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16일 (목)
(백)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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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김건태 신부님_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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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6-04-14 ㅣ No.189077

김건태 신부님_위로부터 태어나는 삶

 

오늘 말씀은 어제의 말씀, 곧 니코데모와의 대화 내용 끄트머리 부분을 되풀이하면서 이어집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어제 말씀의 요지는, 하느님 나라를 보고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곧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성령을 설명하시면서, 예수님은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하는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번역하는 낱말은 히브리어로는 ‘루아흐’, 그리스어로는 ‘프너이마’인데, 둘 다 본디 ‘바람’을 뜻합니다. 방금 예수님이 하신 말씀 속에서도 바람과 영은 그리스어로 동일한 단어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소리와 결과를 통해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의 존재 또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구체적 행위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변화를 통해 인식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이처럼 “영에서 태어난 이”는 자신의 기원과 운명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두고 있으며, 두고 있어야 합니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하고 여쭈었던 것처럼,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서 평범한 인간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결과를 통해서는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니코데모와 같은 바리사이들은 하나의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혈통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느님과의 계약에 따라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고 여겼으므로, 다시 태어남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지극히 생소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령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은,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업적과 그분의 역동적인 힘으로 모든 것을 완전하게 보시는 예수님은 당신이 알고 계신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에 대해 말씀하시니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시는 분이며, 그분의 증언은 참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당신이 이루실 사명에 대한 계획을 밝히십니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존재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하나의 계획, 하나의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들어 올려지는 계획입니다. 십자가라는 표지를 통해서, 곧 십자가를 통해 들어 올려짐으로써 완성될 구원 사명입니다: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다시 태어나게 하는 성령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성령이 마련해 놓으신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들어 올려짐의 길, 십자가의 길, 이웃을 위해 자기 생명을 희생하는 길을 밟아야 합니다.

 

부활 시기는 사람을 위해 당신 생명을 내놓으신 성자의 삶을 본받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성부의 뜻을 존중하고 따르며, 성령이 이끄시는 일치와 사랑 안에서 살아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임을 드러내야 할 시기입니다.

 

오늘 하루, 세상과 인류의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높이 들어 올리셨고, 그것이 바로 성부의 뜻이었음을 늘 가슴에 새기셨던 성자 예수님을 찬미하며, 우리도 우리 자신을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겨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임을 자랑하는, 가슴 벅찬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7절)라고 말씀하신다.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단순히 인간적 재탄생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곧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한다. 우리는 세례와 성사 안에서 이미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러나 성령 안에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옛사람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무엇이냐? 곧, 성령과 물로, 즉, 세례와 성령으로 새로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겠는가?”(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XI,5) 세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그렇기에 성령 안에 살아야만 우리가 진정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이”(13절)이신 그리스도와 결합할 수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13절) 이는 곧 주님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참 사람이심을 드러낸다. 말씀으로서는 영원히 하늘에 계셨지만, 육으로는 사람의 아들로 오셨다. 성 치릴로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분이 내려오신 것은 우리를 올라가게 하기 위함이고, 그분이 우리와 같아지신 것은 우리가 그분과 같아지기 위함이다.”(Commentarius in Ioannem, lib.II, cap.1) 곧, 주님의 강생은 우리를 하늘로 이끌기 위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사건을 말씀하시며 당신의 십자가를 예고하신다(14절). 구리 뱀을 쳐다본 이들이 살아났듯이, 십자가에 들어 올려진 사람의 아들을 바라보는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가르친다. “광야에서 뱀을 바라본 자들이 뱀의 물림에서 해방된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믿는 이들은 죄의 물림에서 해방된다.”(Adversus Haereses, IV, 2,7) 십자가는 단순한 고통의 상징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구원의 표징이다. 사목 헌장은 고백한다. “하느님의 아들은 당신의 수난으로 인간을 속량하시고,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의 죽음을 파괴하셨으며, 부활로 우리의 생명을 새롭게 하셨다.”(22항)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분과 함께 짊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일 때, 우리도 그분과 함께 영광에 들어갈 것이다. 

 

복음은 우리를 성령으로 태어난 새로운 존재로 부르신다. 십자가에 들어 올려진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신앙으로 우리는 멸망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이제 우리도 날마다 우리의 십자가를 짊어지며 주님을 닮아가야 한다. 그렇게 살 때, 주님께서 부활로 드러내신 영광이 우리 삶에서도 드러날 것이다. 그 믿음을 굳게 지니며, 우리도 주님과 함께 하늘로 들어 올려지도록 하자.

 

이병우 신부님_"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3,14) 

 

'부활 공동체의 모습!' 

오늘 복음(요한3,7ㄱ.8-15)도 어제 복음에 이어서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와 대화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위로부터의 다시 태어남, 영적으로 다시 태어남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내려놓음', '비움', '자기비하'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3,13-15) 

 

사람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십자가'는 우리가 살고 또한 당신 자신이 사신 '부활의 결정적 표지'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죽어야 살 수 있다는 역설의 신비'를 드러냅니다. 이는 '이제와 영원히 살고 싶으면 내 것이 비워지고, 예수님의 것이 내 안에 채워져야 한다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이 신앙의 신비를 잘 드러낸 공동체가 바로 오늘 독서(사도4,32-37)가 전하고 있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였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독서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도4,32-34ㄱ) 

 

참으로 아름다운 부활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다시 태어난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내 것이 없는, 예수님의 것으로 가득 차 있는 참으로 살아 있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이런 공동체를 만들어 봅시다!'

 

송영진 신부님_<“믿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7ㄱ.8-15)>

 

 

 

1) 이 대화에서, 핵심 가르침만 발췌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 말고는 인간을 하늘로 데리고 갈 수 있는 이가

 

없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예수님은 여러 구세주 가운데 한 분이 아니라,

 

‘유일한’ 구세주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여러 종교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일하게 참된 종교라는 것이 우리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만이 ‘구원의 길’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구원의 진리’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만이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구원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하고, 증언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바오로 사도는 아버지 하느님과 메시아 예수님을 향한

 

우리 신앙의 유일함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이른바 신들이 있다 하지만 ― 과연 신도

 

많고 주님도 많습니다만 ―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5-6).”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만 찾는 사람이라면,

 

무엇을 믿든 누구를 믿든 별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한다면,

 

‘예수님만’ 믿어야 합니다.>

 

 

 

2)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라는 말씀은, “내 말은 진리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사도들이 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사도들이 한 말이라면,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증언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직접 보고,

 

직접 들은 것에 대한 증언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서, 베드로 사도의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원로 여러분, 우리가 병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한 사실과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하는

 

문제로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라면, 여러분 모두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사도 4,8-10).”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떤 장애자를 고쳐 준

 

일은(사도 3,6-8),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루어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한 사람들은

 

자기들 눈으로 직접 본 그 일마저도 안 믿었습니다.

 

 

 

3) 12절의 ‘세상일’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들,

 

그리고 사람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일들을 가리킵니다.

 

‘하늘 일’은 하느님의 신비에 속한 일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라는 말씀은,

 

“내가 하는 일이 인간을 구원하는 일이라는 것을 믿어라.

 

그러면 인간 구원에 관한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도

 

믿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라는 말씀은,

 

“나의 십자가는 구원의 표지가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모세가 뱀을 들어 올린 일은, 민수기 21장에 있습니다.>

 

이 말씀을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예수님 자신이 곧 구원의 표지라는 뜻입니다.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하고, 예수님만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좁은 뜻으로는

 

“십자가의 목적은 영원한 생명이다.”이고,

 

넓은 뜻으로는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인간 세상의 여러 가지 사상들이나 이론들에

 

현혹되지 말고 예수님 말씀만 믿어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신앙생활의 목적과 이유는 단 하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어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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