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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신부님_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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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신부님_<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4.7)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20,18) '날마다 엠마오를 하자!' 오늘 복음(요한20,11-18)은 '요한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발현사화입니다. '발현사화'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인데, 이는 예수님 부활의 완전한 확증입니다. 그 발현의 첫 은총이 여인들에게, 그것도 일곱 마귀가 들었던 큰 죄인이었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주어집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회개한 여인이었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끝까지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여인입니다. 우리도 마리아 막달레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크게 회개하고, 끝까지 주님을 믿고 따르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같은 사람들이 이 땅에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오늘 독서(사도2,36-41)가 전하는 '사도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의 메시지입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 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사도2,38)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20,18) 비가 내리는 어제 많은 본당에서 '엠마오'라는 것을 하면서 부활 때 수고한 이들과 함께 외부로 나가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을 것입니다. 마산가톨 릭우리농 본부 직원들은 외부로 나가지는 못하고, 점심시간 때 안에서 삼겹살과 장어를 구어 먹으면서 부활을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부활엠마오'는 내일 복음(루카24,13-35)인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라는 말씀 안에 드러나 있듯이, 단순히 음식을 먹으면서 즐기는 행위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엠마오는 하루가 아니라, 매일이 부활엠마오가 되어야 합니다. 매일 주님을 만나고, 그래서 매일 크게 회개하고, 매일 기쁨이 되고 매일 부활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엠마오의 참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김건태 신부님_“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 부활 대축일 낮미사 때 봉독된 말씀을 바로 뒤따르는 부분입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에 가서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전한 다음의 일입니다.
내용상으로 보면, 제자들이 다녀간 다음에도 마리아 막달레나는 여전히 무덤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여인은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따랐고, 지금도 예수님을 잃고 큰 슬픔과 고통 속에 잠겨, 근심 걱정 속에 울며 하소연합니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실 때 그 현장에 있었기에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 예수님을 다른 곳으로 모셔간 것이 아니라,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다는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복음 저자 루카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로 소개하며(루카 8,2), 이 이름은 신약성경에서 모두 열두 번 언급됩니다. 예수님의 치유 은총으로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뒤에, 비슷한 처지의 다른 여인들과 함께 자기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을 따라다니며 시중들었고(루카 8,2-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마지막까지 십자가 곁을 지켰으며, 무덤에 모실 때도 그 맞은쪽에서 지켜본 여인,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아 큰 사랑을 드러낸” 여인이었습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것도, 그분의 부활을 확인하려 함이 아니라, 돌아가신 다음에도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향료’가 언급되어 있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주검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을 표현해야 하는데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많은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 사랑의 마음을 심어주셨던 예수님이 가까이 다가와 서 계시지만, 알아보지 못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인 줄은 몰랐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동안 소중히 간직해 왔던 사랑의 마음으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뵙는 데는 아직 부족한 것 같습니다. 아니, 누군가 주님을 모셔갔다는 초조감과 불안감으로 훼손된 그 사랑을 완성으로 이끌어 주님 부활 신앙으로 건너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부활하신 주님의 개입이 또 한 번 필요했습니다. 주님의 사랑, 구체적으로 그분의 사랑이 묻어나는 부르심, “마리아야” 하는 사랑의 음성이 필요했습니다. 이 사랑의 음성이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켜, “라뿌니!”를 외치게 하며, 나아가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는 신앙고백으로 이끕니다.
부활 신앙은 전적으로 사랑에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고, 사랑으로 가르치시고 행적을 보여주셨으며, 끝내 그 사랑을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완성하셨기에, 사랑 없이는 부활 신앙고백도, 부활 신앙생활도 불가능함을 오늘 다시금 확인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 역시 다시 한번 주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확신합니다. 오늘 하루, 그 대상이 누구이든 사랑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가운데, 부활 신앙인임을 힘껏 뽑내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 앞에 홀로 남아 울고 있다(11절). 그 눈물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깊은 사랑의 표현이다. 제자들이 돌아간 뒤에도 자리를 지킨 것은 사랑 때문이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이 없으면 눈물도 없다. 그러나 사랑은 눈물을 통해 더욱 굳건해진다.”(In Ioann. Evang. tract. 121,3) 마리아의 눈물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갈망이었고, 바로 그 갈망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다가와 물으신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15절) 이 질문은 단지 마리아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부활의 물음이다. 우리가 신앙생활 속에서 진정으로 찾는 분은 누구인가? 성공, 안락, 세속적 만족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이신가?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말한다. “인간의 마음은 그리스도를 찾을 때만 안식을 얻는다. 그분이야말로 참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Redemptor Hominis 10항) 마리아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실 때(16절), 눈이 열리고 그분을 알아본다. 성 그레고리오는 이렇게 설명한다. “주님은 이름을 부르심으로써 마음의 눈을 열어주셨다. 그분의 음성이 사랑의 불을 일깨운 것이다.”(Homiliae in Evangelia 25,1) 부활 신앙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부르시는 그분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것이다. 주님은 지금도 나를 부르시며, 내가 그분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기를 기다리신다. 마리아는 너무 반가워 예수님의 발을 붙잡으려 한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신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나는 내 아버지께 올라간다.”(17절) 이는 단순히 육체적 접촉을 금지하신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그분과의 관계는 이전과 다른 차원, 곧 성령 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새로운 관계임을 가르쳐 주신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내 형제들에게 가서 전하여라.”(17절)며 복음의 첫 사도로 세우신다. 부활의 기쁨은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야 할 선포 사명이다. 선교 교령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선포의 사명으로 이어진다. 교회는 받은 복음을 세상 끝까지 증언하도록 부름을 받았다.”(3항) 부활의 삶은 눈물 속에서 주님을 찾는 끈질긴 사랑, 그분의 음성을 듣는 영적 민감함, 세상에 복음을 증거하는 파견의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서 주님을 만났듯이, 우리도 삶의 눈물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신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15절) 우리가 일상에서 그분을 “라뿌니, 스승님!”이라고 고백하며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참된 부활의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송영진 신부님_<“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20,11-18).>
1)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부활의 첫 증인’으로 삼으셨음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본 첫 번째 신앙인이고,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한 첫 번째 선포자로서 우리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마리아가 처음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첫 번째로 알아보았다는 점이 중요하고, 알아보자마자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예수님과 긴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으면서도 못 알아본 제자들도 있었고(루카 24,16), 예수님을 알아보았으면서도 부활하셨다는 것을 못 믿고 유령이라고 생각한 사도들도 있었습니다(루카 24,37).> “예수님께서는 왜, 마리아 막달레나를 당신 부활의 ‘첫 증인’으로 삼으셨을까?” 다음 말씀을 답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만 편애하신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시는데,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모든 신앙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앞서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사도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고(마르 14,50), 베드로 사도의 경우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말했습니다(마르 14,66-71).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끝까지 예수님 곁을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 십자가 곁에 있었고(요한 19,25),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실 때 지켜보고 있었고(마르 15,47),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아침에 남들보다 먼저 무덤으로 갔습니다(요한 20,1).
2) 요한복음에 있는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잃었다고 생각하면서 울고 있는 마리아를 그곳에 그대로 내버려두고, 두 사도가 그냥 가버렸다는 것은(요한 20,10),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마리아를 위로하거나,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찾아보려고 노력하거나, 아니면 마리아를 데리고 갔어야 하지 않을까? 그냥 집으로 돌아가 버린 두 사도의 모습과 무덤에 혼자 남아서 울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크기와 깊이에 분명히 큰 차이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3) “이미 우리 곁에 계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아야 한다.” 라는 말은, 부활시기에 자주 듣는 말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라고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면서 예수님을 알아보아야 한다는 말만 한다면, 그 말은 ‘빈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가 알아보고 만나는 ‘방법’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우리는 기도 중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2)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3) ‘이웃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든지, 사랑을 주든지 간에... <좋은 예가 사도행전 8장에 기록되어 있는, ‘필리포스와 에티오피아 내시’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에는 예수님이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에티오피아 내시는 기도와 성경 묵상 중에, 또 필리포스가 실천한 ‘이웃 사랑’을 통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과 같은 체험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4)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또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도 영적으로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특별한 체험을 못했어도 주눅 들지 말아야 하고, 기가 죽을 필요도 없습니다. 꼭 무슨 체험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기쁨’과 ‘평화’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표징입니다(필리 4,4-7).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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