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16일 (목)
(백)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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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조욱진 신부님_김건태 신부님_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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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6-04-15 ㅣ No.189096

김건태 신부님_심판과 구원

 

우리는 교리 시간이나 교리서를 통해 하느님의 속성, 곧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워 알고 있습니다. 한없이 선하시고 사랑 넘치시고 완전하시고 자비하시고 의로우시고... 등등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속성은 상호 충돌하는 개념들로 자리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자비로우시고 사랑 넘치시는 하느님이 어떻게 누군가를 심판하고 단죄하실 수 있으실까? 오늘 복음 말씀은 사랑과 심판과 단죄와 구원이라는 개념을 한데 모아서 설명해 주고 있기에, 예수님의 말씀 자체에 특별한 관심을 쏟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건네시는 핵심 확언은 하느님은 세상과 인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며, 이 사랑의 첫 번째 증거는 당신의 외아들을 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선물은 수동적인 선물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하는 의도에서 적극적으로 마련된 선물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 마련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이 우리를 향해 보여주시는 몸짓에는 사랑과 선성이 담겨 있습니다: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심판과 단죄도 동반될 수 있습니다. 복음 저자 요한이 전해주는 예수님의 선언에 따르면, 스스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존재는, 달리 말한다면 판단을 받아 단죄받은 이로 스스로 자리하는 존재는 바로 인간 자신입니다.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향권에서 빠져나감으로써 인간 스스로 구원을 마다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과 인류의 구세주임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자발적인 거부 행위를 통해 인간은 구원의 영역을 벗어나고 맙니다.

 

여기에서 또 다른 질문이 들어설 수 있습니다. 믿음을 부여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신데, 과연 인간이 거부할 능력이 있는 존재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전적으로 수사학적 질문, 무엇인가를 강조하거나 설득하기 위해 이러저러한 표현들을 빌려 의도적으로 꾸며낸 질문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온전한 자유의지로 선택한 거부 영역에 예수님은 이미 자리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거부에 관한 질문을 거부 행위에 관한 질문 위에 올려놓으실 뿐입니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더욱이 신앙인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결정한 거부라는 잘못에 대한 책임을 주님께 전가할 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분 말씀으로 우리가 한 일이 드러날까 두려워 예수님을 거부하면서도 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진리를 실천하여 빛으로 나아가는 삶을 추구해야 할 사람들인데도 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세상의 어둠을 밝히기 위하여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최소한 빛을 따르는 삶, 진리를 실천하여 이를 밝히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 어둠을 쫓아내고 빛을 따르는 삶으로, 내가 하는 모든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을 내뿜는, 활기찬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병우 신부님_"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한3,18ㄱ)

 

'참되게 믿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와 대화하시는 말씀'(요한3,1-21)을  3일에 걸쳐서 듣고 있습니다. 이 대화를 통해서 이제와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려면, '새로 태어나야 하고, 예수님처럼 내 것을 내려놓고 비우는 죽음의 삶을 살아야 하고, 참되게 믿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니코데모에게, 그리고 이 복음을 듣고 있는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요한3,16-21)에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3,17-18)

 

믿는 이들의 큰 두려움과 걱정 중에 하나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심판'이지 않을까.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들어갈 때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심판의 시험대!'

이 '심판의 기준'은 '최후의 심판기사'(마태25, 31-46)가 전하고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참되게 믿고, 성실하게 사랑을 실천했는가?'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처럼 살았는가?'입니다.

 

'우리의 궁극적 희망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영원한 생명'에 있습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 역설'에 있습니다.

 

이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 여기에서 참되게 믿고, 성실하게 사랑을 실천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악의 구렁인 어둠 속을 헤매지 말고,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빛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게 합시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 외아들을 보내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립시다!

 

조욱현 신부님_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 전체의 핵심이라 불릴 만큼 중요한 말씀을 전해 준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16절). 이 말씀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 곧 사랑의 본질을 발견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심판하기 위해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내어주셨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 곧, 이토록 크고 깊이 사랑하셨다. 단순히 사랑하셨다고만 하지 않고 ‘이처럼’이라고 하신 것은, 그 사랑이 헤아릴 수 없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In Ioannem homilia 27,1) 하느님께서 아들을 내어주셨다는 사실은 사랑의 극치이다. 이는 단순한 애정의 표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적 사랑이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17절) 그러나 동시에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말씀하신다(18절). 심판은 훗날 일어나는 사건이기 이전에, 지금 우리의 선택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이렇게 해석한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세상이 구원받게 하려고 오셨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그분의 첫 번째 오심이 자비를 위한 것이지 심판을 위한 것이 아님을 뜻한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XII,12)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믿음과 선택이 이미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고 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19절) 하느님의 심판은 결국, 인간이 스스로 빛을 거부하고 어둠을 선택하는 데서 비롯된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말한다. “빛이 드러났지만, 빛 안에 있는 이들은 그 빛을 보고 비추어진다. 그러나 어둠 속에 머무르는 자들은 스스로 자기 눈멂의 원인이 된다.”(Adversus Haereses IV,39,1) 빛으로 나아가는 것은 단순한 사상적 동의가 아니라, 실제 삶의 변화를 요구한다. 믿음은 단순히 지적 동의가 아니라, 성령의 빛 안에서 이루어지는 전인적 응답이다.

 

하느님은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내어주셨다. 그 사랑은 심판보다 크고, 죄보다 강하다. 하지만 그 사랑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는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우리가 어둠을 버리고 빛을 선택할 때, 우리 삶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 드러난다. 선행과 나눔, 자비의 실천 속에서 우리는 빛의 자녀로 살아간다. 그러므로 감사와 기쁨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며, 빛이 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된 믿음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송영진 신부님_<‘이웃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 사랑’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 3,16-21).”

 

 

 

1)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라는 말씀을,

 

요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8-12).”

 

“하느님께서는 왜 인간들을 사랑하시는가?”

 

“사랑이신 분이기 때문이다.”

 

말장난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말장난이 아니라 진리입니다.

 

그리고 달리 더 좋게 설명할 말이 없습니다.

 

‘당신이 만드신 존재들이기 때문에.’, 또는 ‘당신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뭔가 많이 부족한 말이고, ‘사랑이신 분이기 때문에’가

 

가장 좋은 설명입니다.

 

사랑은, 사랑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외아들을 내주시어” 라는 말씀은,

 

“당신 자신을 내주셨다.”로 생각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은 하나입니다(요한 10,30).

 

그래서 외아들을 내주시고 아버지께서는 뒤로

 

물러나 계신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내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라는 말씀은,

 

에제키엘서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에제 33,11).”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인간들은 죄와 죽음의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고, 구원의 길을 알지 못해서

 

멸망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어둠 속에 있는 인간들을

 

하느님 나라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입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라는 말씀은, ‘무조건 누구나’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회개하는 믿음’이어야 하고,

 

또 ‘실천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2)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11).” 라는 말이 그 답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사랑받고 있음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방법은

 

‘이웃 사랑 실천’입니다.

 

사랑을 하든지 받든지 간에,

 

이웃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 사랑도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3) 사랑은 ‘말’이나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믿음도 ‘말’이나 ‘생각’이 아니라 ‘삶’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

 

18절-19절의 ‘심판’에 관한 말씀은, “구원을 주려고 오신

 

메시아를 믿지 않는 것은, 멸망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

 

라는 뜻입니다.

 

지금 안 믿고 있는 것은, 지금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이고,

 

그래서 이미 스스로 심판을 받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20절-21절의 말씀은, “그날이 되면 모든 것이 다

 

드러난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악행은 악행대로, 선행은 선행대로 모두 드러날 것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진리를 실천한 이’는 아무 거리낌 없이

 

당당하고 떳떳하게 하느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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