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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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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빵의 기적 이야기
부활시기 동안 우리가 읽고 묵상하는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이라 부르는 마태오와 마르코와 루카 복음과 비교해 볼 때, 많은 차이가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공관복음에는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가 다수인데 비해, 요한복음에는 꼭 일곱 가지만 전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2,1-12), 왕실 관리의 아들 치유(4,43-54), 벳자타 못 가의 병자 치유(5,1-18), 빵을 많게 하신 기적(6,1-15), 물 위를 걸으심(6,16-21), 태생 소경 치유(9,1-12), 라자로 소생 이야기(11,1-44).
오늘 요한복음이 전하는 빵의 기적 이야기는(6,1-15), 공관복음에 다섯 번 언급되면서 동시에 중요한 기적 이야기로 소개되는데, 이 점은 요한복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빵을 많게 하신 이야기는 공관복음에서든 요한복음에서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 이 이야기는 복음서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인 ‘생명의 빵’에 관한 긴 말씀을(6장 전체) 여는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공관복음서의 빵의 기적 이야기와 차이점도 있습니다.
첫 번째 차이점은,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분’이라는 데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은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는,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분명 ‘어디에서’를 물으셨는데, 필립보는 ‘어떻게’로 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기에” 빵을 구입할 장소와 방법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필립보가 어림잡은 ‘이백 데나리온’은, 1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값에 해당하므로, 적지 않은 금액인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으로서는 다만 필립보를 포함한 제자들이 아직도 당신의 권능을 신뢰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셨을 것입니다. 훗날 필립보를 향해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요한 14,9: 내일 복음 참조) 하고 질타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두 번째 차이점은, 오늘 복음에서는 그 빵이 ‘보리빵’으로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 몰라도, 오늘 말씀 끄트머리에서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는 군중의 반응을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빵의 기적 이야기는 구약성경에도 꼭 한번 기술되어 있는데, 예언자 엘리사가 ‘보리빵’ 스무 개로 백 명을 배부르게 먹게 하고도 남았다는 이야기입니다(2열왕 5,42-44). 유다교 전승에서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과, 모세나 엘리야나 엘리사와 같은 특정 예언자에 대한 기다림이 거의 유사한 개념으로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 하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빵의 기적 이야기가 예시하는 (성체성사 설정에 관한 예형과 같은) 표징 이외에,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당신의 제자들을 협조자로 초대하시거나 양성하시려는 예수님의 의지와 함께, 메시아와 같은 예언자에 대한 군중의 기다림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오늘 하루, 당신의 몸을 우리의 먹거리로 내주시고, 우리를 당신의 사람으로 키우시기 위해 애쓰시는 메시아 예수님께 온 마음으로 감사드리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우리 자신을 내주는, 복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복음은 예수님께서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전해준다. 이는 하늘로부터 내려올 참된 빵, 곧 당신 자신을 주시려는 표징이다. 필립보는 계산하며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7절)라고 말한다. 그러나 한 소년이 내어놓은 작은 음식,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풍성한 기적을 일으키신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대목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인간의 부족함을 넘어서 일하심을 강조한다. “조금의 빵으로 많은 무리의 배를 불리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조금의 빵으로 많은 이들이 배를 불리고, 또 남았다는 것이다.”(In Ioannem Tractatus 24,1)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것을 들어 크게 하신다. 우리의 작은 봉헌, 작은 희생, 작은 사랑도 주님께 드려질 때 많은 이를 살리는 은총의 도구가 된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에 떼어 나누어주신다. 이는 명백히 성찬례의 예표다. 성 치프리아노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이신 빵을 제자들에게 주시기를 멈추지 않으신다. 이 빵은 교회 안에서 날마다 자라나, 그리스도 백성의 배를 불리신다.”(De Sacramentis,5) 교회는 매 미사 때, 주님께서 행하신 이 기적을 현존하게 한다. 작은 제병 한 장, 포도주의 몇 방울이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여 온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양식이 된다.
군중은 배불리 먹은 후 예수님을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14절)라 고백한다. 이는 신명 18,15의 모세 예언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모세와 같은 또 다른 예언자가 아니라, 모세가 예표한 완전한 성취이시다.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해석한다. “모세가 말한 그 예언자는 다름 아닌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은 하느님의 백성에게 참된 빵을 주신다.”(Commentarium in Ioannem, 19,3)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내린 사건을 넘어, 당신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51절)으로 주신다.
주님께서는 남은 조각들을 모두 모으게 하신다.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12절)이라는 말씀은 단순히 음식의 절약이 아니라, 은총의 충만한 보존을 뜻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작아 보이는 것을 경멸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왜냐하면, 그것들도 하느님의 축복으로 큰 것이 되기 때문이다.”(Homiliae in Ioannem, 42,2) 우리가 주님께 바치는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일지라도 이 제물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우리를 살리고, 작은 우리의 삶이 주님 손에 들려져 세상을 변화시키는 도구가 되기를 기도하자.
송영진 신부님_<“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 6,1-7)>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2-15).>
1)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빵의 기적’과 공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빵의 기적’은 같은 기적이지만,
그 일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다르고, 그래서
강조하는 점도 다릅니다.
공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일’로 기록되어 있고, “예수님은 당신의 양들을 먹이시는
‘착한 목자’이신 분”이라는 것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나오는 군중은 ‘배고픈 사람들’이 아니고
표징만(기적만) 바라면서 몰려든 사람들입니다(2절).
그래서 ‘빵의 기적’이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원을 계시하신 일”로
기록되어 있고, “예수님은 ‘생명의 빵’이신 분”이라는
것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생명의 빵’이라는 말에서 중요한 말은
‘빵’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뜻을 생각하면, “예수님은 생명이신 분”이라고
단순하게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요한 14,6).>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일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일입니다.
그 일은, 바로 뒤에 있는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이야기”에 연결되고, 또 그 다음에 길게 이어지는
‘생명의 빵에 관한 논쟁’에도 연결됩니다.
사도들은, 군중이 예수님께 임금이 되어 달라고 요청할 때,
그 일에 동참했거나, 아니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시기를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혹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하면서
들뜨고 흥분했던 것은 아닐까?
2) 4절의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라는 말은,
“예수님은 새로운 파스카의 빵이시며,
새로운 ‘만나’이신 분”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파스카가 해방을 뜻하기도 하니까, “예수님은 참되고
영원한 ‘해방’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도 암시합니다.>
6절의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처음부터(군중이
모여들 때부터) ‘빵의 기적’을 계획하셨다는 뜻입니다.
7절의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말과 9절의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라는 말은, “이 군중을 먹이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힘으로만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천 명이 넘는 군중에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 빵과 물고기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원래 하느님의 기적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실 때,
인간들 쪽에서는 그것을 받아먹기만 했을 뿐입니다.
기적의 재료를 하느님께 바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없었어도
어떻게든 기적을 일으키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빵과 물고기는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 생각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사랑과 나눔을 설명하기 위한 소재로
삼을 수는 있지만, 여기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중요한 요소가 아닙니다.
3) 14절의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는 모세가 약속했던 예언자입니다(신명 18,15).
유대인들은 그 예언자를 메시아로 생각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했던 메시아는 ‘정치 지도자’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일은, 사는 것이 고달픈 사람들의 간절한 심정을
나타내는 것이긴 한데, 그들이 원한 것은 ‘구원’이 아니라
그냥 ‘잘 먹고 잘 사는 것’이었습니다.
즉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만 바라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임금이 되시면, 힘들게 노동을 하지
않아도 날마다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어떻든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요청을 거절하신 이유는
뒤의 27절에 나옵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이병우 신부님_"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요한6,11)
'빵의 기적, 작음의 기적, 나눔의 기적!'
오늘 복음(요한6,1-15)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는 빵의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로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6,5) 하고 물으십니다.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이 말씀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6,7)
곁에 있던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이들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6,9)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힘으로 소용이 없어 보이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는 군중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차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빵의 기적'입니다. '작음의 기적'입니다. '나눔의 기적'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일어나는 기적 입니다.
이 기적을 만들어내고, 이 기적의 모습을 살아낸 공동체가 바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입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로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도4,32.34)
누구는 먹을 것이 없어서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를 걱정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누구는 먹을 것이 너무 많아서 무엇을 먹어야 하나를 걱정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날마다 배부르게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체의 기적을 믿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힘으로 지금 여기에서 빵의 기적, 작음의 기적, 나눔의 기적을 만들어 냅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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