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19일 (일)
(백) 부활 제3주일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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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욱현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김건태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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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6-04-18 ㅣ No.189155

조욱현 신부님_나다두려워할 것 없다.

 

오늘 복음은 바다 위의 풍랑 가운데 두려움에 휩싸인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다가오시며 하신 말씀“나다두려워하지 마라.(20)를 들려준다이 말씀은 단순히 공포를 진정시키는 말씀이 아니라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신비의 계시다제자들은 어두운 밤거센 바람과 파도에 시달리며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음을 크게 두려워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험 가운데 잠시 버려두셨다그들이 두려움 속에서 더욱 그분께 달려가게 하시고당신이 나타나셨을 때 더 큰 위로를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다.(Homiliae in Ioannem, 43,1) 우리의 삶에도 주님께서 침묵하시고 보이지 않는 듯한 순간이 있다그러나 그 침묵조차도 우리를 단련하시고당신의 현존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기 위한 준비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파도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오신다이는 창조주께서 혼돈의 바다를 다스리시는 권능을 드러내는 표징이다오리게네스는 이를 이렇게 해석한다“물결 위를 걸으시며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피조물의 주님이심을 드러내셨다바람과 바다는 그분께 순종한다.(Commentarium in Matthaeum, 11,6) 풍랑은 언제나 우리의 삶에 존재한다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폭풍 위에 서서 계시는 분이다그분과 함께라면 세상의 어떠한 혼란도 우리를 집어삼킬 수 없다.

 

“나다두려워하지 마라”(20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한 자기소개가 아니다헬라어 “Ἐγώ εἰμι”는 구약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때 쓰신 말씀(탈출 3,14 “나는 있는 나다.)과 같은 표현이다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강조한다“그분은 ‘나는 예수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다만 ‘나다’라고만 하셨다사람들이 그분을 단순한 사람으로만 생각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었다.(In Ioannem Tractatus 25,5) 따라서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하느님 자신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선포하는 말씀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 하자배는 곧바로 목적지에 닿았다이는 주님을 맞아들일 때우리의 여정이 완성된다는 것이다성 치프리아노는 이렇게 말한다“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이 곧항구이다설사 파도가 거세다 하더라도그분과 함께라면 안전한 구원에 이르게 된다.(De Unitate Ecclesiae, 7) 우리의 목적지는 세상 너머의 하느님 나라다그 길은 풍랑과 고난으로 가득하지만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순간 이미 우리는 목적지에 닿은 것과 같다어둠과 두려움 속에서도 그분은 우리에게 오셔서 말씀하신다“나다두려워하지 마라.(20우리가 주님을 배 안에곧 우리의 삶 속에 받아들일 때우리의 여정은 안전하게 완성된다주님을 모시는 삶곧 기도와 성사말씀 안에 머무는 삶을 살자.

 

김건태 신부님_하느님의 부재

 

 오늘 복음 말씀은 어제 복음을 바로 뒤따르는 부분으로서, 놀라운 빵의 기적 이야기 다음 대목입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어제의 빵의 기적 이야기든 오늘의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든, 두 이야기 모두 공관 복음서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속 내용으로 들어가 보면 적지 않은 차이점을 보인다 하더라도, 복음서에 이 사건들이 공통으로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은 사건의 중요성과 함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절박성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빵의 기적이라는 기념비적인 날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향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늘 중대한 사건을 펼치신 난 다음 기도 등 정리하실 시간을 가지시기 위해 홀로 남아 계심에 익숙하기라도 한 듯이, 제자들은 예수님을 기다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입니다.”

 

우리가 자주 체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미사성제 안에서 생명의 빵을 모시고 난 다음, 또는 강력한 신앙 체험을 하고 난 다음, 우리도 제자들처럼 용기를 내어 스스로 무슨 일을 처리하고자 나서곤 합니다만, 별 성과가 없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지 않지?’ 하는 불만 섞인 질문을 토로하곤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처럼 우리 스스로 떠나도록 내버려 두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책임을 져야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신앙이 “큰 바람”이나 그로 인한 “거센 물결”을 잠재우거나, 암초를 제거해주는 요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에게 교회는 투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찾는 피신처나 모든 어려움을 모면하게 해주는 안식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스스로 떠나도록 내버려 두셨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신앙인 스스로 갖추고 드러내야 하는 결단과 노력과 행동이 있음을 배웁니다.

 

 

 

사실, 어려움이 닥칠 때 기도로 청하기만 하면 된다는 의식에 젖어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부재는 그 자체로 불안과 두려움의 근거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론 어떠한 경우든지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기도가 앞서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 속에는 마주치거나 마주칠 어려움을 모면할 수 있는 ‘요행’이 아니라 맞서 싸울 ‘힘과 용기’를 청함이 가득해야 합니다. 아니, 그것이 전부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큰 바람과 거센 물결 속에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예수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호수 건너편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시는 예수님을 다시 만날 기회를 놓치고 말 것이며, 신앙의 기쁨과 보람 또한 식어가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부재는 신앙인들에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부재를 통해, 우리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온전한 자유와 함께 책임감을 불어넣어 주시는 분이며, 갖은 역경 속에서 또는 끝내 호수 건너편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며 계속해서 당신을 따라나설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하루, 스스로 걸어갈 수 있도록, 넘어지면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가로막는 것이 있으면 뛰어넘을 수 있도록 늘 함께하시는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온 힘을 다해 부활 신앙인다운 삶, 결단과 책임의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하고 희망하는, 은총 넘치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병우 신부님_"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6,20)

 

'임마누엘이신 주님!'

 

오늘 복음(요한6,16-21)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큰 바람이 불어 물결이 높게 이는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로 다가가십니다.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워합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6,20)

 

풍랑이 이는 거친 물결 위를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해 봅니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우리가 걸어가야 할 모습이라는 것도 함께 묵상해 봅니다.

 

우리네 삶의 자리 안에는 풍랑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크고 작은 문제들과 시련들이 늘 함께 합니다. 공존합니다. 이는 '피할 수 없는 공존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믿고 따라가고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우리네 삶의 자리 한 가운데에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이십니다. '임마누엘'은 '우리와 함께 계시다'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미사와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만나는 임마누엘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늘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 잉태 예고 때 마리아와 요셉에게 하신 말씀이며, 열두 제자들에게, 그리고 또 하나의 제자들인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맙시다!

풍랑을 이겨냅시다!

크고 작은 힘듦과 난관들을 주님의 손 잡고 이겨냅시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봉사자가 됩시다!

지금 우리농에서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쓰고 있는 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ㅎㅎ

 

"그들은(열두 사도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테파노, 그리고 필리포스,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또 유다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 출신 니콜라오스를 (봉사자로) 뽑았다."(사도6,5)

 

오늘은 마산교구 60주년 기념미사와 그동안 미루어져 왔던 교구청 봉헌식이 있는 날입니다. 기도해 주시고 축하해 주세요♡

 

이병우 루카 신부 

 

송영진 신부님_<예수님은 ‘만물의 주님, 온 세상의 임금님’이신 분입니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요한 6,16-21).”

 

 

 

1)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

 

일에 연결되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4-15).”

 

‘기적의 빵’을 먹은 사람들은 그 기적에

 

‘열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기적의 의미는 생각하지 않고 배불리 먹었다는 것만

 

생각해서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그 분위기에 휩쓸렸던 것 같습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신 다음에

 

군중을 해산시키셨습니다(마태 14,22; 마르 6,45).

 

제자들과 군중을 곧바로 ‘분리’시키신 것입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군중 심리에 더 이상 오염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즉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과 군중을 분리시키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가지 않으시고 ‘제자들만’ 보내신 것과

 

그들이 호수에서 바람과 파도를 겪게 하신 것은,

 

정신을 차리라는 ‘사랑의 회초리’ 같은 것이었고, 그리고

 

‘성찰의 시간’을 가지라는 뜻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메시아를 원하는지, 또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을 때 무슨 마음으로, 무엇을 바라면서 응답했는지를

 

다시 잘 성찰해 보라는 ‘무언의 가르침’이었을 것입니다.

 

 

 

2) ‘제자들이 호수에서 풍랑을 만나서 고생한 이야기’와

 

이 이야기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두 이야기는

 

분명히 상황도 다르고, 뜻도 다릅니다.

 

제자들이 큰 풍랑을 만나서 고생할 때, 예수님께서는

 

바로 옆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마태 8,23-24).

 

그 이야기에서 ‘큰 풍랑’은 교회와 신앙인들이 겪는

 

고난과 시련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시고 계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옆에

 

계시는데도 안 계신다고 오해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이야기’에서 제자들이

 

겪은 맞바람과 파도는 그들 내면의 심리 상태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실 수도 있다는 생각, 그리고

 

자기들도 예수님 옆에서 고위직을 차지할 수 있다는

 

기대감 등으로 들뜨고 흥분한 상태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옆에 안 계신 것은, 그들의 마음이,

 

또는 그들의 믿음이 참된 신앙에서 멀어져 있었고,

 

흔들리고 있었음을 상징합니다.

 

 

 

3)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가신 것은,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신 일, 즉 당신이 ‘만물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계시하신 일입니다.

 

‘만물의 주님’이라는 말은, ‘온 세상의 임금님’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온 세상의 임금님이신 분께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만을 위한 임금이 되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믿음 없는 일이기도 하고, 무례한 일이기도 합니다.

 

20절의 “나다.”는, 원문으로는 탈출기 3장 14절에 있는

 

“나는 있는 나다.” 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당신의 ‘신성’을 계시하신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무서워하지 말라는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나타나실 때

 

자주 사용하시는 말씀이고, 그래서 이 말씀도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신 말씀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라는 제자들의 신앙고백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마태 14,33).

 

 

 

4) 메시아의 나라를 인간 세상의 왕국과 같은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8,36).

 

메시아의 나라는 이 세상에 건설되지만,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방식’으로 건설됩니다.

 

그 방식은 십자가 수난과 부활입니다.

 

메시아의 나라를 인간 세상의 왕국과 같은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현세에서 누리는 부귀영화로 오해합니다.

 

그 오해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과 같습니다.

 

단식기도를 하시는 예수님을 사탄이 유혹할 때,

 

사탄은 자기에게 경배하면 세상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했습니다(마태 4,9; 루카 4,6-7).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만 경배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그 유혹을 간단하게 물리치셨지만, 신앙인들을 향한

 

사탄의 유혹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믿음과 희망을

 

끊임없이 스스로 성찰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정말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출세인가?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인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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