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14일 (화)
(백) 부활 제2주간 화요일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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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김건태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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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6-04-12 ㅣ No.189050

이병우 신부님_"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20,23) 

 

'하느님의 자비가 되자!' 

 

오늘 복음(요한20,19-31)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는 말씀'과 '토마스의 불신과 이 불신을 치유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잠가 놓고 있었던 제자들 한가운데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가가셔서 '평화의 인사'를 하시면서, 당신의 온전한 육체를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시면서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20,21.22-23) 

 

부활 제2주일인 오늘은 '스물여섯 번째 맞이하는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주일은 2000년 대희년 부활 제2주일 때,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심이 매우 깊었던 파우스티나 수녀를 시성하실 때 제정된 주일입니다. 많은 성당에 '하느님의 자비상'이 걸려 있는데, 이는 1931년 2월 22일에 파우스티나 수녀가 환시 속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인 천국'은 '하느님의 자비가 넘쳐나는 나라'입니다. 그 반대가 '지옥'이지요.

믿는 이들은 이제와 영원한 천국을 그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없이는 결코 살아갈 수 없음을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토마스의 불신을 치유해 주신 하느님의 자비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우리에게 쏟아진 하느님 자비의 결정적 표지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졌고, 이 자비의 힘으로 우리는 날마다 죽지 않고 살아갑니다. 

 

하느님께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립시다!

그리고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자비가 되어봅시다! 

 

 

 

조욱현 신부님-“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오늘은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이다. 전통적으로 이날은 부활 성야에 세례를 받은 새 신자들이 흰 옷을 벗는 ‘사백 주일’(Dominica in albis) 로 불려왔다. 그 흰옷은 새 생명의 표징이며, 이제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그 세례의 은총을 실천으로 살아내야 함을 의미한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이 은총의 삶을 사도행전에서 분명히 보여 주었다. “그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사도 4,32)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이렇게 해석한다. “그들은 마음과 영혼이 하나였다.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랑은 그리스도이셨다.”(Sermo 355,1) 곧,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서 새로운 삶의 질서를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1. 부활하신 주님의 첫 선물: “평화가 너희와 함께”

요한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 번 반복하여 말씀하신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19절, 21절, 26절) 이 인사는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다. 그것은 두려움 속에 닫혀 있던 제자들에게 주시는 새 창조의 인사다. 예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22절) 하신 장면은 창세기 2장 7절, 하느님께서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행위와 대응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분이 숨을 내쉬셨을 때, 제자들은 새로운 생명을 받았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세상의 자녀가 아니라, 부활의 생명을 받은 새로운 창조였다.”(Hom. in Ioannem 86,4) 성령의 선물은 죄의 용서와 평화의 실현으로 이어진다.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다.”(23절) 교회는 이 성령의 은총을 통해 인간과 하느님, 인간과 인간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사명을 받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워지며,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화해의 성사가 된다.”(교회 8항) 

 

2. 의심하는 토마스: 신앙의 여정

복음의 두 번째 부분(24-29절)은 토마스 사도의 체험을 전한다. 그는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듣고도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않겠다.”(25절)라고 말한다. 토마스는 의심하는 인간의 대표, 곧 신앙을 과학적 증거로 확인하려는 세속적 이성의 상징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그를 단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상처를 보여주시며 초대하신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만져보아라.”(27절) 

 

성 그레고리오는 이 장면을 이렇게 해석한다. “토마스는 의심함으로써 우리를 도왔다. 그의 의심은 우리 믿음을 굳건하게 하였다.”(Homiliae in Evangelia 26,7) 그리고 토마스는 감격 속에 고백한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8절) 이 고백은 단순한 인식의 변화가 아니라, 존재의 전환이다. 그는 이제 자기 삶의 주인이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전적으로 그분께 의탁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라는 말씀은 단지 감정적 위로가 아니라, 계시 신앙의 본질을 드러낸다. 믿음은 눈으로 보는 확증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신을 계시하셨음을 받아들이는 은총의 응답이다. 교리서는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믿음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고, 인간이 그분께 전 존재를 맡기며 동의하는 것이다.”(143항) 

 

3. 보지 않고 믿는 행복: 자비의 신앙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는 믿음이다. 그분은 영광중에 부활하셨지만, 여전히 상처 입은 주님으로 우리 앞에 서 계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선포한 것도 이 때문이다. 부활의 영광은 고통의 상처를 통해 완성된 자비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그분의 상처는 우리 믿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남아 있다.”(In Ioannem Tractatus 121,5) 이 믿음은 새로운 창조의 삶으로 이어진다. 부활의 신앙은 현실을 초월한 도피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천상의 질서를 살아내는 삶이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콜로 3,3)라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인은 성령 안에서 매일 새로 창조되며,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평화를 드러내는 사람이다. 

 

4. 결론: 부활의 평화와 감사의 삶

결국 오늘 복음의 초점은 ‘보지 않고 믿는 자의 행복’이다. 이 행복은 세속적 만족이 아니라,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한 평화의 상태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8절)이라는 고백은 우리가 지금 이 순간도 살아계신 주님 앞에 서 있다는 신앙의 체험이며, 그분께 우리 전 존재를 맡기겠다는 서약이다. 

 

이제 우리도 부활의 증인으로, 성령의 숨결에서 용서와 평화를 이루며, 새 하늘과 새 땅의 시민으로 이 땅을 살아가야 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1베드 1,8) 그것이 바로, 자비로운 부활의 주님과 하나 되어 사는 삶, 곧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의 행복”이다. 

 

 

 

김건태 신부님_토마스의 부활 이야기

 

 

 

[말씀]

 

■ 제1독서(사도 2,42-47)

 

사도행전에서 저자 루카는 줄곧 이방인 세계에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토로함과 아울러 성령의 능력으로 이 어려움이 하나씩 극복되어 나감을 기술합니다. 사도행전 앞부분에 해당하는 오늘 독서에서 루카는 새로운 신앙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 전해주기 위하여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려줍니다. 이렇게 루카는 모든 인간사회가 겪을 수밖에 없는 위기의 순간들을 소개하기에 앞서 새로운 공동체상을 제시하여 희망을 북돋웁니다.

 

■ 제2독서(1베드 1,3-9)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새로운 신앙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일깨워 줍니다. 새로운 신앙생활, 그것은 인간의 마음을 타락으로 이끌어가는 부패한 세상을 구할 능력을 지니고 있기에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부활사건이 됩니다. 물론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는 앞으로도 쉼 없이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하고 장애물들을 치워 나가야 하지만, 신앙인들은 이미 희망과 기쁨으로 충만한 사람들, 구원을 향한 대열에 합류한 사람들이기에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 복음(요한 20,19-31)

 

복음저자 요한은 단 하나의 이야기 안에 세 가지 장면, 곧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당신 모습을 드러내심과 성령을 보내심과 죄의 용서를 위해 당신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심을 요약해서 전해 줍니다. 복음저자 루카와는 달리 요한에게 주님 부활과 성령 강림 사건은 동일한 기본적 사건의 양면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아울러 사도 토마스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부활사건 이후에도 사도들의 신앙은 여전히 어려운 지경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부활사건은 역시 사랑과 믿음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새김]

 

매년 부활 제2주일 미사에는 오늘 복음 말씀이 봉독 됩니다. “여드레 뒤에”라는 표현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사도단의 부활 체험을 담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사도들이, 지상에서 당신의 구원사업을 이어나가도록 몸소 선택하시고, 늘 곁에 두고 말씀과 행적으로 가르쳐온 사도들이 앞장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증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한, 의심의 대명사 토마스도 당연히 포함되어야 합니다.

 

토마스는 부활이 아니라 아직 죽음의 상태, 곧 무덤을 벗어나지 못해 쩔쩔매고 있습니다. 주님의 상흔, 손과 발의 못 자국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사람의 감각 기관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 믿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것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짐으로써, 다시 말해서 감각 기능으로 판단하거나 처리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닌데도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감각이라는 것이 인간의 마음처럼 변덕스럽기 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때와 장소, 혹은 기분이나 건강 상태에 따라 인식의 차이를 보이는 것이 감각입니다. 똑같은 사물을 놓고도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게 하고, 똑같은 음식을 섭취하면서도 시장기에 따라 맛을 다르게 느끼게 하는 것이 감각입니다. 어떻게 보면, 정말 믿지 못할 것이 감각 기능입니다. 그런데 이 감각으로 믿음을 가늠하겠다고 하니,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믿음이 자신의 운명과 삶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행위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감각으로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감각이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도움을 주어야 할 때가 더 많습니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 하는 속담은, 모든 것을 의심하라기보다는 매사에 실수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처신하라는 가르침인데도, 믿음이 없으면 어떠합니까? 두들겨 보고 또 두들겨 보고서도 무너지면 어쩌나 하는 불신이 앞서면 건너지 못합니다. 의심 많은, 믿지 못하는 토마스를 통해 우리가 다시금 살펴야 할 상식적인 지점입니다.

 

 

 

토마스를 좀 더 가까이 보았으면 합니다. 토마스는 한때 다른 제자들의 모범이던 사람, 주님의 죽음을 예감하고서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하고 제안했던 사람입니다. 그러했던 그가 ‘철저한 냉담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께 걸었던 희망이 컸던 만큼 그분의 참혹한 죽음이 주었던 충격도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상 처절한 죽음 앞에서 믿음과 희망이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그 좌절과 불신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아직도 죽음의 상태에서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토마스를 죽음에서 건져내시려 그에게 다가오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이 절망과 불신과 두려움이라는 죽음에서 토마스를 구원해내십니다. ‘보고서야 믿는’ 처지를 뛰어넘어 ‘보지 않고도 믿는’ 수준으로 차가웠던 토마스의 믿음, 죽어버린 믿음을 다시 끌어 올리십니다. 그리하여 (미사에서 사제가 성체와 성혈을 들어 올릴 때, 우리가 마음속으로 외치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으로 인도하십니다. 이처럼 토마스의 이야기는 또 다른 차원의 부활 이야기, 부활시기 동안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부활신앙입니다. 

 

 

송영진 신부_<“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 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19-29)>

 

 

 

1)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내주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부활의 첫 번째 은총은 바로 ‘용서’입니다.

 

우리는 용서를 하든지, 용서를 받든지 간에,

 

용서를 통해서 부활을 체험하게 됩니다.

 

내 안에 있는 모든 미움과 원한을 버리고

 

형제를 용서하는 것은 부활을 증언하는 일이기도 하고,

 

부활의 기쁨을 얻는 일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나의 모든 죄를 용서받을 때에도 당연히

 

부활의 기쁨을 얻게 됩니다.

 

용서 없이는 부활의 기쁨도 없습니다.

 

그런데 용서에서 필수요소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나에게 주신

 

‘용서의 은총’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고,

 

예수님께서 주신 은총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것은, 용서의 은총을 안 받겠다고 하는

 

것이고, 그러면 부활의 기쁨도 없습니다.

 

<회개는 용서하는 입장에서도 필수요소입니다.

 

용서란,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이렇게 지시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7-48).”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고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하여라.” 라는 지시입니다.

 

<여기서 ‘용서’는, ‘구원과 생명’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를 보낸다.” 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용서’를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루카복음에 있는 말씀과 ‘같은 가르침’입니다.

 

 

 

2) “성령을 받아라.” 라는 말씀은, 성령을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할 때에는, 또 용서하는 일을 할

 

때에도,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잘 받으려면 늘 기도해야 하고,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일해야 합니다.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용서하지 않을 권한’을 주신 말씀이 아니라, “용서받지 못한

 

채로 남아 있게 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3) 토마스 사도의 이야기는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 승천 후에 신앙인이 된 사람들은, 오늘날의 우리도,

 

보지 않고도 믿은 사람들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다른 사도들이 예수님을 만난 것 자체는

 

믿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나 그는 사도들이 만났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그 예수님인지,

 

혹시 사도들이 어떤 환시 같은 것을 체험한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께서 ‘영적인 존재’로 나타나신 것인지, 아니면

 

사도들이 ‘예수님의 유령’을 본 것은 아닌지(루카 24,37)

 

의심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 사도를 위해서 다시 나타나셔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신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당신이 그 몸 그대로 부활하셨음을 확인시켜 주신 일입니다.

 

어떻든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을 향해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최초로 신앙고백을 한 신앙인으로

 

재평가되어야 할 중요한 인물입니다.

 

우리 교회의 교리는 거의 대부분

 

‘보지 않았지만 믿어야 하는’ 교리입니다.

 

‘천지창조’의 경우,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그것을

 

본 사람은 없지만,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종말과 재림의 경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니, 그것도

 

역시 본 사람이 없지만, 우리는 그 일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라는 말씀은,

 

“볼 수 없는 것인데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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