 않았고,

강한 나라가 되어야 하고

더 강력한 무기를 가져야 하며

서로를 돌보는 관계가 아니라

자국의 이익을 먼저 챙기는 차가운 관계로

세계는 흘러가고 있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견제하고 경계하는 관계,

공동의 선보다

자기 보존을 앞세우는 관계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 흐름을 바라보며

마음 한쪽에서 깊은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정말 더 나아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점점 더 소중한 것을 잃어가고 있는 것인가.




“가족은, 사랑이 눈에 보이는 모습입니다.”

스페인에서 온 한 가족입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깊이 염려하시는 것이

우리가 맺고 살아가는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세상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성모님과의 관계.

사실 인간은

관계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혼자 살아갈 수는 있어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원만하고 좋은 관계 안에서만

비로소 평화를 느끼고,

사랑하는 관계 안에서만

비로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릴 때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함께 메말라 갑니다.

사랑이 약해질수록

두려움이 커지고,

두려움이 커질수록

사람은 더 강해지려 하며,

그 강함은 결국

다른 이를 향한 차가움과 폭력으로 드러나기 쉽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가.

나는 누구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생명의 관계 안에 있는가,

아니면 단절의 관계 안에 머물러 있는가.

빛은 이미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성령도,

사랑도,

생명도

이미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빛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머니 앞에서, 우리는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습니다.”

바뇌성모님. 사진 이상각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아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 안에서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관계 안에 살아가고 있는가.

하느님과의 관계는

살아 있는가,

아니면

점점 멀어지고 있는가.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무심함과 차가움 속에

머물러 있는가.

 

나는

들어야 할 말을

듣지 않고 있지는 않은가.

받아들여야 할 것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어쩌면

우리 안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말씀이 있을지 모릅니다.

이미 들었지만

살지 못한 말씀,

이미 알지만

외면해 온 마음…

 

그것이

우리의 관계를

조금씩

닫히게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다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에게로 와라.”

 

 

위의 글은 이상각 신부님의 블로그 글입니다.

 

 

[출처] "믿음은 관계입니다." 요한 3,31-36|남양성모성지 이상각 신부 블로그https://blog.naver.com/rsony4u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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