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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욱현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김건태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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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욱현 신부님_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그리고 그분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깊이 묵상하게 한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느님에 대해 말씀하신 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본질을 지니신 분, 곧 위에서 오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32절)라고 하신다. 그러나 이 “보았음”은 단순히 경험적 지식이 아니라, 영원으로부터 아버지와 하나이신 말씀으로서 하느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심을 뜻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분은 말씀하시는 것을 남에게서 들어 배운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서 모든 것을 아신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은 곧, 그분의 본질에서 나온 것이다.”(In Ioannem homilia 30,1)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은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 우리 안에 들려주시는 진리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34절).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 자체이시며, 동시에 성령 안에서 말씀하신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말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이시며, 성령은 아버지의 지혜이시다. 이 둘을 통하여 모든 것이 드러난다.”(Adversus Haereses IV,20,1)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은총 안에서 아들의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그 말씀 안에서 아버지를 알게 된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35절).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그분께 모든 것을 내주셨다는 말씀은,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을 지니셨음을 드러낸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아드님의 손에 주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곧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참 하느님이심을 뜻한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XIV,7) 즉, 아들은 단순한 중재자가 아니라, 아버지와 동등하신 분, 모든 권능과 생명의 주님이시다.
복음은 결론짓는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36절). 믿음은 단순히 머리로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순종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교리서도 이렇게 가르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갖는 것이다.”(161항 참조) 믿음의 응답은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준다. 예수님은 위에서 오신 분이시며, 아버지의 모든 것을 지니신 분이시다. 그분을 믿는다는 것은 곧 하느님과의 친교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믿음 안에서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시작한다. 주님 안에서 영원한 삶을 희망 가운데 살아가자.
송영진 신부님_<힘들 때 힘들다고 말하는 것은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3,31-36).”
1) 이 말은, “예수님은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증언이고, “예수님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20장에 있는 다음 말에 연결됩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인가?
의무가 아니라 우리의 ‘희망’입니다. ‘간절한’ 희망.
바로 그 간절한 희망 때문에 하는 일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의무인가?’ 라고 물으면,
“의무가 아니라 우리가 원해서 하는 것이다.”가 답입니다.
하기 싫으면, 안 하면 그만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싫다는 사람에게
그 생명을 억지로 주는 일은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싫고,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기
싫다는 것은, 영원히 멸망하겠다는 것이고,
그것은 본인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라.” 라는 가르침은,
‘명령’이 아니라 ‘권고’입니다. 사랑의 권고.
2) 그런데 실제 현실을 보면, 멀게만 느껴지는
영원한 생명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어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원래 신앙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해서 차츰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하고
성숙해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맨 처음에 행하신 기적은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일입니다(요한 2,1-11).
그 일은 ‘영원한 생명’과는 별로 상관없는 일입니다.
물론 혼인잔치의 당사자들에게는,
포도주가 떨어진 일이 심각한 문제였겠지만,
그래도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는 아닙니다.
공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부터 시작하셨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신 일은
병자 치유에 속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어려움들을 해결해 주는 일부터 시작하셨는데,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것은 ‘신앙생활의 시작 단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양 노래를 부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야고 5,13-15).”
많이 아플 때 도와달라고 기도하고, 슬플 때 슬프다고
하소연하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무슨 복잡하고 추상적인 신학 이론으로
신앙생활을 설명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
<뭔가 힘든 일이 있어서 기도할 때, “혹시 나의 신앙이
기복신앙인 것은 아닐까?” 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하는 것은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4) “모든 것 위에 계신다.”는, 표현으로는 “모든 사람을
지배하신다.”인데, 뜻은 “모든 사람을 보살피신다.”입니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는,
“예수님께서는 진리만 말씀하신다.”입니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의 진리’ 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다.”입니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는,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이다.”인데,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 말씀이고 진리’인 이유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는, “아버지와 아드님은
하나이시고”입니다.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는,
예수님께서 전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을 구원하거나 구원하지 않을 권한.
김건태 신부님_증언이라는 하늘의 어법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는 인간이 발붙여 살고 있는 이 지상 현실의의 가치와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더는 눈물의 골짜기로만 정의될 수 있는 현실이 아니며, 물질과 육체는 무조건 멀리하거나 거부해야 하는 요소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 곧 세상과 인류의 구원은 하늘과 땅 전체를 아우르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신앙인들은 순전히 영적인 세계에 머물러 있거나 내세만을 갈망하며 지상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가톨릭교회에 대하여 비판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교회를, 내세에 더 높고 안락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지상에서의 고통을 참아내느라 애쓰는 사람들의 모임, 하느님께서 다 정리해주시고 응징해 내리시리라는 믿음으로 불의 앞에 입을 다물고 악을 눈앞에 두고서도 모른 체하는 집단 정도로 취급해 왔던 것이 사실이며, 교회가 그러한 모습을 보여왔던 것도, 아직도 그러한 모습을 지우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땅과 하늘이 각각 고유한 영역과 어법을 소유하고 있음을 전제로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땅의 어법은 쉽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감각 기능을 기초로 한 어법,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 어법입니다. 감각 기능을 통해 인간은 무엇인가를 알아보고, 알아본 것을 전합니다.
그러나 하늘의 어법은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증언’이라는 어법입니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증인은, 증언하는 사건을 직접 체험해 본 적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참되다는 것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굽히지 않고 끝까지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을 통해서 비로소 하느님에 대하여 알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은 사람들이며, 그분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증언합니다. 하느님은 하늘만이 아니라 땅을 선(善)으로 창조하시고, 창조된 모든 피조물이 당신의 선성을 드러내도록 사람들에게 맡겨 살피시는 분이며, 세상과 인류를 당신 아드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 곧 구원의 관계로 이끄시는 분임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증언합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인들은 땅에 살면서도, 땅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하느님께서 선으로 창조하신 세상의 모든 것이 당신의 선성을 드러내도록 늘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뜻을 살피고 실천에 옮겨야 할 사람들입니다.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시는” 예수님의 증언을,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는” 현실이라 하더라도, 굳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하나씩 실천에 옮기는 가운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며 희생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오늘 하루,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심으로 세상과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시고,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세상과 인류를 하느님과 화해시켜 주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음 깊이 모시며, 이를 힘차게 증언하는 부활 신앙인의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병우 신부님_"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요한3,35)
'하느님의 아픔!'
오늘 복음(요한3,31-36)은 '하늘에서 오시는 분에 대한 말씀'입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 하늘에서 오시는 분,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분', 그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위에서 오신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그들이 바로 유다인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하늘에서 오신 분으로 받아들였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고, 지금처럼 아주 이상한 트럼프와 손잡고 전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대표적 종교인 유다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종교입니다. 아직도 구약성경 안에만 머물러 있는 종교입니다.
오늘 독서(사도5,27-33)에서 베드로와 사도들은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대사제 앞에서 이렇게 담담하게 증언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사도5,29-30.32ㄱ)
예수님을 죽인 유다인들은 담대하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베드로와 사도들의 증언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을 예수님처럼 죽였습니다.
우리 또한 그렇지 않은가?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유다인들처럼 살고 있지 않은가? 나의 생각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나의 말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나의 행위가 예수님을 거부하는 또 하나의 유다인들! 우리들 삶의 자리 한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이슈나 사건 앞에서 하느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또 하나의 유다인들은 아닌지?
한번 나의 모습을 깊이 성찰해 보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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